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2)] 중화 질서의 붕괴와 다원체제의 동아시아
당 멸망 후 수세 몰린 중국 ‘中華’ 포기
거란·여진 등에 조공 바치며 ‘평화’ 얻어
송나라, 신흥세력 거란과 굴욕적 ‘전연의 맹’ 맺고 형제 인정
거란 멸망시키고 급성장한 여진엔 ‘신하의 예’ 맹세까지
당 이후 오대십국, 요, 송, 금, 고려
각각 ‘中華’ 자처
몽골 등장 이전까지
유라시아 동부, 다원체제로
▲ 거란인이 말을 끌고 가는 모습의 벽화. 내몽골 적봉시 출토.
오늘날 외국인들이 ‘중국’을 칭할 때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는 ‘차이나(China)’이다. 물론 이 말이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이름인 진(秦·Chin)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그런데 과거에 ‘차이나’만큼이나 널리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또 다른 중국 명칭이 있는데, 바로 ‘키타이(Kitai)’가 그것이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주민들은 아직도 중국을 ‘키타이’라고 부르고 있고, 대만의 항공사 이름인 캐세이퍼시픽(Cathay Pacific)의 Cathay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키타이’라는 말은 사실 북방 유목민족의 명칭인 거란(契丹)을 옮긴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거란’이라고 읽고 있지만, 원래 이 민족의 이름은 ‘키탄(Qitan)’ 혹은 ‘키타이(Qitai)’로 발음되었고, 중국사에서는 요(遼)라는 나라를 세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한족(漢族)도 아닌 북방민족 거란이 중국을 부르는 명칭이 된 것일까. 그것은 당제국의 멸망으로 인하여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붕괴된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흔히 ‘개원(開元)의 치(治)’라고 회자되는 당나라 현종 대(代)의 영화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잠시 정신이 반짝 맑아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몽골 초원을 질주하던 돌궐 유목민들의 무릎을 꿇게 한 뒤 중앙아시아를 거머쥐고, 나아가 동방의 일대 세력인 고구려까지 넘어뜨려 한반도를 넘보던 당제국의 위용은 태종(626~649년)과 고종(650~683년)의 시대를 뒤로 하면서 서서히 빛을 잃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천하를 호령하던 일대의 여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고비사막 북방에서 재흥하여 맹위를 떨치던 돌궐제국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현종의 긴 치세(712~756년)는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었지만, 후일 중국의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절도사(節度使)라는 군벌집단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양귀비의 최후를 재촉한 안록산의 반란은 현종대의 태평의 실체가 무엇인지 여지없이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안록산과 사사명이 주도했던 반란(755~763년)은 위구르와 같은 외부 지원군에 의해서 간신히 진압되었지만, 8세기 후반부터 당제국은 태종대의 위용도 현종대의 영화도 상실한 채 일종의 관성의 힘으로 생존을 지속하는 범용한 왕조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 관성의 힘도 875년이 되면서 소금 밀매업자인 황소(黃巢)와 왕선지(王仙芝)의 반란으로 끊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왕조의 잔명은 904년 마지막 황제가 주전충(朱全忠)에 의해 살해될 때까지 30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중국사에서는 이때부터 960년 조광윤(趙匡胤)이 송(宋)나라를 건국할 때까지 약 반세기를 가리켜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 부른다. 이것은 화북 지방에 양(梁)·당(唐)·진(晉)·한(漢)·주(周)라는 다섯 개의 왕조가 교대로 흥망하고, 이와 동시에 사천과 남부 지역에 10개의 군소 왕국들이 병립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대단한 혼란기임에는 틀림없지만 한나라가 무너진 뒤 찾아온 남북조 시대에 비하면 분열의 기간은 훨씬 짧았고, 반세기 만에 송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중화의 질서를 되찾은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중국 중심의 왕조사관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황소의 반란군이 낙양과 장안을 함락했을 때 사천으로 ‘몽진(蒙塵)’을 떠난 당나라 황제는 당시 하동(河東)절도사였던 이극용(李克用)이라는 인물에게 진압을 부탁했다. 그는 휘하 군대를 이끌고 883년에는 산서 지방에서 남하하여 장안을 탈환하였다. 그러자 황실은 그를 견제하기 위해 반란군의 항장(降將)인 주전충을 변주(?州), 즉 개봉의 절도사로 임명하였고, 화북의 패권을 두고 두 사람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주전충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이극용은 908년 사망할 때 아들 이존욱(李存)에게 ‘세 개의 화살’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하나는 유주(幽州·현재의 베이징)의 절도사인 유인공(劉仁恭), 하나는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또 하나는 후량의 주전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셋을 반드시 멸하라는 유촉이었다. 이존욱은 부친의 유언대로 유주를 함락하고 후량도 멸하여 923년에는 당나라의 정통을 잇는다는 뜻에서 ‘당(唐)’이라는 왕조를 칭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북방의 신흥세력인 거란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란은 원래 요하(遼河)의 상류인 시라무렌(潢河) 유역에서 유목하던 몽골 계통의 부족이다. 630년경 당 태종이 돌궐을 무너뜨린 뒤 거란족을 통제하기 위해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라는 것을 두었는데 7세기 말 돌궐의 재흥과 함께 정세는 급변하였다. 황실로부터 이씨 성을 사여 받고 송막도독에 임명되었던 이진충(李盡忠)은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 즉 ‘지고한 카간’이라고 칭하며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물론 이것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꿈은 200년이 지난 뒤 야율아보기에 의한 거란제국의 출현으로 실현되었다.
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거란족은 말(馬)을 토템으로 하는 씨족과 소(牛)를 토템으로 하는 씨족으로 이루어졌고, 전자는 ‘야율(耶律)’씨로 후자는 ‘소(蕭)’씨로 불렸으며, 상호 혼인으로 결합되었다. 따라서 ‘야율아보기’란 말씨족 출신으로 아보기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뜻한다. 후일 지어진 이야기이겠지만 그의 어머니가 태양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출생했으며, 9척 장신의 거구에 300근짜리 활을 당기는 괴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약탈전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그는 드디어 907년 ‘탱그리 카간(天皇帝)’을 칭하며 제위에 올랐다. 이제까지 카간은 3년을 만기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교대제가 시행되어 왔는데 그가 연임을 하자 부족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는 데에 성공한 그는 3회 연임을 한 뒤 마침내 916년 교대제에서 종신제로 이행하는 2차 즉위식을 치른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대외원정에 나섰다.
그는 먼저 현재의 베이징지방으로 내려가 이존욱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고 서북방의 초원을 원정하여 몽골계 부족들을 정벌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두려운 상대는 동북의 강국 발해였다. 926년 그는 전군을 이끌고 송화강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 상류에 위치한 발해의 수도 홀한성(忽汗城)으로 향했다. 그러나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발해는 제대로 된 결전도 치르지 못한 채 항복하고 말았다. 아보기의 뒤를 이은 태종 야율요골(耶律堯骨)은 936년 화북으로 내려가 석경당(石敬?)이라는 인물을 앞세워 후당을 무너뜨리고 대신 후진(後晉)을 세우고, 그 대가로 장성 남쪽의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할양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거란은 내몽골 초원을 근거지로 삼아 북방의 몽골과 만주는 물론, 인구와 물자가 풍부한 화북 지방의 일부까지 석권함으로써 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게 된 것이다.
▲ 차를 준비하는 모습의 벽화. 중국 하북성 선화 11세기 묘.
그러나 중국 북부의 상황은 쉽사리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조공을 바칠 것을 거부한 후진은 거란에 의해 멸망했고, 그 뒤를 이어 후한(後漢)과 후주(後周) 역시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출현한 것이 송나라였다. 송의 건국자인 조광윤은 원래 후주의 총사령관이었다. 북방에서 거란의 조종을 받은 군대가 침입해 오자,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개봉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진교역(陳橋驛)에 도착했을 때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군대를 돌려 어린 황제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은 것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아니라 ‘진교 회군’이라 할 만한 사건이다. 태조 조광윤과 후계자인 그의 동생 태종 조광의(趙匡義)는 비록 남부 지방에 산재한 군소왕국들을 병합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북방의 강호 거란에 대해서만큼은 수세에 몰린 채 어쩔 수 없었다.
1004년 거란의 성종(聖宗)은 대군을 몰아 남하하기 시작했고 송의 진종(眞宗)은 이를 맞아 북상했다. 양측의 군대는 수도 개봉 동북쪽에 있는 전주(州)에서 대치했다. 송으로서는 거란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망은 지극히 암울했다. 그러나 성종은 보급물자의 부족을 우려하여 장기대치국면을 피하기를 원했고, 결국 송 측에서 제시한 화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체결된 것이 역사상 유명한 ‘전연(淵)의 맹’이었다. 그 내용은 양측이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국경은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며, 송은 거란에 매년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량의 세폐(歲幣)를 준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돈으로 평화를 산 셈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전연체제’가 북송이 멸망할 때까지 100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조약이 이처럼 오랜 생명력을 갖기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 조약에 의해 형성된 국제관계 속에서 거란과 송나라 모두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서하문자로 된 불경.
그러나 이같은 평화와 번영의 이면에 숨어있는 이념적 의미는 매우 중대하다. 전통적으로 중원의 왕조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천하질서를 표방해 왔다. “제국은 이웃을 모르는 존재”라는 말처럼 황제에게는 동등한 벗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제 거란의 카간은 송의 황제와 동격으로 인정되었음이 만천하에 공포된 것이다. 이로써 더 이상 중화 질서는 존재하지 않게 된 셈이다. 물론 과거에도 중원왕조보다 더 강한 이웃이 있을 때가 있었다. 당 중기의 위구르가 그러했지만, 그래도 당의 황제는 위구르의 카간에게 책봉(冊封)을 내려주면서 중화 질서의 외면적 형식은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연체제’는 그러한 형식을 허물어 버린 것이다. 송과 거란은 그저 동등한 이웃일 뿐이었고, 이 시대를 다룬 어떤 책의 제목처럼 ‘중국은 동등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China among equals)’에 불과하게 되었다.
전연의 맹이 맺어지던 바로 그 시기에 하서지방, 즉 현재 영하회족(寧夏回族) 자치구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흥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티베트 계통에 속하는 탕구트족이었는데, 1032년 이들의 지도자였던 이원호(李元昊)는 중국식 성을 버리고 토착어로 된 새로운 성을 취하고 스스로 천자(天子)를 칭하였다. 또한 그는 송나라에 대해서도 자국을 대하(大夏)라고 부르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대등한 관계를 고집하였다. 이원호는 여러 차례 변경을 공격했고 마침내 1044년 막대한 양의 비단과 은을 받기로 하고 그 대신 외교문서에서는 칭제(稱帝)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이것이 소위 ‘경력(慶曆)의 화의’인데, 이로써 송은 거란에게 무너진 자존심을 조금은 위로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애써 지키려고 했던 자존심은 여진족의 출현과 함께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완안부(完顔部) 출신의 아쿠타(阿骨打)라는 인물에 의해 통합된 여진족은 그때까지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던 거란 기마군단을 1114년 영강주(寧江州)의 전투에서 초토화시켰다. 아쿠타 자신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1122년 거란제국을 멸망시키고 1127년에는 송의 수도인 개봉까지 함락했다는 사실이다. 불과 10여년 만에 멸시의 대상이던 변경의 부족에서 중원을 호령하는 주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송 황실은 남쪽으로 도망쳐 지금의 항주를 새로운 도읍으로 삼았지만, 여전히 노도처럼 밀려드는 여진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궁지에 몰린 남송은 1142년 굴욕적인 화의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①회수(淮水)를 국경으로 삼는다. ②송은 금에게 신하의 예를 취한다. ③송은 금에게 매년 25만필의 비단과 25만량의 은을 ‘세공(歲貢)’으로 바친다.
이처럼 중원의 황제가‘이적’의 군장에게 신례(臣禮)를 취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현실이 되고 말았다. 9세기 말 당의 붕괴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 중화 질서는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져 버렸다. 그 후 오대십국, 요, 송, 서하, 금, 고려, 안남 등은 모두 각자의 독자적인 세계 안에서‘중화’를 자처했고, 이들 사이의 역학관계는 수시로 변하는 현실정치 속에서 결정되었다. 유라시아 동부지역에 진정한 의미의 ‘다원체제’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체제는 몽골에 의해 금, 서하, 남송이 차례로 무너지고 고려도 복속하게 됨으로써 13세기 후반이 되면 최종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당제국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분열기에 태동한‘다원체제’가 40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몽골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체제에 자리를 넘겨주게 된 것이다. ▒
이극용과 주전충
이극용은 원래 투르크 계통에 속하는 사타(沙陀)부족의 수령이었다. 황실로부터 이성(李姓)을 하사 받았으며, 한쪽 눈이 작아서 ‘외눈박이 용(獨眼龍)’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휘하의 정예군단은 항상 검은 갑옷으로 무장하여 ‘아군(鴉軍)’, 즉 ‘까마귀군’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으며, 사납고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한편 주전충의 본명은 주온(朱溫)이었는데, 황소의 반란군에서 당조(唐朝)로 투항한 뒤 “오로지 충성하라”는 뜻에서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사여 받아 주전충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황제를 죽인 것은 물론 아들 9명까지 살해하여 황실의 씨를 말린 것도 부족해서 귀족들까지 몰살시켜, 그 시신을 백마(白馬·현재 하남성 골현(滑縣) 부근)라는 곳에서 황하의 탁류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것이 소위 ‘백마의 화(禍)’로 알려진 사건이다. 그러고 나서 옛날 전국시대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이 있던 개봉을 수도로 정하고 왕조를 개창했으니, 이것이 소위 ‘후량(後粱)’이라 알려진 것이다. 이처럼 오대십국의 대혼란기는 낭자한 유혈극으로 막이 오르게 되었다.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기획 = 박영철 차장대우 yc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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