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역사 기행(14)] 팍스 몽골리카의 성립과 동서 문화교류의 확대

화이트보스 2008. 9. 27. 19:41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4)] 팍스 몽골리카의 성립과 동서 문화교류의 확대

팍스 몽골리카의 동맥은 말(馬)을 이용한 글로벌 네트워크


13~14세기 인류 역사 최대의 동서남북 교류 이뤄져

상인 우대정책 펴고 자본출자 등 국제무역 적극 지원

아랍 상인도 맹활약… 한반도까지 오가며 교역활동


종교인 관용정책 힘입어 선교활동 활발… 중국에 기독교 확산

마르코 폴로·이븐 바투타 등 여행가들 잇달아 여행기 남겨 

 

 


▲ 내몽골에서 발견된 패자. 패자를 제시하면 역참에서 음식 등을 서비스 받을 수 있었다.


몽골세계제국은 결코 많은 사람의 축복과 환호 속에서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전투에 동원된 병사들이 사망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과 무관한 수많은 민간인이 살육되었다. 당시 중국 측 문헌에는 ‘도성(屠城)’이라는 표현이 자주 보이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도시와 그 주민을 도륙하는 것이다.




사정은 중동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연결되는 실크로드 연도에 위치해 번영하던 도시들은 몽골군이 몰고 온 파괴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니샤푸르에서는 170만명이 죽음을 당했고, 메르브에서는 100만명 정도, 발흐에서는 70만명 정도가 도살되었다는 이슬람 측 기록이 과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글로 옮기기에도 잔혹한 일화가 수없이 전해지고 있는데, 일부 학자의 해석에 따르면 몽골군이 적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심리전’을 활용한 결과라고 한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묘사한 역참




“각 지방으로 가는 주요 도로변에 25마일이나 30마일마다 이 역참이 설치되어 있다. 이 역참에서 전령은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삼사백 마리의 말을 볼 수 있다. (중략) 이러한 방식으로 대군주의 전령은 온 사방으로 파견되며, 그들은 하루 거리마다 숙박소와 말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지상의 어떤 사람, 어떤 국왕, 어떤 황제도 느낄 수 없는 최대의 자부심과 최상의 웅장함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가 이들 역참에 특별히 자신의 전령이 쓸 수 있도록 20만 마리 이상의 말을 배치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내가 말했듯이 멋진 가구들이 갖추어진 숙사도 1만곳 이상에 이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국의 위용이 갖추어져 갔고 몽골인도 도시와 사람을 무절제하게 파괴하는 것이 결코 이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이 수행한 전쟁이 다른 시대, 다른 민족이 벌인 전쟁에 비해 특별히 더 잔인하다고 할 것도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쿠빌라이가 보낸 원정군이 남송의 수도 항주를 함락할 때에는 문자 그대로 무혈입성이었고, 점령한 뒤 아무런 파괴도 살육도 일어나지 않았다. 절대로 주민을 죽이지 말고 도시의 건물을 파괴하지도 말라는 쿠빌라이의 엄격한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인도 드디어 인간과 도시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자신들이 건설하고 있는 제국에 중요한 자산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문명의 파괴자가 아니라 보호자로 역할을 선회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소위 학자들이 말하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팍스 몽골리카는 ‘몽골의 평화’라는 뜻으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까닭이 몽골제국시대에 전쟁이 종식되고 정치적 평화를 구가했기 때문은 아니다. 몽골이 유라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도 크고 작은 전쟁이 제국의 내부에서 몽골인끼리 혹은 제국의 변경에서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팍스 몽골리카는 13~14세기 몽골인 주도하의 유라시아 국제질서, 즉 각 지역 간 교류와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그 결과 각 문명 상호 간 이해의 폭이 비약적으로 넓어진 결과를 낳게 한, 그러한 정치질서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몽골제국이 표방한 이념과 정책은 동서 간 인적·물적 교류의 진작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 예로 역참제(驛站制)를 들 수 있다. 몽골인이 ‘잠(jam)’이라고 부르던 역참은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조밀하고 광역적인 교통의 네트워크였다. 물론 몽골인이 이러한 역참제를 처음 실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 중요성이 특별히 강조되었고, 현대 중국어에서 ‘역, 정거장’을 뜻하는 ‘짠(站)’이라는 단어가 몽골어 ‘잠’에서 유래한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13세기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베이니(Juvayni)가 저술한 ‘세계정복자의 역사’라는 책에는 이미 칭기즈칸의 시대에 정보와 물자의 원활한 전달을 위해서 역참을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계승자인 우구데이의 치세에는 영토가 더욱 확장되면서 수도 카라코룸과 원근 각지를 연결하는 역참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그래서 그는 북중국에서 카라코룸에 이르는 역도에 70리마다 역참을 하나씩 두어 모두 37개의 참을 두었으며, 다시 카라코룸에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지방으로 연결되는 역참을 설치했다. 그는 자신이 자부하는 치적 네 가지 가운데 하나로 이 역참제의 확대를 꼽을 정도였다.




몽골 지배하의 중국에서 역참제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수도 대도(大都·현 베이징)를 중심으로 사통팔달의 역도가 전국을 연결했고, 동으로는 고려와 만주, 서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란과 러시아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역참을 두었으며, 남쪽으로는 안남과 버마로까지 연결되었다. 당시 중국에 있던 역참만 1500군데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마르코 폴로 역시 페르시아·투르크인의 발음에 따라 ‘얌(iamb)’이라고 불린 역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역참은 내륙의 교통로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강남지방이나 해안지방에는 수참(水站)과 해참(海站)을 둬 말이나 수레가 아니라 선박을 비치했으며, 북방의 추운 지방에는 구참(狗站)을 설치해 눈썰매와 그것을 끄는 개가 준비되었다.



이 같은 역참은 원칙상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만 이용할 수 있었으며 ‘패자(牌子)’라는 것을 제시해야 했다. 패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으니 재료와 모양이 서로 달랐다. 어떤 패자를 소지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역참에서 제공되는 음식과 서비스에 차이가 있었다. 내몽골에서 발견된 패자에는 파스파 문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있다. “영원한 하늘의 힘에 기대어! 카안의 이름은 신성하도다. 경배하지 않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몽골시대의 글로벌 네트워크인 역참을 이용하여 활발한 인적·물적 교류가 이루어졌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상인은 몽골 권력층과 손잡고 그들의 막대한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사업을 수행했다. 당시 그들은 ‘오르톡(ortoq·斡脫)’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투르크어로 ‘동업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들은 패자를 발급 받아 국가에서 관리하는 역참시설을 이용하면서 내륙과 해상을 통한 국제무역을 수행했다. 중국 전통적 왕조의 한족 지배층과는 달리 몽골인은 상인을 우대했고 그들의 국제무역을 적극 지원했다. 심지어 국가가 자본을 출자해 해외에 선박을 보내 무역하게 한 뒤 그 이익을 나누어 갖는 소위 ‘관본선(官本船)’ 제도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 상인 중에는 당시 ‘회회(回回)’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무슬림의 활동이 특히 돋보였다. 이들의 활동범위가 한반도까지 미쳤음은 고려 가요에 ‘쌍화점’을 경영하는 ‘회회아비’의 존재가 말해주고 있다.




상인들 못지않게 활발한 활동을 보여준 사람이 선교사였다. 몽골제국은 종교인에 대해서는 특히 관용의 정책을 취하여 각 종교의 지도자에게 면세 혜택까지 부여할 정도였다. 페르시아나 중국 측 기록에도 남아있듯이 이슬람·기독교·유대교·유교·불교·도교의 사제나 승려가 그러한 혜택을 누렸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여태까지 국가의 탄압을 받던 소수 교단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중국과 중동에서 기독교의 교세 팽창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네스토리우스교단은 이미 몽골인 사이에 어느 정도 퍼져 있었지만 이제는 가톨릭 교단도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동방을 처음으로 방문한 서구의 가톨릭 선교사는 카르피니 출신의 요한(John of Plano Carpini)이라는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였다. 그는 교황 인노센트 4세가 1245년 친서를 내려 자신의 특사로 파견한 인물이었는데, 파견 목적은 몽골인이 과연 유럽을 정복할 의도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가능하면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는 귀환한 뒤 ‘몽골인의 역사(Ystoria Mongalorum)’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글에서 요한은 몽골인의 영역과 기후에 대한 묘사에서 시작하여 생김새와 생활습관, 종교적 신앙, 그들의 역사, 사회와 군대의 조직, 전쟁 방법, 정복된 지역에 대한 설명 등을 매우 조리있고 포괄적인 내용으로 전달하고 있다. 한국을 ‘카울리(Kauli)’라는 이름으로 서구에 처음 소개한 것도 그의 글이었다.




그로부터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253년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인 루브룩 출신의 윌리엄(William of Rubruck)이 몽골인을 개종해야겠다는 개인적 열정으로 프랑스의 국왕 루이 9세의 허락을 얻어 몽골을 방문하였다. 물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돌아온 뒤에 ‘여행기(Itinerarium)’를 남겼는데, 이것은 요한의 글처럼 공식적인 보고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훨씬 더 다양하고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중세 유럽의 여행기 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히고 있다.




이후로도 선교사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293년에는 이탈리아 몬테코르비노 출신의 요한(John of Montecorvino)이라는 선교사가 몽골제국의 여름 수도인 칸발릭(Qanbaliq·현재 내몽골 소재)에 도착하였다. 그는 1328~1331년 무렵 중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25년 이상을 그곳에 머물렀다. 중국 측 기록에는 그의 활동이 잘 드러나 있지 않으나 그가 고향으로 보낸 두 통의 편지가 그간의 사정을 전해준다.





▲ 몽골의 칸이 수도사 요한을 통해서 교황에게 보낸 친서. 그는 웅구트라는 부족의 수령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그 도읍지에 교회를 세웠으며, 칸발릭에 주재하면서 ‘동방을 관할하는 대주교’로 임명됐다. 또한 그는 교황청에 요청하여 7인의 사제를 중국으로 파견케 하고, 그들을 칸발릭과 천주에 주재시키며 선교활동에 종사케 했다. 그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활동한 사람으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인 포르데노네의 오도릭(Odoric of Pordenone)이 있었다. 그는 1318년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하여 중동을 거쳐 인도양을 항해한 뒤 1324년 중국에 도착했다. 항주(杭州·절강성)·복주(福州·복건성)·천주(泉州·복건성) 등을 방문한 그는 특히 천주에서 프란체스코수도회가 운영하는 거대한 교회당을 보기도 했다. 1328년까지 중국에 머문 그는 내몽골을 지나는 육로를 거쳐 1330년 귀국했다.




물론 유럽에서 선교사만 온 것은 아니었다. 마르코 폴로 일가는 원래 상인이었고 교역의 목적으로 동방을 찾아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용케도 그의 ‘동방견문록’이라는 글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가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유럽 상인이 몽골제국 각지에서 활동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인적 교류가 서에서 동으로만 향한 것도 아니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상업이나 선교 혹은 순례의 목적으로 여행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 예가 랍반 사우마(Rabban Sauma)라는 인물이다.




그는 원래 내몽골 지방에 살던 웅구트 부족 출신인데, 이 부족은 투르크-몽골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13세기 후반 그는 같은 부족에 속하는 마르코스라는 젊은이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우여곡절 끝에 1281년 마르코스가 네스토리우스교단을 총괄하는 ‘총주교’로 선출되었다. 당시 서아시아를 지배하던 몽골인은 유럽과 정치·군사적 연맹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인 랍반 사우마를 칸의 특사로 임명하여 유럽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교황청을 방문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국왕을 알현했으며,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슬람권이 낳은 걸출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를 빼놓을 수 없다. 1304년 모로코에서 출생한 그는 21세의 나이로 성지순례를 시작했고, 그로부터 약 30년간 아시아·아프리카·유럽 3대륙에 걸쳐 12만㎞를 여행하였으며 저 유명한 ‘여행기(Rihla)’를 남겼다. 그는 인도 북부의 델리를 방문했을 때 술탄의 특사로 임명돼 몽골 지배하의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각지의 민족과 문화를 소개하고 지배층과 통치방식, 귀족층의 사치와 비리를 지적했으며, 통화와 환율 같은 교역의 관심사에서부터 의식주와 생활습관, 각 지역에서 전해지는 여러 가지 일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13~14세기 몽골 주도하의 유라시아는 인류 역사상 공전의 대교류, 즉 인적 왕래, 종교의 전파, 상품의 확산이 과거 어느 때보다 활발하고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럽에 마르코 폴로가 있었다면, 중동에는 이븐 바투타가 있었고, 동아시아에는 랍반 사우마가 있었다. 교류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상호교차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팍스 몽골리카’의 실체였다. 유라시아의 여러 민족은 1세기에 걸쳐 ‘팍스 몽골리카’라는 용광로 속에 던져져 공통의 경험을 하였고, 그것이 끝난 뒤 그들의 눈에 펼쳐진 세계는 더 이상 옛날과 같은 세계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