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역사 기행(18)] 무슬림들의 마음을 지배한 신비주의

화이트보스 2008. 9. 27. 19:46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8)] 무슬림들의 마음을 지배한 신비주의 교단의 성자들

이슬람의 눈부신 확장은 신비주의자‘수피’들이 이룬 기적


사치사회에 대한 반동으로 금욕과 고행 외치는 수피즘 등장

무슬림들의 지지 받으며 세력 확장하고 대중운동으로 발전


기존 율법교단과 충돌하며 독자교단 형성, 다양한 형태로 발전

병자치유 등 ‘기적’행하며 이교도의 땅으로 가 이슬람 전파 

 

 

▲ 메카 성지순례에서 아라파트산에 운집한 참배객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있었던 인질 피랍사건으로 전국이 호되게 홍역을 앓았다. 이 사건은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테러집단의 불법적 인질극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과 충돌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문명의 충돌’을 운운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상 이 두 종교가 얼마나 자주 부딪쳤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도대체 현재 지구상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특정 종교의 신도 수는 어느 기관에서 제시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차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교단과는 무관한 비교적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는 브리태니커 2003년판 연감에 근거한다면 전 세계 기독교도는 20억명, 무슬림은 12억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전세계 인구를 60억명이라고 할 때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기독교,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이슬람을 믿는 셈이다. 현재까지는 기독교의 수적 우위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지만, 이슬람의 놀라운 팽창률과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기독교도의 증가율을 감안하면, 앞으로 반세기 이내에 양자 사이의 관계가 역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슬람의 이러한 놀라운 팽창이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식의 강압과 협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분명히 밝혀졌다. 과거 그같은 오해의 이면에 종교적인, 특히 서구의 기독교적 편견이 작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같은 편견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기독교의 정도(正道)에서 일탈한 사이비 종교 정도로 생각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국제정치에서의 대결적 구도로 말미암아 아직도 대중적으로는 이같은 편견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슬람에 대한 기존 시각을 모두 오리엔탈리즘적이라고 비판하는 태도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다가 자칫 객관적 균형감각을 잃고, 이슬람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정적 측면마저도 옹호하는 입장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과거 이슬람의 팽창을 가져온 것이 ‘칼’의 위력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슬람의 성공은 여러 지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그 원인도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슬람이 단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영혼에 호소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그것이 만약 사람들의 신앙적 갈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어떤 영적인(spiritual)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힘은 결코 율법(shariah)에서 나올 수는 없었다. 이슬람의 율법은 어느 종교보다도 체계적이고 정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율법은 도덕적 기준으로 사회를 규율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갖고 있을 뿐, 신자들 개개인의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켜 줄 수는 없었다.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수피(sufi)’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신비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절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구도자적 모습을 통해서 무슬림의 종교적 지향점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억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는 민중봉기에 앞장서기도 하고, 때로는 이교도에 대한 ‘성전’을 외치다가 ‘순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생겨났으며, 이슬람의 팽창에는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수피’라는 말은 원래 아랍어에서 ‘양모로 짠 거친 겉옷’을 뜻하는 ‘타사우프(tassa wuf)’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즉 세속적 사치나 명리를 초개처럼 버리고 오로지 절대자 신과의 합일을 위한 길에 자신을 헌신하는 구도자를 가리켰다. 처음에는 개인적 현상으로 시작된 것이 점차 종교적 운동으로 확대되고 나중에는 거대한 교단으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총칭하여 학자들은 ‘수피즘(Sufism)’이라고 부른다. 후일 수피즘이 이슬람권으로 널리 퍼진 뒤 유명한 수피들의 생애나 일화를 모아놓은 ‘성자전’이 많이 씌어졌는데, 거기에는 초기 수피들의 면모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금욕과 고통이 오히려 자신을 신에게로 한걸음 더 다가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자리에서는 거적때기로 몸을 덮고 벽돌로 베개를 삼는 것을 기뻐했으며, 입고 다니는 옷에 이가 우글거리는 것을 오히려 행복으로 여겼던 것이다. 심지어 신발조차도 신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 ‘베일’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금욕과 고행은 방법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신과의 합일’이었고 이것은 신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절대적 사랑을 가장 잘 표현했던 초기의 수피가 8세기 이라크 지방의 바스라에 살던 라비아(Rabia)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대낮에도 거리에서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물통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 불로 천국을 태우고 이 물로 지옥불을 꺼서 이 두 개의 베일을 모두 없애고 싶다. 그러면 나는 천국에 대한 희망에서도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아닌,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에서 신을 경배할 수 있지 않겠는가?” 봄이 되면 그녀는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을 보지 않으려고 창문을 꼭꼭 닫은 채 방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봄과 꽃을 창조한 신을 묵상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초기 수피들의 이러한 언행은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을 잘 보여주었고 또 후일 수많은 수피의 모범이 되었다. 수피와 신의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의 관계로 인식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소멸’시킴으로써 그 안에서 ‘영원’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수피 시인들은 나방과 촛불의 비유를 곧잘 인용했다. 즉 촛불을 향해 뛰어들어 자신의 몸을 태우는 나방처럼 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없애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신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