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6)] 신질서를 모색하는 고대 중앙유라시아

화이트보스 2008. 9. 27. 19:19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6)] 신질서를 모색하는 고대 중앙유라시아

동아시아, 한·흉노 양극체제 무너지며 대혼란… 7세기 당제국으로 매듭

중국, 오호십육국·위진남북조 거쳐 수나라로 통일

북방은 선비·유연 지배 거쳐 6세기 돌궐제국으로

수·당, 유목민 영향 漢보다 개방적

중국 역사상 북방민족의 지배기간이 절반 넘어

북방민족, 200년 가까이 산둥성 등 중국 북부전역 약탈

북방 새 강자 돌궐, 카스피해까지 지배

유목민 일부 한반도로 이동, 신라지역 정착 가능성

일부 학자 “일본까지 진출 야마토 정권 수립” 주장도 


 




 


▲ 내몽골 호린게르에서 발굴된 선비족 묘의 벽에 그려진 수렵도. 한 학자는 일찍이 수천년의 중국 역사를 한마디로 정의하여 “만리장성을 사이에 둔 남과 북의 대결”의 역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같은 단언은 중국사의 내적인 변화와 발전을 무시하고 대외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북방민족과의 갈등과 대결, 정복과 복속이 중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의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제국이 출현한 기원전 221년부터 마지막 왕조 청제국이 멸망한 1911년까지 2000여년 가운데, 중국의 일부 혹은 전체가 북방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기간은 거의 반 정도에 이른다. 게다가 흔히 한족왕조로 분류되는 수당제국도 사실상 그 건국세력이 북방계의 혼혈인 소위 ‘관롱집단’이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최근 일본의 한 대표적인 학자는 북위는 물론 당제국도 모두 선비(鮮卑)족 계통의 ‘탁발(拓跋)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한 바 있다. 우리가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중국사를 ‘남과 북’ 대립의 역사로 보는 것도 결코 과장이라고 하기만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역사에서 한족에 대한 북방민족의 장기간의 정복과 지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史實)’이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과거 중국의 학자들은 비록 중국이 일시 군사적으로 북방민족의 지배를 받긴 했지만, 한족의 탁월한 정치·문화적 수준과 인구·경제적 역량은 소수의 이들 지배자를 흡수하고 동화시켜 결국 한민족의 일부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것이 소위 ‘한족중심 동화론’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한족중심주의를 명백하게 배격하고 있다. 한족은 다른 55개 소수민족과 더불어 중국의 역사를 성립·발전시켜온 ‘중화민족’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다. 다시 말해 고대의 흉노족, 선비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도 모두 중화민족의 일부라는 것이다. 과거 ‘한족중심주의’는 ‘중화민족중심주의’에 의해서 대체된 셈이다. 이런 논리를 인정한다면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될 수밖에 없고, 현재 ‘동북공정’이니 ‘서북공정’이니 하면서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화하는 작업도 그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이제까지 외국 학자들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같은 입장을 방조하고 강화시켜 주었던 것 같다. 소위 ‘정복왕조론’이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했다.




 중국이건 외국이건 불문하고 이렇게 북방민족과 중국의 관계를 관찰할 때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이 한문으로 쓰여 있다는 데에 기인한다. 물론 시대가 내려오면 북방민족도 독자적 문자를 만들고 기록을 남기긴 하지만 여전히 전달되는 정보의 양은 제한적이다. 그렇다보니 문헌기록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학자의 관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기록자의 관점을 취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의 ‘주관’이 아니라 ‘객관’인 것처럼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 측 기록에만 의존해서 연구하고 서술한다고 상상해보자. 게다가 현재 다른 소수민족처럼 우리도 중국의 영토 안에 편입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사를 서술한 책의 내용은 아마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따라서 북방민족, 나아가 중국 ‘주변’ 민족의 역사를 연구할 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기존의 텍스트(여러 형태의 사료)를 ‘해체’하여 그 패권적인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은 첫째로 텍스트 안에 내재된 중국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일과, 둘째로 비(非)중국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한제국 붕괴 이후 약 350년간 일어난 역사에 대해서도 그동안 줄곧 중국 중심적 역사관에 의해 이해·서술·교육되어 왔지만, 이제는 남북의 균형된 역사서술의 틀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먼저 장성 이남 지역에 대해서 살펴보자. 기원후 220년 한제국의 멸망 이후 위·오·촉이 정립하는 삼국시대가 도래했고 뒤이어 (서)위와 (서)진의 짧은 통일왕조가 들어섰다. 그러나 곧 흉노·갈호·선비·저·강 등 소위 ‘다섯 오랑캐(五胡)’ 민족이 잇따라 화북을 정복하고 여러 왕조를 건설하는 ‘오호십육국’의 시대로 넘어갔다. 이제까지 이에 대한 서술은 ‘역사가 없는 민족’들이 갑자기 중국사의 무대에 나타나 야만적인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것처럼 묘사되어 왔다. 그런가 하면 위트 포겔과 같은 학자는 이들에게 ‘정복왕조(Conquest Dynasties)’의 특수한 형태로서 ‘침투왕조(Infiltration Dynasties)’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 까닭은 몽골이나 만주처럼 일거에 장성을 돌파하고 중국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천천히 마치 물이 삼투되듯이 중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한편 화남지방에는 한족의 망명정권이 고도의 문화수준을 유지하면서 흥망을 거듭했고, 그러는 사이 화북지역에서도 선비족 계통의 (북)위왕조가 통일을 이룩하고 마침내 중국문명의 세례를 받고 ‘한화(漢化)’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 계승국가들에 의한 통치가 계속되다가 589년 마침내 수나라에 의해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제국이 회복되었고, 당제국에 의해 계승되면서 중화왕조는 화려한 부흥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성 이남의 이같은 역사적 전개는 중국사의 맥락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국사상 위진남북조라는 분열·혼란기는 그에 선행했던 시대에 동부 유라시아 국제질서의 기본적 틀이었던 한·흉노 남북대립의 양극체제의 붕괴로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리장성 이남의 농경지대 중국에서 일어났던 혼란과 유사한 현상이 흉노제국 붕괴 이후 북방 초원지대에서도 관찰되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바로 이러한 혼란의 파장이 확대되면서 중국사상 ‘오호십육국 시대’가 출현한 것이다. 그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후 1세기 중반 흉노가 분열되면서 일부가 고비사막을 건너서 남하했고 한제국의 영내에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북방민족 남하의 시발이 되었다. 한편 초원에 잔류했던 또 다른 흉노(북흉노)가 91년경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버리자, 그 자리를 채우고 들어온 것은 동쪽의 선비족이었다. 장성 이북의 새로운 패자가 된 선비족은 잔류한 흉노인을 흡수하며 중국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전을 시작하였다. 2세기 전반이 되면 약탈의 무대는 요동·요서 지역은 물론이지만 서쪽의 대군·오원·삭방 등 산서성 북부도 포함되어 중국 북부 거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 약탈전은 씨족·부족을 기본 단위로 하여 각 집단의 군장의 지휘하에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연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문자료에는 그들이 ‘대인(大人)’으로 기록되었으나 물론 선비족 고유의 명칭을 의역한 것이다. 2세기 초에는 ‘선비의 읍락 120부(部)’가 각자 중국 측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각개약진의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2세기 중반 단석괴(檀石槐)라는 인물의 출현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약탈전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분산된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동부·중부·서부의 삼부체제로 재편하였다. 이것은 유목군대의 전형적 편제방식인 좌익·중군·우익에 준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므로, 말하자면 선비족은 단석괴의 지도 아래 대규모 군사동맹체를 결성하게 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사망한 뒤 혼란에 빠진 선비는 가비능(軻比能)이라는 인물에 의해 일시 세력을 회복하지만 235년 그가 암살당하자 선비연합체는 각 지역으로 분산·할거하면서 대대적인 이동의 물결이 일어났고 일부는 남하하여 북중국으로 들어갔다. 3세기 말이 되면 화북 지역에 거주하는 호족(胡族)의 숫자가 600만~700만명에 이르게 되는데, 당시 한족이 100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유목민이 남하했는지 알 수 있다.



 

 

 




 

▲ 내몽골 후호호트에서 출토된 북위 시대의 무사 토용(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



바로 이러한 민족대이동의 물결 속에 일부 유목민은 북중국이 아니라 한반도로 내려와 신라지방에 자리잡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4~5세기가 되면 신라에서 갑자기 대형 적석목관분이 조영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중앙유라시아의 문화적 기류를 느끼게 하는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마구, 커다란 솥인 동복(), 동물양식의 버클, 아키나케스식 단검, 금관, 유리제품 등이 그러하다. 또한 이 시기에 신라의 임금은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새로운 칭호로 불렸는데 ‘간’은 유목국가의 군주인 ‘칸(khan)’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칸’이라는 칭호는 바로 그 즈음에 선비 계통의 유목민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와 같은 학자는 유목민의 일부가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들어와 4세기 말경에는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정권을 세웠다는 소위 ‘기마민족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훈족의 출현으로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규모의 민족이동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평행현상은 대륙의 동서 양단에서뿐만 아니라 장성의 남과 북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즉 양측 모두 한과 흉노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극도의 혼란에서 단계적으로 통일의 국면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아 나갔다. 북방에서 선비족의 부족별 난립이 단석괴·가비능에 의해 정리되었듯이, 남방에서도 오호십육국의 초기 혼란기가 티베트 계통의 전진(前秦)에 의해 정리되었다. 뒤이어 북방에서는 선비족의 뒤를 이어 4세기 후반 유연(柔然)이라는 새로운 민족이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고 강력한 유목국가를 건설하게 되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남방에서도 선비족 계통의 탁발(拓拔)부족이 남하하여 북위정권을 세우면서 화북을 통일하고 안정된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 두 국가는 오랫동안 군사적으로 대치하면서 전쟁을 계속했는데, 몇 년 전 애니매이션 영화로도 소개되었던 ‘뮬란’의 주인공 ‘목란(木蘭)’은 바로 유연과 전쟁에 투입된 탁발족 여인이었다.








 

▲ 내몽골에서 출토된 말머리와 소머리에 사슴뿔을 접합시킨 선비족의 금관.

그러다가 마침내 중국에서는 589년 수나라가 3세기 반 만에 통일제국 건설에 성공했는데, 북방에서도 552년 돌궐제국의 등장으로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부터 동쪽으로 흥안령 산맥에 이르는 중앙유라시아의 통일 유목국가가 탄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제국의 붕괴 이후 수당제국의 출현이 있기까지 중국이 새로운 통일제국의 모델을 모색했듯이, 중앙유라시아 역시 흉노제국의 붕괴 이후 선비와 유연의 시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유목제국의 모델을 탐색했던 것이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양측이 찾은 해답 내용의 유사성이다. 수당제국은 오랫동안의 호한융합(胡漢融合)의 결과 탄생했기 때문에 과거 한제국에 비해 서방세계에 훨씬 더 개방적이었으며, 알타이 지방에서 기원한 돌궐인의 제국 역시 과거 흉노에 비해 서방 진출과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과 흉노의 붕괴와 함께 종말을 고한 유라시아 동부지역의 고대는 오랜 혼란기 동안 거듭된 모색을 통해서 결국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간 교류와 통합에 적극적인 새로운 제국 체제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 결과 7세기부터 9세기까지 약 300년간 유라시아 대륙은 중앙유라시아의 투르크계 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당제국, 서아시아의 칼리프제국, 그리고 서구의 비잔틴·프랑크 제국 등과 함께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하며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



정복왕조론




구미나 일본에서 ‘남북의 대립’이라는 측면으로 중국사를 파악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론의 틀이다. 이것은 필자가 보기에 다시 구판 정복왕조론과 신판 정복왕조론으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사실상 북방민족이 약탈에서 정복과 지배로 발전하다가 결국 중국에 동화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한족중심 동화론’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반면 후자는 미국의 신마르크스주의자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 1896~1988)이 주창한 것인데, 두 개의 상이한 문화가 만나서 서로 변하면서 제3의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위 인류학의 ‘문화접변론’을 원용하여 정복왕조가 일방적으로 한화(漢化·Sinicization)된 것은 아니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정복왕조론’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북방민족이 건설한 국가의 역사를 논의할 때 ‘정복’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독자적 역사세계를 잃어버리고 곧바로 중국사의 영역으로 끌려들어와 버린다. 왜냐하면 ‘정복왕조론’은 항상 정복하러 ‘오는’ 것을 말하지 정복하러 ‘가는’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중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