아픈역사에서 배운다/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4)] 한혈마의 고향 |‘서역’의 세계

화이트보스 2008. 9. 27. 19:13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4)] 한혈마의 고향 |‘서역’의 세계

漢 무제, 對흉노 연합전선 구축 위해 서역에 장건을 밀사로 파견

장건, 수차례 구금·탈출 끝에 13년 만에 돌아와

대완·오손·대하·안식 등 서역의 나라들 중국에 알려

漢, 한혈마 뺏기 위해 서역 정벌

말 숭배사상 강해… 한혈마, 천마(天馬)의 후손으로 알려져

기원전 60년 서역도호부 설치 후 본격 서역 진출 교두보 마련

200년 후 사신 감영, 안티오크 진출

중국 비단 중개 독점한 안티오크 상인, 감영의 로마행 막아

실크로드 통해 로마의 화폐·유리제품 등 유라시아 전역에 유통돼 





▲ 유라시아의 천마 숭배 사상을 보여주는 경주 천마총 천마도 장니.


6세기경 중국의 양(梁)나라 사람인 종름(宗)이 강남지방의 세시풍습을 기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는 칠월 칠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물가에 한 남자가 살았는데, 매년 8월경이면 그곳으로 뗏목 하나가 흘러 내려오곤 했다. 하루는 그가 그 뗏목 위에 조그만 집을 짓고 식량을 많이 실은 뒤 출발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10개월 남짓 뗏목을 타고 가다가 어딘가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훌륭한 누각이 있었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한 여인이 베틀에서 옷감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남자가 소를 끌고 그곳에 와서 물을 먹이기에, 그에게 그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돌아가서 촉(蜀)나라에 사는 모모(某某)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 뒤 그는 다시 뗏목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모모씨를 찾아 연유를 물어보니, “모년 모월 밤하늘에 갑자기 이름을 알 수 없는 별 하나가 나타나 견우성에 접근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계산을 해보니 그 달은 바로 자기가 뗏목을 타고 그 물가에 도착한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별로 가는 뗏목’을 타고 하늘나라를 다녀온 사람. 중국의 민간설화에서는 그 주인공이 바로 장건(張騫)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한 무제가 흉노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흉노의 적이었던 월지(月氏)와 연맹을 도모하기 위해 서역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무제의 밀명을 받은 그는 감보(甘父)라는 흉노인을 길잡이로 데리고 기원전 139년 수도 장안을 출발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는 도중에 흉노에게 발각되어 초원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는데, 11년이 지난 뒤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월지를 다시 찾아 나섰지만 월지는 이미 흉노의 공격을 받아 멀리 도망간 뒤였다. 그래서 그는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방까지 내려갔다. 거기서 월지의 왕을 만나서 무제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정착해 편안하게 잘 살고 있던 월지인에게 사나운 흉노인과 전쟁하기 위해 머나먼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장건은 빈손으로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흉노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길, 즉 티베트인이 사는 강중로(羌中路)를 이용했는데 불행하게도 또 붙들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행운의 사나이였다. 흉노에서 일어난 정변을 틈타 1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고, 이번에는 전에 남겨두었던 처자식까지 데리고 귀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장건은 출발한 지 13년이 지난 기원전 126년에 마침내 장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무제는 아예 국경의 관문을 닫아 걸고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범죄자와 돈황 현지의 ‘악소년(惡少年)’, 즉 불량배와 변방의 병사로 구성된 6만명을 다시 이광리에게 지휘케 하여 기원전 102년에 제2차 대완원정을 감행했다. 원정군은 대완 지방의 이사(貳師)성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끊고 40여일 포위했다. 견디지 못한 대완 사람들은 화평을 요청했다. 원정군은 한혈마 수십 필과 보통말 3000여필을 받아서 돌아왔다.




동원된 인력이나 투입된 물자에 비해서 한혈마 수십 필을 얻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광리에게 ‘이사장군’이라는 칭호를 하사했고, 또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한혈마를 보고 ‘천마가(天馬歌)’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한 무제가 그토록 한혈마를 구하고자 했던 까닭이 단순히 전쟁에서 사용할 쾌속마를 확보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는 천마의 후예인 한혈마를 타고 곤륜산에 올라가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불로장생의 영약을 얻고자 했고, 나아가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황하의 근원에 도달함으로써 잦은 범람을 일으키는 황하의 치수(治水) 비법을 터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만 유독 ‘천마’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3000년 전 카스피해 북방에 거주하던 인도·이란인에 의해 말이 처음으로 순화된 이래 말에 대한 숭배사상은 유라시아 대륙 동서에 넓게 퍼져나갔다.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 고분에서는 순록의 뿔로 화려하게 치장된 가면이 씌워진 채 가지런히 순장된 수십 필의 말이 발견되었으니, 이는 망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안내해주는 주인공이 바로 말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9년에는 중국 서부 무위의 한 분묘에서 높이 35㎝ 길이 45㎝ 크기의 청동으로 된 말이 발견되었는데, 뒤로 치켜져 날아가는 듯한 꼬리와 발 아래 깔려 있는 제비의 모습으로 미루어볼 때, 문자 그대로 ‘천마’를 형용한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부터 1800년 전의 것이다. 곽말약(郭沫若)이라는 학자가 지어준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이 청동분마상은 오늘날 중국 관광을 대표하는 로고로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77년에는 무위에서 가까운 주천의 정가갑(丁家閘) 5호 고분벽화에서 천마가 발견되었다. 이는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장니(障泥·말이 달릴 때 흙이 튀어오르지 않도록 안장 아래에 붙이는 차단막)에 그려진 천마와 매우 흡사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무튼 우여곡절도 많은 사행길이었지만 장건이 전해준 이야기는 세인의 주목을 받아 머나먼 서역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과 설화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 무제와 같은 통치자에게 서역이라는 신천지는 중국이 정복해야 할 전략적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한혈마를 비롯한 그곳의 특이한 물산의 확보라는 목적뿐만 아니라 흉노와 같은 북방 유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무제는 기원전 108년에는 조파노(趙破奴)라는 장군을 보내어 누란(樓蘭)과 거사(車師)를 정복했고, 그 뒤 이광리를 대완으로 보낸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노력은 예상처럼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중국의 서역경영에 커다란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선제(宣帝·기원전 73~49) 때였다. 서역의 도시국가들이 흉노와 연맹하여 중국에 적대를 계속하자 정길(鄭吉)이 이끄는 군대가 파견되어 이들 도시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60년 현재 신강성 윤대(輪臺) 부근에 있는 오루성(烏壘城)에 서역도호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 뗏목 타고 가는 장건. 역사상 장건의 이 여행은 ‘서역착공’이라 불린다. ‘착공(鑿空)’이란 문자 그대로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땅을 뚫었다는 뜻이다. 




한 무제는 흉노를 치기 위한 예비전략으로 장건을 파견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그를 파견한 지 6년 뒤인 기원전 133년 드디어 흉노와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흉노는 예상보다 훨씬 끈질기고 강한 상대였으며 전황은 어렵게 전개되어 갔다. 바로 그때 장건이 돌아온 것이다. 그는 13년 동안 자기가 보고 들은 ‘서역’의 사정을 황제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월지가 동맹을 거부한 것이 실망스러웠지만 그 대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있는 오손(烏孫)·대완(大宛)·대하(大夏)·안식(安息)·대진(大秦) 등 여러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오손은 천산산맥 북방에 살던 유목민이었고, 대완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부근의 나라였으며, 대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그리스인 정권 박트리아, 안식은 파르티아, 대진은 로마를 지칭했다.




그런데 장건이 갖고 온 정보 중에서 한 무제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오손과 대완 지방에 산다고 하는 한혈마(汗血馬)라는 이름의 명마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마(天馬)’의 후손인 이 말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하루에 천리를 주파할 수 있고 마치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한 무제는 대완이라는 나라에 사신을 보내 한혈마를 요청했으나 거부되자 군사적인 방법에 호소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이광리(李廣利)라는 장군이 기원전 104년 수만의 군사를 데리고 대완을 향해 출발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도중에 위치한 도시들이 한나라를 도왔다가 혹시 흉노가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성문을 꼭꼭 잠그고 식량 한 톨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병사들은 다 도망갔고 이광리는 수천 명의 남은 병사를 추슬러 돈황으로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무제는 아예 국경의 관문을 닫아 걸고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범죄자와 돈황 현지의 ‘악소년(惡少年)’, 즉 불량배와 변방의 병사로 구성된 6만명을 다시 이광리에게 지휘케 하여 기원전 102년에 제2차 대완원정을 감행했다. 원정군은 대완 지방의 이사(貳師)성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끊고 40여일 포위했다. 견디지 못한 대완 사람들은 화평을 요청했다. 원정군은 한혈마 수십 필과 보통말 3000여필을 받아서 돌아왔다.




동원된 인력이나 투입된 물자에 비해서 한혈마 수십 필을 얻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광리에게 ‘이사장군’이라는 칭호를 하사했고, 또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한혈마를 보고 ‘천마가(天馬歌)’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한 무제가 그토록 한혈마를 구하고자 했던 까닭이 단순히 전쟁에서 사용할 쾌속마를 확보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는 천마의 후예인 한혈마를 타고 곤륜산에 올라가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불로장생의 영약을 얻고자 했고, 나아가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황하의 근원에 도달함으로써 잦은 범람을 일으키는 황하의 치수(治水) 비법을 터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만 유독 ‘천마’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3000년 전 카스피해 북방에 거주하던 인도·이란인에 의해 말이 처음으로 순화된 이래 말에 대한 숭배사상은 유라시아 대륙 동서에 넓게 퍼져나갔다.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 고분에서는 순록의 뿔로 화려하게 치장된 가면이 씌워진 채 가지런히 순장된 수십 필의 말이 발견되었으니, 이는 망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안내해주는 주인공이 바로 말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9년에는 중국 서부 무위의 한 분묘에서 높이 35㎝ 길이 45㎝ 크기의 청동으로 된 말이 발견되었는데, 뒤로 치켜져 날아가는 듯한 꼬리와 발 아래 깔려 있는 제비의 모습으로 미루어볼 때, 문자 그대로 ‘천마’를 형용한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부터 1800년 전의 것이다. 곽말약(郭沫若)이라는 학자가 지어준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이 청동분마상은 오늘날 중국 관광을 대표하는 로고로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77년에는 무위에서 가까운 주천의 정가갑(丁家閘) 5호 고분벽화에서 천마가 발견되었다. 이는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장니(障泥·말이 달릴 때 흙이 튀어오르지 않도록 안장 아래에 붙이는 차단막)에 그려진 천마와 매우 흡사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무튼 우여곡절도 많은 사행길이었지만 장건이 전해준 이야기는 세인의 주목을 받아 머나먼 서역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과 설화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 무제와 같은 통치자에게 서역이라는 신천지는 중국이 정복해야 할 전략적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한혈마를 비롯한 그곳의 특이한 물산의 확보라는 목적뿐만 아니라 흉노와 같은 북방 유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무제는 기원전 108년에는 조파노(趙破奴)라는 장군을 보내어 누란(樓蘭)과 거사(車師)를 정복했고, 그 뒤 이광리를 대완으로 보낸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노력은 예상처럼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중국의 서역경영에 커다란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선제(宣帝·기원전 73~49) 때였다. 서역의 도시국가들이 흉노와 연맹하여 중국에 적대를 계속하자 정길(鄭吉)이 이끄는 군대가 파견되어 이들 도시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60년 현재 신강성 윤대(輪臺) 부근에 있는 오루성(烏壘城)에 서역도호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漢 무제, 對흉노 연합전선 구축 위해 서역에 장건을 밀사로 파견

장건, 수차례 구금·탈출 끝에 13년 만에 돌아와

대완·오손·대하·안식 등 서역의 나라들 중국에 알려

漢, 한혈마 뺏기 위해 서역 정벌

말 숭배사상 강해… 한혈마, 천마(天馬)의 후손으로 알려져

기원전 60년 서역도호부 설치 후 본격 서역 진출 교두보 마련

200년 후 사신 감영, 안티오크 진출

중국 비단 중개 독점한 안티오크 상인, 감영의 로마행 막아

실크로드 통해 로마의 화폐·유리제품 등 유라시아 전역에 유통돼 




▲ 장건의 서역 루트

그러나 중국이 서역에 진출하여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 마침 흉노가 분열되고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왕망(王莽)의 찬탈로 전한이 망하자 중국은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고, 후한이 들어선 뒤에도 진출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다가 1세기 후반 반초(班超)의 활약으로 서역에 대한 패권이 회복되긴 했지만, 그 후로도 중국의 서역 지배는 단절과 연결이 반복되는 삼통삼절이었다. 아무튼 서역도호부를 통해서 입수된 서방세계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사기’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역사서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한서’의 작자인 반고(班固)는 반초와 같은 집안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히 서역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반초가 서역에서 활약할 때 그가 파견한 감영(甘英)이라는 사신의 일화는 당시 서방세계에 대한 중국 측 지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여서 흥미롭다. 기원전 97년 감영은 가장 서쪽에 있다고 알려진 대진(大秦), 즉 로마를 향해서 출발했다. 당시 대진은 금은보화가 많고 특히 야광벽(夜光璧), 화완포(火浣布), 산호(珊瑚), 호박(琥珀), 유리(琉璃)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자들이 풍부하게 나는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감영은 오늘날 아프간과 이란 및 이라크를 거쳐서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조지(條支), 즉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가 배를 타려고 했을 때 파르티아인은 “바다가 너무 망망해서 다니는 사람이 바람을 잘 만나면 3개월 만에 건너지만, 만약 풍랑을 만나면 2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출항하는 사람은 3년치 식량을 싣고 가는데, 바다에서 향수병에 걸려 죽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감영은 잔뜩 겁을 먹고 그 길로 돌아오고 말았다.




파르티아인이 이렇게 과장된 말로 그를 겁준 이유는 바로 비단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은 비단의 유일한 생산지였고 로마는 그 최대의 소비지였으며 파르티아는 그 중개자였다. 파르티아인은 중국과 로마가 직접 접촉하게 될 경우 자신들의 중개무역 이익이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우리가 중국과 서방을 연결하는 육상 교통로를 ‘비단길’ 혹은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비단 이외에도 많은 물자가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되었고 그것을 판매하는 상인도 왕래하게 되었다. 육상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해상을 통해서도 교류와 접촉은 확대되었다. 로마제국의 화폐가 인도양 해안뿐만 아니라 베트남 남부에서도 발견되었고, 인도양과 동남아 지역에서 나오는 조개와 거북껍질이 중국으로 수입되기도 하였다. 지중해 연안에서 만들어진 유리제품은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까지 수입되어 궁정에서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로마제국의 대도시에서는 중국산 비단으로 만들어진 얇게 비치는 옷을 걸친 귀족여인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이렇듯 지금부터 이미 2000년 전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대륙 여러 지역의 민족과 역사와 문명을 연결하는 대동맥으로서 힘찬 맥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






장건이 한 무제에게 올린 보고


대완은 흉노의 서남쪽에 있고 한나라에서는 정서(正西)에 있으며 한나라에서 대략 만리는 됩니다. 그 풍속은 정착생활(土著)이고 농사를 짓고, 쌀과 보리를 심으며 포도주(蒲陶酒)가 있습니다. 좋은 말이 많은데 말이 피땀(汗血)을 흘리며 그 조상은 천마(天馬)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성곽과 가옥이 있고, 그 속읍(屬邑)으로는 크고 작은 70여개의 성(城)이 있으며, 백성의 수는 대략 수십만 명이 됩니다. (중략) 우전(于    )의 서쪽에서 강물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서해(西海)로 주입되며, 그 동쪽에서 강물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 염택(鹽澤)으로 주입됩니다. 염택의 물은 지하로 잠행하는데, 그것이 남쪽으로 흘러와 황하의 근원이 되어 ‘지상으로’ 분출됩니다. 옥석이 많이 나며 황하는 중국으로 흘러듭니다.

‘사기’ 대완열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