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7)] 유럽 문명 짓밟은 ‘정복자’ 티무르 사마르칸트를 ‘세계문명의 중심’으로
촌락에 이슬람 최대도시인 ‘카이로’‘바그다드’이름 붙이고
‘비비 하늠’모스크 등 거대한 건축물 건설, 이슬람 최고 문화도시로
북쪽의 우즈베크, 서쪽의 이란‘사바피’에 밀려 동남쪽으로
후예 바부르, 인도 정복하고 무굴제국 창건 고도의 문명 이어가
▲ 티무르의 사마르칸트 입성 장면.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에 비해 ‘티무르’라는 이름은 썩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티무르가 정복을 위해 보낸 시간과 다녔던 지역을 보면 칭기즈칸의 패업(覇業)은 오히려 빛을 잃을 정도이다. 사실 칭기즈칸은 생애의 대부분을 몽골 초원의 통일로 보냈고, 그가 참가했던 대외원정은 세 군데, 즉 서하·금나라·호레즘뿐이었다. 그러나 1336년에 출생한 티무르는 1369년 중앙아시아의 유목부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뒤, 1405년에 중국을 치러 가다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40년을 유라시아 사방 각지를 원정하고 정복하는 데 몰두했다. 칭기즈칸이 ‘세계정복’의 문을 열었고 실제로 그것을 완수한 것은 그의 후손들이었다면, 티무르는 자신의 일대에서 ‘세계정복’의 과업이 다 끝나버렸고 그의 후손들은 가만히 앉아서 과실을 향유했을 뿐이었다.
스페인의 카스티유 국왕이 파견한 클라비호(Clavijo)라는 사신이 1412년 사마르칸트를 방문하여 티무르를 만났다. 그리고 그의 보고를 통해서 티무르의 진면목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사실 티무르의 이름은 이미 그 전부터 유럽에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떨게 했던 동방의 군주들이 모두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를 지배하던 몽골계 킵착 칸국의 군주 톡타미시(Toqtamish)는 원래 티무르의 지원으로 권좌에 올랐지만 칸이 된 뒤에 티무르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자 티무르는 1391년 볼가 강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고 킵착 칸국의 수도였던 사라이(Saray)를 폐허로 만들었다. 러시아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진 것이 러시아인들의 애국적 투쟁 즉 ‘키에프인들의 피’ 때문이었다고 해석하지만, 사실은 티무르의 원정으로 인해 킵착 칸국이 결정적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티무르는 서구를 위협하던 또 하나의 대국을 강타했다. 1402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야지드 1세가 이끄는 군대를 앙카라 부근에서 격파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바야지드는 포로가 되고 결국 1년 뒤 적국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유럽에서 티무르의 명성을 한마디로 말해주는 것이 1587~1588년에 영국의 작가 말로(Christopher Marlowe)가 쓴 ‘탬벌레인(Tamburlaine)’이라는 희곡이다. 줄거리는 주인공 탬벌레인이 페르시아 제국과 터키와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마침내 자신이 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외치며 ‘꾸란’을 불태우는데, 오히려 그것이 그의 저주가 되어 다음 해에 사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희곡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던 당시 영국의 지적 분위기와 부합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정복자’ 티무르는 아주 적합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탬벌레인’이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티무리 랑(Timur-i lang)’, 즉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말을 부정확하게 옮긴 것이다. 그가 젊었을 때 한쪽 다리에 화살을 맞아 근육이 수축되어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여진 것이다. 1941년 학자들이 사마르칸트에 있는 티무르의 무덤 구리 미르(Gur-i Mir)를 열어서 그의 시신을 조사했다. 특히 게라시모프(M. M. Gerasimov)라는 소련 학자는 티무르의 해골을 근거로 그의 얼굴을 복원했으며 생전에 절름발이였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티무르의 무덤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전설이 있었다. 그것은 누구라도 티무르의 무덤을 열면 그 나라에 파멸이 닥치리라는 것인데, 정말 그의 무덤이 개봉된 사흘 뒤에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 유물을 기초로 복원된 티무르 흉상. 이처럼 칭기즈칸을 무색케 할 정도였던 희대의 정복자 티무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칸(khan)’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등장한 이래 그의 후손이 아니면 누구도 ‘칸’을 칭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유라시아 전 지역에 통용되는 불문율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티무르조차도 칭기즈칸의 후손 가운데 하나를 허수아비 칸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칭기즈칸 일족의 여자와 혼인한 뒤 ‘구레겐(g?regen)’, 즉 부마(駙馬)라는 칭호로 만족해야 했다.
티무르의 최종 목표는 몽골세계제국을 자신의 힘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몽골제국은 이미 분열되고 약화되어 옛날과 같은 영광은 오래전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가 유라시아 각지를 원정했던 까닭도 바로 사라진 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몽골제국의 본부가 있었던 중국을 자신의 최종 목표로 삼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405년 그는 총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소집하고 드디어 중국원정을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의 영락제(1402~1424년)가 통치하고 있었다. 물론 영락제는 몽골에 대한 5차례 친정(親征), 환관 정화의 인도양 원정 등으로 중국사에서도 보기 드문 공격적인 군주였지만, 집권 초기의 상황은 상당히 불안했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였던 건문제를 시해하고 즉위했기 때문에 그의 집권에 대해 내부의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이런 처지의 영락제가 수십 년 동안 원정을 통해서 단련된 티무르의 기마군단을 막아냈으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던 티무르가 시르다리아 강가에 위치한 오트라르(Otrar)라는 변경도시에서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고, 이로써 중국은 끔찍한 참화를 면하게 된 것이다.
티무르의 정복전은 엄청난 파괴와 살육을 수반했다. 도시는 페허로 변해버리고 높은 미나렛(이슬람 사원의 첨탑)이 있었던 곳에는 수만 명의 해골로 이루어진 탑이 쌓였다. 그 파괴의 정도는 칭기즈칸 시대를 능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그를 문명의 ‘도살자(butcher)’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가 파괴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건설자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수도로 삼은 사마르칸트는 세계 각지에서 끌어모은 기술자들과 재물로 화려하게 장식되기 시작했다. 말로의 희곡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내 고향 사마르칸트는 대륙의 가장 먼 곳까지 유명해지리라. 그곳에 나의 왕궁이 세워질 터인데, 그 빛나는 탑으로 인해 하늘이 무색해지고 트로이의 탑이 떨치는 명성도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그는 사마르칸트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도시 주변에 있는 촌락들에 당시 이슬람권 최대의 도시인 ‘카이로’‘다마스쿠스’‘바그다드’‘시라즈’ 등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도시의 중심에는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것이 자신의 무덤인 구리 미르, 그리고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하는 비비 하늠(Bibi Khanim) 모스크이다. 이 건축물들은 단지 무덤이나 모스크의 용도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사원, 학교, 수도원, 묘지, 병원, 호텔 등이 연결된 일련의 콤플렉스 빌딩이었다.
티무르의 후손들은 조상의 군사적 천재성은 물려받지 못했지만, 건축을 장려하고 예술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는 티무르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금도 사마르칸트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레기스탄’이라는 중앙광장이다. 혹자는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을 빼놓고는 중세 어느 곳에서도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에 견줄 만한 곳을 찾아볼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곳에는 세 개의 커다란 건축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울룩 벡’ ‘시리 도르’ ‘틸라 카리’라는 이름의 세 마드라사가 그것이다.
마드라사는 ‘신학교’를 뜻하기 때문에 이들 건물이 신학교이자 동시에 모스크의 용도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울룩 벡 마드라사의 건설자인 울룩 벡(1449년 사망)은 티무르의 손자였는데, 1428년 그곳에 반경 36m의 천문관측대를 건설하였다. 1437년 그는 자신의 관측을 토대로 1년의 길이를 계산했는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정확하게 58초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으로, 이 기록은 후일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경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학문의 세계에 몰두하느라 정치는 뒷전이었고 결국 자기 아들에 의해 살해되는 운명을 맞고 말았다.
▲ 폐허로 남아 있는 비비 하늠 모스크. 사마르칸트는 티무르의 수도였지만 그가 사망한 뒤에는 오늘날 아프간의 헤라트로 도읍이 옮겨졌다. 그곳은 처음에 티무르의 막내아들이자 후계자인 샤루흐(Shah Rukh·1447년 사망)가 다스렸고, 1469년부터 1506년까지는 후세인 바이카라(Husayn Bayqarah)라는 인물이 통치하면서 일약 이슬람권 최고의 문화도시가 되었다. 그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각지에서 시인, 화가, 종교인이 모여들었다. 특히 이란과 터키 문학사에서도 이름이 높은 자미(Jami·1414~1492년)와 나바이(Navai·1441~1501년), 세밀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비흐자드(Bihzad·1450~1535년) 등은 당대의 가장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를테면 15세기 후반의 헤라트는 전쟁과 혼란의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안식처이자 오아시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도시의 안정과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500년을 전후하여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요동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두 가지 방향에서 나타났는데, 하나는 북쪽의 초원에서 ‘우즈베크’라는 새로운 유목민 집단의 남하이고, 또 하나는 이란 서북부 지방에서 ‘사파비(Safavi)’라는 신비주의 교단을 핵심으로 하는 세력의 출현이었다. 이들은 각각 중앙아시아와 이란을 장악한 뒤 이슬람권의 패권을 두고 쟁패를 벌이게 되었다. 결국 북쪽과 서쪽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견디지 못한 티무르의 후예들은 사마르칸트와 헤라트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밀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지도자가 바로 바부르(Babur·1483~1530년)였으니 그가 바로 인도를 정복하고 무굴제국을 창건한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무굴’이라는 명칭도 사실 따지고 보면 ‘몽골’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바부르를 비롯한 티무르의 후손들은 자기들이 ‘몽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주위의 이란이나 인도의 주민들은 여전히 그들을 ‘야만적’인 유목민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바부르와 그의 후손들은 정복자로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죽느냐 사느냐 목숨이 걸린 전투를 밥 먹듯이 치르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여 비망록을 남겼는데, 그것을 당시의 문학어인 페르시아어가 아니라 자신의 모국어인 투르크어로 기록했다. ‘바부르 나마(Babur Nam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글은 지금까지 중세 투르크 문학의 금자탑으로 여겨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도를 통치한 그의 계승자들, 예를 들어 아크바르(치세 1556~1605년)와 자항기르(치세 1605~1627년)와 샤 자한(1628~1658년) 같은 사람도 모두 고도의 문학적 수준을 자랑하는 글을 집필하거나 타지마할과 같은 위대한 건축물을 세운 것을 보면, 문화의 보호자로서 티무르 일족의 면모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갔던 것을 알 수 있다. ▒
▲ 축성 장면을 그린 비흐자드의 세밀화. 비비 하늠 모스크의 전설
비비 하늠 모스크의 건축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건물이 한창 지어지는 도중에 티무르는 인도로 원정을 떠났고, 건축가 한 사람이 비비 하늠을 너무 사모한 나머지 건물을 지을 생각은 하지 않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비비 하늠이 예쁘게 색칠한 40개의 계란을 그에게 갖다 주면서 색깔은 달라도 맛은 다 마찬가지라고 하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공사에 전념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얼마 지난 뒤 그 건축가는 40개의 호리병을 갖고 와서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39개에는 물이, 나머지 한 개에는 포도주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비비 하늠이여! 이들은 모두 똑같이 보이지만 나를 취하게 하는 것은 하나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페르시아 출신 장인이 비비 하늠과 사랑했다가 티무르에게 들통이 나서 미나렛 꼭대기까지 올라간 뒤 거기서 뛰어내려 도망쳤다고 하기도 한다. 109m×167m의 장방형의 큰 규모에 입구 현관의 높이만 30m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그럴싸한 일화들도 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진으로 인해 대부분이 무너져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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