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8)] 실크로드 상권 장악한 소그드인

화이트보스 2008. 9. 27. 19:28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8)] 실크로드 상권 장악한 소그드인 중국정치·문화까지 주물러

 

 

당나라 때 수도 장안의 평강방(平康坊)이라는 곳에 보리사(菩提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 옆에 현종 때 재상이었던 이임보(李林甫)의 사저가 있었는데, 생일이 되면 그는 보리사의 스님을 초청하여 찬불을 올리게 했다. 한 해는 사례로 말안장 하나를 받은 스님이 시장에 내다 팔아 7만전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보리사 스님들 사이에 이임보의 커다란 씀씀이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다들 그의 생일에 혹시 초대받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한 스님이 과연 초대를 받게 되었고 열심히 찬불을 올리면서 주인의 공덕을 치켜세웠다. 그런데 막상 돌아갈 때 그가 받은 것은 불과 몇 ㎝ 안 되는 썩은 못 같은 것이었다. 크게 실망한 그는 장안 서쪽에 있는 서시(西市)로 나가 ‘상호(商胡)’, 즉 소그드 출신의 상인이 경영하는 가게를 찾아가 보여주었다. 그 가게 주인은 크게 놀라면서 “스님께서는 이런 것을 어떻게 손에 넣으셨습니까? 이것을 팔 때는 값을 잘못 매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스님은 시험삼아 100민(緡·1민은 1000전)을 불렀더니 주인이 껄껄 웃으며 “그렇게 할까요?”라고 되물었다. 그래서 스님은 한껏 더 많이 부를 생각으로 500민이라고 했더니, 주인은 “이것은 천만(千萬)의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거액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비싸냐고 물었더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 바로 보골(寶骨)입니다”였다.




이 이야기는 단성식(段成式·803~863)이 편찬한 ‘유양잡조(酉陽雜俎)’라는 글에 나오는 것으로, 일본의 학자 이시다 미키노스케의 명저 ‘장안의 봄’에 소개되어 유명해졌다. 물론 이것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설화로 꾸며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 ‘보골’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사리를 가리키며 당시에는 ‘불골(佛骨)’이라고도 불렀으니, 사리라고 하면 진위를 가릴 여유도 없이 수만금을 주고 사려고 하는 불교 숭배의 풍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헌종(재위 806~820)은 사리를 궁정 안에 안치하려고 했는데,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라는 글을 올려 이를 비판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도 있었다.





오아시스 정착민 출신으로

동서 오가며 비단으로 막대한 부


그런데 위의 이야기가 반영하고 있는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은 ‘상호’ 혹은 ‘호상(胡商)’이라고 불리는 상인이 갖고 있던 엄청난 재력인데, ‘보골’ 한 조각에 상상을 초월하는 현금을 쾌척할 정도의 재력을 갖고 서시를 좌지우지했던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물론 한나라 때와 같은 시대에는 ‘호’라고 하면 흉노인과 같은 북방의 유목민을 지칭했지만, 수·당대에 오게 되면 이 말은 거의 전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Soghd)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따라서 ‘호상’은 곧 소그드인으로서 중국에 와서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 낙타 위의 소그드인 주막대 아주 오래전부터 ‘소그드’란 명칭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가리켰다. 이미 다리우스 대제 때에 새겨진 비스툰 비문(기원전 519년)에도 언급되었다. 이들은 파미르 산맥 서쪽의 건조지대, 즉 북쪽의 시르다리아 강과 남쪽의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점재하는 오아시스 도시들에 살던 정착민으로,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수공업과 상업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멀리 중국이나 인도 혹은 서아시아 각지로 나가서 국제무역에도 종사하였다.



‘호상’이라 불리며 중국서 맹활약

장안에만 4000여명 거주


‘호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중국 측 자료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후한대 즉 1세기 이후의 일이었고, 중국 측 문헌에는 “장사하러 오는 호상들이 매일 변경에 온다”는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소그드인은 쿠샨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중앙아시아~인도~중국을 연결하는 교역로를 장악했던 인도나 박트리아 출신 상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활동의 정도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4세기에 들어오면서 북방에서 히온(Chion)이라든가 헤프탈(Hephtal)과 같은 유목민이 대거 남하하고 약탈하면서 오늘날 아프간과 인도 서북부 지방이 황폐해졌고 종래 인도와 연결되는 교역망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 혼란으로 초래된 공백을 메우고 국제무역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소그드 상인이었다.

장사라고 하면 다른 민족에게 뒤지지 않는 중국인의 눈에도 이 소그드인의 상재(商才)는 거의 천부적일 정도로 비쳤던 모양이다. ‘신당서(新唐書)’라는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탕을 물리고 손에는 아교를 잡게 하는데, 이유인즉 그가 커서 달콤한 말을 하고 돈을 손에 쥐면 딱 달라붙게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법을 익히고 장사에 능하며 이익을 탐한다. 남자 나이 스물이 되면 이웃나라로 가는데,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아니 가는 곳이 없다.”

 

▲ 소그드인의 교역 네트워크와 거류지 분포

당시 중국에는 많은 수의 소그드 상인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그 수를 정확히 말해주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8세기 중반 장안에 40년 이상 거주하며 처자식을 두고 전택과 가옥을 소유한 ‘호객(胡客)’의 수가 4000명 정도였다는 한 기록만을 보아도 대충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국제교역에 종사하는 이들은 중국의 비단을 대대적으로 구입하여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서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방면에서 고가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교역망을 유지·운영하기 위해서 이들은 고향이 있는 실크로드 교역로 중간 곳곳에, 그리고 중국 내 여러 도시들에 집단거류지를 형성하였다.

오아시스 정착민 출신으로

동서 오가며 비단으로 막대한 부


중국에 오래 거주한 사람은 중국식 성(姓)을 채택하였는데, 그때 출신도시의 이름을 따서 성을 지었다. 예를 들어 사마르칸드 출신은 ‘칸’이라는 발음을 반영한 ‘강(康)’씨를, 타슈켄트 출신은 ‘타슈’가 현지어로 ‘돌’을 뜻하기 때문에 ‘석(石)’씨를 택했다. 이렇게 해서 각각 다른 성을 갖고 교역에 종사하던 소그드인을 ‘아홉 가지 성을 가진 소그드인’이라는 뜻으로 ‘구성호(九姓胡)’ 혹은 ‘소무구성(昭武九姓)’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중앙유라시아 거의 전역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 자세한 실태를 알기는 쉽지 않으나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07년 스타인(A. Stein)이라는 학자가 돈황 부근의 봉수대 유적지에서 발견한 고대의 편지들을 통해서 어렴풋이 그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들은 중국 영내에 거주하는 소그드인이 고향인 사마르칸드로 보낸 것인데, 변경의 관문인 돈황에서 압수당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학계에 ‘고대의 소그드 서한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것은 모두 8통인데 어떤 것은 훼손이 심한 단편이지만 일부는 아주 잘 보존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 [좌] 돈황에서 발견된 소그드인 편지. [우] 사군묘에서 발견된 연회장면 석상.

 

예를 들어 제2서한이 그러한데, 중국 무역의 현지 총책인 나나이 반닥(Nanai Vandak)이라는 사람이 사마르칸드 본국에 있는 고용주에게 중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브리핑하고 각 도시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는 주재원의 활동을 보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편지에는 낙양에 커다란 기근과 화재가 발생하여 황제가 도주했고 ‘훈족’의 공격을 받은 소식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4세기 초두 서진(西晋)왕조가 흉노의 공격으로 멸망하게 된 사건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편지가 씌어진 시기도 저절로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나나이 반닥은 이 편지에는 자기가 중국산 순품 사향(麝香) 800g을 사서 보내니까, 이것을 팔아서 생겨나는 이윤의 일부는 자신이 사마르칸드에 남겨두고 온 아들의 교육비로 써달라는 당부를 적고 있다. 그런데 이 사향을 그 당시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은 27㎏과 같으니, 그때 금과 은의 비가(比價)를 1 대 20으로 계산하면 금 1.35㎏에 해당하고 오늘날 우리 돈으로 하면 약 2600만원이 되는 셈이다. 당시 이들의 교역규모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소그드인의 대부분은 상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에서 말한 서한 가운데에는 돈황에 살던 한 여인이 고향 사마르칸드에 사는 어머니와 남편에게 자신의 힘든 처지를 호소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역시 캐러밴 무역과 연관된 일을 하는 사람이 다수를 점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같은 사실은 이미 남북조 시대 말기인 북제(北齊) 때부터 이들 중국 체류 소그드인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한 ‘살보(薩寶)’라는 관직의 명칭에서도 확인된다. 이 말은 원래 ‘캐러밴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르타바하(sarthavaha)’를 음역한 것으로서, 수도에는 2명이 두어지고 각 지방에는 주(州)마다 1명씩 배치되어, 구역 내의 중앙아시아·서아시아 출신 상인을 관할케 했다. 당나라 때 설치된 살보부(薩寶府)의 책임자는 정5품의 관리였다.




최근 중국의 서안에서는 소그드인이 바로 이 살보에 임명되었으며 그러한 상층인사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나왔다. 아파트 건설붐의 영향으로 도시 여러 곳이 파헤쳐지고 개발되는 와중에 소그드인의 묘지가 발견되었는데, 학계에는 묘주의 이름을 따서 안가묘(安伽墓), 사군묘(史君墓) 등으로 알려졌다. 물론 ‘안’과 ‘사’라는 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이 중앙아시아의 부하라와 키쉬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돌궐·위구르와 연합,

‘안록산의 난’등 정치·군사 개입


더 흥미로운 것은 거기서 출토된 석곽(石槨)과 석상(石床)에 새겨진 조각이다. 거기에는 그들의 일상생활은 물론 연회를 벌이고 수렵을 하는 장면까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이들 소그드인과 북방 돌궐인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강조되고 있다. 이 두 집단 사이의 관계는 당나라 현종 때인 755년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이 가서한(哥舒翰)이라는 장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회유한 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나의 부친은 소그드인이고 모친은 돌궐인이다. 그대의 부친은 돌궐인이고 모친은 소그드인이다. 그대와 나는 같은 종족이니 어찌 서로 친해지지 않겠는가?” 서안의 소그드인 묘지 출토자료는 이처럼 두 종족의 통혼이 두 사람에게만 국한된 특수한 경우는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돌궐이 몽골리아 초원에서 힘을 잃자 소그드인은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위구르인과 연합하였다.




그렇다면 소그드인과 돌궐·위구르의 연합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것은 곧 소그드의 경제력과 유목민 군사력의 결합,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막강한 영향력이었다. 예를 들어 안록산은 3개의 절도사직을 겸임하여 북방 변경의 군권을 장악했고 이를 기초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으로 당제국은 몰락의 문턱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소그드인의 영향력이 정치·군사 방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교역활동으로 인한 경제력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지만,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한 중국 측 문헌에 기록되어 있듯이 “시장의 큰 이익이 모두 그들에게 돌아갔다”라든가 “소그드인과 위구르인은 모두 공사(公私)의 큰 우환이 되고 있다”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소그드 문화까지 상품화

중국 상류층에 ‘호풍’ 유행시켜


이처럼 소그드인이 중국을 정치·경제적으로 잠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급 소비자층은 소그드인이 수입해 들어온 이국적인 물품과 문화에 깊이 심취하게 되었고, 그런 것을 즐기고 모방하는 ‘호풍(胡風)’이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골동품 애호가에게 잘 알려진 당삼채(唐三彩) 가운데에는 소그드 상인이 낙타에 비단을 싣고 장사하러 떠나는 모습, 소그드 출신 주악대가 낙타 위에 앉아서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 등도 있지만, 중국인이 ‘호복(胡服)’과 ‘호모(胡帽)’를 착용한 모습도 있다. 또한 중앙아시아 출신의 무희들이 추던 ‘호선무(胡旋舞)’는 백거이(白居易)와 같은 시인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포도주 역시 당시 최고의 인기상품 중 하나였다. 시인 이백(李白)은 자신이 중앙아시아에서 출생하여 그 쪽 문화에 관심도 있었겠지만, 워낙 포도주를 좋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봄바람에 꽃잎이 떨어질 때면, 말채찍을 휘두르며 곧장 호희(胡姬·소그드 여인)에게로 가서 술 한 잔을 마시노라! 장안의 청기문에 가면 호희가 흰 손을 내밀어 부르면서, 손님을 청하여 금술잔에 취하게 하는구나!” 이처럼 소그드인은 여러 지역의 특산품을 중개하고 판매하여 막대한 돈을 벌었지만, 그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자신의 문화까지도 상품화하여 중국을 매료시켰던 천재적인 장사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