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0)] 이슬람 세력의 동진과 중앙아시아의 운명
8세기 중앙아시아, 아랍과 첨예대치
100년 ‘피의 역사’끝에 이슬람에 굴복
베두인 유목민 통합한 아랍군, 페르시아 점령하고 동방경략부 설치
소그드 지방 평정하며 북상… 모스크 짓고 우상숭배 배척
아랍, 튀르기스 이어 신흥강국 토번, 당과도 패권 다툼
탈라스전투 이후 파미르고원 서쪽 이슬람 급속 확산
▲ 무그산성에서 출토된 기마병사상. 방패의 일부분이다.
1220년 3월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대가 당시 중앙아시아 최대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사마르칸트를 포위했다.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 그 주위를 흐르는 강과 해자(垓字·성 주위에 둘러 판 못), 그리고 11만명이라는 막대한 수비병력. 그러나 포위가 시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도시는 함락되고 말았다. 몽골군은 다른 도시에서 그러했듯이 며칠간 약탈을 자행했고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도록 성벽을 파괴했으며, 귀족과 군인 수만 명을 들판으로 끌고 나가 처형했다. 이렇게 해서 2000년 이상 명성을 떨치며 번영을 구가하던 고대도시 사마르칸트는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주민은 폐허로 변해버린 구도시의 남쪽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사마르칸트가 되었다. 주민은 둔덕으로 변해버린 폐허를 ‘아프라시압(Afrasiyab)의 언덕’이라 불렀는데, 아프라시압은 이란 민족의 전설 속에 나오는 투란(Turan)이라는 북방민족 왕의 이름이었다.
아무튼 칭기즈칸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지고 나서 600년이 지난 뒤인 1913년 러시아의 한 학자가 아프라시압 언덕을 조사하여 벽화 몇 점을 찾아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것은 1965년부터였다. 이때 비로소 삼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구조가 드러나고, 도시 중심부에 있던 궁전과 큰 규모의 가옥이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궁전 내부에서는 가로·세로가 각각 11m에 이르는 넓은 홀과 사방 벽면에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다. 입구에 들어서서 맞은편에 있는 서면에는 왕의 즉위식 장면이 그려져 있었고, 남면에는 시집을 오는 외국의 공주와 그 일행의 모습이, 북면에는 수렵하는 장면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면에는 먼 지역의 생활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즉위식의 주인공은 벽화에 보이는 명문(銘文)을 통해서 바르고만(Vargoman)임이 확인되었다. ‘신당서 서역전’에 의하면 고종 영휘(永徽) 연간, 즉 650~ 655년에 강국(康國)에 강거(康居)도독부를 설치하고 불호만(拂呼 )이라는 인물을 도독으로 임명했다는 글이 보이는데, 이 불호만이 바르고만과 동일인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궁정의 홀 입구 맞은편, 즉 서쪽면의 벽에 보이는 그림이다. 즉위식을 묘사한 이 장면에는 주변의 도시나 외국에서 축하차 보내온 사신단의 모습이 보이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한반도에서 간 사신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鳥羽冠)를 쓰고 두 손을 소매에 넣은 공수(拱手)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허리에는 손잡이 끝이 둥근 고리모양을 한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차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한반도에서 간 사람임은 분명하다. 물론 고구려·신라·백제 삼국 가운데 어느 나라에서 갔느냐에 대해서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고구려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고, 당나라의 압박을 받던 고구려가 외국의 연맹세력을 구하기 위해 멀리 사마르칸트까지 사신을 파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아무튼 한반도의 사신과 관련된 다른 문헌자료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의 지도층이 수천㎞ 떨어진 곳에 있는 사마르칸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당시 소그드 상인이 중앙유라시아 각지를 무대로 교역활동을 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프라시압, 판지켄트(Panjkent), 바락샤(Varakhsha) 등지에서 발굴된 유적을 통해서 우리는 소그드인이 국제무역으로 축적된 재화로 궁전과 사원을 건설했고, 거리에는 2~3층의 가옥이 즐비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도시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번영을 구가하던 바로 그때 서방에서 새로운 세력이 출현했으니 그것이 바로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기치로 내세운 아랍인이었다.
예언자 무하마드에 의해 창시된 계시적 종교 이슬람은 그때까지 부족단위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약탈을 계속하던 아랍의 베두인 유목민을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그 통합된 힘을 집결시켜 외부로 폭발시키는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632년 무하마드가 사망하고 나서 불과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랍군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 지방에서 비잔틴 제국의 세력을 밀어냈으며, 동방으로는 중동 최대의 강국인 사산조 페르시아를 압박해 들어갔다. 고향을 떠나 정복전에 참여한 아랍 베두인은 낙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정복한 도시 안에 들어가지 않고 사막의 변두리에 집단캠프를 치고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군영(軍營)이 후일 대도시로 발전해 갔으니, 오늘날 이라크의 쿠파(Kufa)나 바스라(Basra), 이집트의 카이로(Cairo)와 같은 곳이 대표적 예다.
8세기 중앙아시아, 아랍과 첨예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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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튀르기스 이어 신흥강국 토번, 당과도 패권 다툼
탈라스전투 이후 파미르고원 서쪽 이슬람 급속 확산
▲ 판지켄트 벽화의 코끼리를 탄 용사가 맹수와 싸우는 모습.
아랍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사산조의 마지막 왕 야즈디기르드(Yazdigird) 3세는 동쪽으로 도망치다가 마침내 651년에 이란 동북부 후라산 지방의 메르브(Merv)라는 도시에서 암살됐다. 이로써 한때 동로마 황제까지 사로잡는 맹위를 떨쳤던 사산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한편 그를 추격해온 아랍군은 메르브에 동방경략사령부를 세우게 되는데, 오늘날 투르크멘공화국 영내에 있는 이 도시는 바로 중앙아시아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서 동북방으로 300㎞ 가면 부하라에 이르고, 부하라에서 동쪽으로 200㎞ 지점에 사마르칸트가 있다.
아랍군의 동방진출은 7세기 후반 내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양상을 보였다. 이따금 아무다리아를 건너서 약탈전을 하고 돌아오는 정도였다. 이슬람 세력이 동방경략에 집중하지 못한 까닭은 칼리프들의 피살, 그로 인한 권력투쟁의 격화, 우마이야 왕조의 성립,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 등 일련의 정치적 혼란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아프라시압 벽화에 아랍세력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도 아직은 아랍의 진출이 산발적이고 국지적인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8세기에 들어와 아랍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라크 총독으로 부임한 하자즈(Hajjaj ibn Yusuf)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쿠타이바(Qutayba ibn Muslim)는 이란 지방에 주둔하던 아랍과 페르시아인을 규합한 뒤, 705년에는 먼저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있던 메르브, 발흐(Balkh), 탈리칸(Taliqan) 등의 도시를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어 706~712년에는 부하라를 비롯하여 소그드 지방의 중진도시들을 차례로 경략하였고, 713~715년에는 거기서 더 북상하여 시르다리아 유역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예전처럼 약탈한 후 돌아가는 일회성 군사작전이 아니라 점령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현지에서 병력의 징발과 공납을 의무화하는 등 항구적인 지배체제의 구축을 시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이라는 유일신교를 믿는 그들은 도시 안에 모스크를 짓고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등,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를 신봉하던 현지 주민과 종교적 충돌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쿠타이바의 정책은 도시국가의 귀족은 물론이지만 상인계층과 종교인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 아프라시압 벽화의 사신도 스케치. 왼쪽 두 사람은 사마르칸트 관리, 그 오른쪽은 통역, 맨 오른쪽 두 사람이 한반도 사신.
결국 중앙아시아의 각 도시들은 아랍에 대항하여 자신을 후원해 줄 새로운 세력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중국에서는 현종이 등극(712년)하면서 주변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고, 718년 부하라의 투그샤다(Tughshada), 사마르칸트의 구락(Ghurak), 쿠메드의 나라야나(Narayana)와 같은 현지의 왕은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서 연명으로 군사적 지원과 보호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청원내용은 11세기 초에 편찬된 역사서 ‘책부원귀(冊府元龜)’라는 자료에 남아있는데, 이에 대한 현종의 반응은 극히 미온적이었다.
다급해진 이들은 북방의 튀르기시(T?rgish)에게로 눈을 돌렸다. 튀르기시는 천산산맥 방면에서 유목하던 부족인데, 716년 돌궐제국의 카간 묵철(默)이 사망하자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중앙아시아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지원요청을 받은 튀르기시는 720년 퀼 초르(K?l Chor)라는 장군이 이끄는 소수의 기마군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현지 지배층의 지원을 받으며 남하했고, 아랍군과 가벼운 전투를 벌이기도 했지만 곧 철수하고 말았다. 한편 새로 부임한 이라크 총독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표방하며 721년 늦가을 중앙아시아 경략사령관을 알 하라시(al-Harashi)로 교체했고, 알 하라시의 군대는 722년 여름까지 소그드 지방 전역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 당시 중앙아시아 도시와 주민의 상황은 판지켄트라는 도시 근처에 있는 무그 산성에서 발견된 유물에 의해 잘 알려지게 되었다. 판지켄트는 사마르칸트에서 동남쪽으로 60㎞ 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무그 산성은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60㎞ 정도 나온다. 1932년 봄 한 목동이 여기서 양을 치다가 우연히 바구니 안에 처음 보는 글자가 적힌 비단조각을 발견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8.5m×19.5m 크기의 장방형 건물이 드러났고 그 안에서 총 80점의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의 고대 주민이 사용하던 소그드문자로 된 것이 대부분(74점)이지만 아랍문자와 고대 투르크문자로 된 것이 각각 1점씩, 그리고 한문으로 된 것도 몇 점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다수의 목제품과 직물을 포함하여 400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소그드인 기마병사의 모습이 그려진 방패는 특히 유명하다. 이것은 지금 모두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학자의 연구결과 무그 산성은 아랍군의 중앙아시아 침략과 지배가 강화되던 8세기 초 판지켄트의 군주였던 디바스티치(Divastich)라는 사람이 항전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며, 튀르기시의 퇴각과 아랍군의 재진입으로 말미암아 722년 산성은 함락되고 디바스티치도 포로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아랍, 튀르기스 이어 신흥강국 토번, 당과도 패권 다툼
탈라스전투 이후 파미르고원 서쪽 이슬람 급속 확산
▲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 보이는 한반도 사신. / 무그산성에서 발견된 소그드 문서. 그러나 이로써 아랍의 지배권이 확고하게 다져진 것은 아니었다. 불만에 가득 찬 현지 지배층은 계속해서 튀르기시와 연락을 취했고, 724년에는 시르다리아 강가의 호젠드(Khojend)에서 양측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갈증의 날(Day of Thirst)’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아랍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중앙아시아 지배도 흔들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8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의 국제정세는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산 방면에서는 튀르기시 연합체가 붕괴되고 북방 몽골리아 초원에서도 돌궐제국이 급격하게 쇠퇴했으며, 이슬람권에서는 우마이야조 역시 내적인 분열이 심각해지면서 붕괴를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이제까지 중앙아시아를 놓고 대립하던 두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새로운 힘이 개입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토번과 당나라였고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고선지 장군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751년 탈라스의 전투는 그에 앞서 100년 동안 계속되던 이슬람세력의 중앙아시아 진출과 점령이 최종적으로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탈라스전투가 끝난 뒤 파미르 고원 서쪽의 중앙아시아는 빠른 속도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9세기에 들어서면서 압바스조의 집권적 장악력이 약화되었을 때 부하라를 수도로 한 새로운 지방정권 사만(Saman)왕조(819~999년)가 건립되었고, 그 지배하에서 많은 수의 주민이 자발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개종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아랍·이라크·이란 못지않은 높은 수준의 문화적 성취를 이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권이 자랑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이 수도 없이 배출되었다.
예를 들어 가장 신빙성있는 무하마드의 언행록을 편찬한 부하리(Bukhari·810~869년), 수학자 호라즈미(Khorazmi·780~850년),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이븐 시나(Ibn Sina·980~1037년·일명 Avicenna)와 비루니(Biruni·973~1048년) 등은 모두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났고, 이란민족 최대의 서사시인 ‘제왕의 서’를 지은 피르도시(Firdawsi·1020년 사망)는 사만조 궁정에서 활동한 시인이었다. 이렇게 볼 때 중앙아시아는 100년간의 치열한 저항 끝에 이슬람의 물결에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그 후에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계속된 경제적 발전과 문화적 번영을 보면 그것은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중앙아시아 국왕들이 당 현종에게 올린 상표문(上表文)
부하라(安國)의 왕 투그샤다(篤薩波) “최근 들어 대식(大食·아랍)의 도적들이 매년 침입하여 나라에 평안함이 없어졌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하늘과 같은 은혜와 풍성한 자애를 베풀어 주시어 저희 신(臣)들을 고난에서 구해주옵시오. 또한 튀르기시(突騎施)에 칙령을 내려서 신들을 구하라고 해주십시오.”
쿠메드(俱密國)의 왕 나라얀(那羅延) “지금 대식이 침공하여 토하라(吐火羅), 부하라(安國), 타슈켄트(石國), 페르가나(拔汗那國) 등이 모두 대식에 복속하게 되었습니다. 신(臣)의 나라 안에 있는 창고의 진귀한 보물, 부락의 백성의 물건을 대식인은 모두 세금으로 거두어 갖고 가버렸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하늘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 대식을 처치해 주셔서 신의 나라에 세금징수를 면케 해 주십시오. 그러면 신들은 대국의 서문(西門)을 오래오래 지키겠사옵니다.”-‘책부원귀’ 권 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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