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9)] 몽골의 부흥과 달라이 라마
칭기즈칸 후예, 티베트 불교와 손잡고 ‘부활의 기도’
군주권 강화와 분열된 부족민 규합 위해 정신적 지주 필요
티베트 겔룩파 수장을 달라이 라마로 추대하고 불교 확대 정책
남북종단 불교 벨트 형성, 이슬람 세력 저지용 방벽 역할
몽골·티베트 막강 커넥션 과시하며 정치·군사적 영향력 행사
▲ 에르데니 조 사원 경내에 있는 티베트식 불탑.
1368년 여름, 지난 1세기 동안 중국을 지배하던 몽골제국은 마침내 그 최후를 맞이하였다. 주원장(朱元璋)이 이끄는 25만명의 반란군이 곧 수도로 진입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는 급하게 북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수도인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북구(古北口)라는 곳을 지나면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는 저 멀리 대도의 모습이 뽀얀 안개 속에 아스라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순간 도읍지를 잃은 설움이 밀려들면서 사태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가슴을 치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갖가지 보석으로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완성된 나의 대도여!…
따스하고 아름다운 나의 대도여!
붉은 토끼띠의 해에 잃어버린
나의 가련한 대도.
이른 아침 높은 곳에 오르면 보이던
너의 아름다운 연무(煙霧).
나는 울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노라.…
아홉 가지 보석으로 완성된
나의 대도성이여.…
내가 겨울을 보냈던 나의 가련한 대도,
이제 중국인이 모두 차지했구나.
토곤 테무르는 몽골 황제들의 여름수도가 있던 상도(上都)로 향했으나 애통한 마음으로 화병을 얻었는지 그곳에서 곧 사망하고 말았고, 그를 호종(護從)하던 비빈과 귀족들은 뒤이어 추격해온 명나라 군대에 졸지에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인지 황태자만은 용케 탈출에 성공해 고비사막을 넘어서 북방의 광활한 초원으로 가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도모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토곤 테무르와 고려 여인 기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유시리다라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몽골인들은 중국을 상실하고 초원에 남아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황제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대신 유목민 집단을 지휘하던 수령들이 발호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실력자들은 ‘타이시(tayisi·太師)’라는 칭호를 내세운 채, 허울뿐인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388년 칭기즈칸의 적통을 잇는 황제마저 피살된 뒤, 몽골인들은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서로 대립했을 뿐만 아니라 각각 그 안에서도 서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금씨족’이라고 불리던 칭기즈칸 일족의 권위는 거의 불가침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막강한 권신들조차 스스로 칸(khan)을 칭하지는 못했고 명목상일지언정 칭기즈칸의 후손을 칸으로 세울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 17세기 후반에 나온 ‘에르데니인 톱치’(일명 몽골원류)라는 책에 기록된 토곤 테무르의 비가(悲歌).
아무튼 우리는 이제까지 14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를 설명할 때 중국인의 관점을 아주 충실하게 반영해왔다. 즉 몽골인들이 중국에 세운 ‘원나라’는 1368년에 망하고 그 후 그들은 분열과 혼란 속에서 침체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칭기즈칸과 쿠빌라이로 상징되는 ‘대몽골’의 영광은 마침내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몽골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한문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몽골어로 된 자료를 읽어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우리가 막연히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도 무비판적으로 계속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우선 당시의 몽골인들은 몽골제국이 중국의 한 왕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제국의 일부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중국인이 만리장성 이남을 다시 빼앗았다고 해서 그것을 곧 제국의 ‘멸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영토가 축소된 것뿐이었다. 토곤 테무르의 ‘비가(悲歌)’를 가만히 읽어보면 그것은 망국의 설움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가꾸어온 두 수도, 즉 ‘시원하고 멋진 개평 상도’와 ‘따스하고 아름다운 대도’를 상실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몽골어로 된 연대기들은 1368년을 분수령으로 황통이 끊어지고 제국의 명맥이 단절된 것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몽골인이 전과 같은 기세를 상실하고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는 1410년부터 1424년까지 전후 5차례에 걸쳐 매번 50만명이라는 엄청난 군사를 동원하면서 대원정을 감행했지만 끝내 몽골의 위협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영락제의 과도한 정책으로 인해 중국은 재정적으로 피폐하게 되었고 몽골은 오히려 더욱 군사화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49년에는 중국의 황제가 에센(Esen)에게 포로로 잡히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역사상 ‘토목보(土木堡)의 변(變)’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당시 명나라의 군사적 무력성을 그대로 잘 드러내준다.
1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부족 수령의 발호로 인해서 약화되었던 칸의 권력이 다시 회복되고 강화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특히 1488년 바투 뭉케라는 인물이 즉위하면서 중앙집권화는 가속화되었다. 그는 재위 37년 동안 고비사막의 남북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한 뒤 휘하의 유목민을 모두 6개의 ‘만호(萬戶)’로 재편하고 그것을 자식들에게 분봉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몽골 유목민에 대한 칭기즈칸 일족의 지배권이 다시 확립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다얀 칸(Dayan Khan)’이라고 불렀는데 ‘다얀’은 바로 ‘대원(大元)’이라는 발음을 옮긴 것이니,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한 쿠빌라이 제국의 부활이 바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임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서 16세기 전반과 중반에 활동한 알탄 칸(Altan Khan)이라는 인물은 명나라 북변(北邊)에 대해 끊임없는 약탈과 공격을 가했는데, 한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1542년 38개 주현(州縣)을 공격해 20여만명을 살육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550년에는 토곤 테무르가 쫓겨갔던 바로 그 고북구를 통해서 남하해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포위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를 두고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흔히 보는 북경 외곽의 엄청난 만리장성도 바로 이처럼 계속되는 몽골의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축성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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