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5)] 동방기독교의 확산과 쇠퇴
로마서 쫓겨난 네스토리우스파
7세기부터 초원 구석구석 기독교 전파
중국 보호받으며 교회 짓고 신도 확보… 요·금때도 교세 확장
신장 카쉬가르·천산산맥·내몽골 오지까지 대주교 파견 선교활동
몽골제국 귀족의 후원 속에 발전하다 몽골 붕괴와 함께 급격한 쇠퇴
흑사병으로 맥 끊기며 15세기 이후 동방기독교 중국에서 자취 감춰
▲ 경주 출토 마리아상(통일신라시대로 추정)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수도 후흐호트에서 서쪽으로 난 고속도로를 따라 150㎞를 달리면 파오터우(包頭)라는 곳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음산산맥을 넘어 180㎞ 정도 올라가면 다마오(達茂)라는 곳에 도착한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몽골어로 ‘다르칸 마우밍간’. 이 단어들의 앞머리 글자들을 떼어내서 만든 한자식 명칭이 ‘다마오’이다. 그런데 그곳에 위치한 조그만 문물관리소 앞마당에는 놀랍게도 십자가가 새겨진 비석들이 줄비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몽골의 궁벽한 초원 한구석에 이런 유물이 남아 있는 것일까. 이 비석들의 주인은 지금으로부터 700~800년 전 몽골제국시대에 이곳에 살던 ‘웅구트(onggut)’라는 유목민의 왕족이다. 그들은 마테오 리치가 동아시아에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300년 전에 이미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연유를 탐색해보면 배후에는 가톨릭도 개신교도 아닌 제3의 기독교, 즉 ‘네스토리우스교단(Nestorian Church)’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동방기독교 한 교파의 놀라운 역사가 숨겨져 있다.
이 교단은 원래 5세기 전반에 살았던 네스토리우스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patriarch)를 역임한 인물이다.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무엇이냐를 두고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325년 개최된 니케아종교회의에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하는 ‘양성론(兩性論)’이 채택된 바 있다. 네스토리우스 역시 이 주장에 찬동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고 또 교회에서도 인정하던 또 다른 주장, 즉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theotokos)로 보는 ‘신모설(神母說)’에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일 뿐이지 어떻게 ‘신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에게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교회 내부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대립하던 알렉산드리아학파의 키릴(Cyril)은 그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단성론(單性論)’을 추종한다는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431년 에페수스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미처 참석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파행적으로 진행된 회의에서 그는 이단으로 낙인 찍혀 파문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동로마제국의 영내에 남아 있지 못하고 동방의 새로운 땅, 즉 페르시아 지방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 중국의 서안(西安)에 가면 고대의 유명한 비석들을 모아놓은 ‘비림(碑林)’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에 전시된 수많은 비문 가운데 특히 관람객의 눈길을 끄는 거대한 비석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것이다. 781년에 만들어진 이 비석은 높이가 3m가 넘고 폭이 1.5m, 두께가 30여㎝에 이른다. 머리 부분은 두 마리의 용이 대칭으로 감싸고 있는데, 그 사이에 십자가를 새겨 넣고 그것을 구름과 연꽃 무늬의 대좌(臺座)로 받치게 했다. 그 아래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글자가 세 줄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본문은 모두 1870여개의 한자로 되어 있고, 40여 단어의 시리아문이 붙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사제 60여명의 이름이 한자와 시리아 문자로 동시에 적혀 있다. 문자 그대로 대진(로마)의 경교가 중국에 전파된 경위를 기록한 비문으로, 당나라 때인 781년 경정(景淨)이라는 이름의 ‘경교승(景敎僧)’, 즉 네스토리우스파 사제가 지은 것이다. 이 비석이 처음 발견된 것은 1600년대 초반이었고 처음에는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없었던 것도 아니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이것이 당나라 때에 만들어진 진품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그 뒤 여러 학자의 상세한 연구와 고증에 의해 경교란 동방기독교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우스교단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렇게 해서 중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곳곳에 ‘대진사(大秦寺)’ 혹은 ‘십자사(十字寺)’라는 이름의 교회를 짓고 적지 않은 신도를 확보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뒤 벌어진 두 차례의 재난은 그들의 노력을 완전히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하나는 불교를 비롯하여 외래 종교들이 대대적인 탄압을 받은, 소위 ‘회창(會昌)의 법난(法難)’(845년)이라 불리는 종교탄압으로 이때 많은 기독교 사제가 강제로 환속되었다. 또 하나는 9세기 말 터진 황소(黃巢)의 난인데 대도시를 점령한 반란군이 기독교 신도를 모두 죽여버리는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이 두 재난이 중국의 기독교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었는지, 그로부터 100년 뒤에 쓰인 한 아랍인의 책에는 중국 본토에 기독교도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으며 교회는 모두 폐허가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중국에서의 이러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중앙유라시아 초원 곳곳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많은 개종자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유적도 다수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천산산맥 북방의 세미레치에라는 지방에서 기독교도들의 묘석이 수백 기(基) 발견되었는데, 그 중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조사해도 9세기부터 14세기에까지 이어지고 있어 그곳의 기독교 공동체는 거의 500년 동안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공동체는 14세기 중반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마는데, 그 원인은 흑사병의 창궐로 인해서 주민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 서북방 신장(新疆)의 카쉬가르와 같은 오아시스 도시에도 바그다드의 네스토리우스교단 본부에서 임명된 대주교들이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벌였다. 투르판에서 발견된 벽화들은 기독교도의 존재를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경건한 모습으로 앞을 응시하는 경교도 여인. 황토색 겉옷 속에 땅에 끌릴 정도로 긴 흰색 속옷이 보이고, 그 아래로 앞부분이 위로 추켜올라간 신발이 이색적이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세 명의 신도와 사제를 그린 것도 있는데, 사제의 얼굴 묘사와 헤어스타일은 그가 몽골리안 계통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여 유라시아 초원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탄압에 의해 교도가 거의 사라진 중국으로 다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네스토리우스교단의 중국 재전래를 입증하는 유물도 발견되었다. 오늘날 베이징 서남쪽 교외의 팡산(房山)에 있는 ‘십자사(十字寺)’라는 절에서 발견된 십자가가 좋은 예이다.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주위에 시리아 문자로 “너희들은 이것을 보고 희망을 품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두 개의 석당(石幢)도 발견되었는데, 아마 대리석 십자가를 그 위에 올려놓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석당 가운데 하나에는 960년에 만들어졌다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요나라 때 기독교가 이 지역에 퍼졌음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원대 초기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마월합내(馬月合乃)라는 사람의 조상에 관한 기록에서 금나라 때 기독교도의 존재도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금나라 태종(1123~1135년)이 하루는 꿈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금빛 나는 어떤 사람이 태양을 안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꿈에서 깬 태종이 신하들에게 그가 누구인지를 물었으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위구르인들이 교회당에 있던 화상(畵像)을 갖다 바치니 바로 그가 꿈에서 본 그 사람이었다. 감격한 태종은 위구르인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이 원하는 곳에 살도록 하니, 마월합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가를 이끌고 천산(天山)으로 옮겨와 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천산’은 신장지역의 천산이 아니라 웅구트족이 살던 내몽골의 음산을 가리킨다. 또한 마월합내라는 이름은 기실 ‘마르 요하나(Mar Yohana)’를 나타낸 것이다. 기독교의 동방 전파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유물이 있다는 보고가 있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성모상과 십자가가 그것인데, 모두 돌로 되어 있고 1956년 경주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유물들의 출토 경위가 분명치 않아 과연 신라시대에 속하는 것인지 혹은 네스토리우스교와 관련된 것인지에 관한 보다 확실한 사실은 차후 연구과제이다.
아무튼 동방기독교가 7세기 전반부터 14세기 후반까지 유라시아의 중앙부는 물론 동아시아 지역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처럼 광범위하게 존재한 동방기독교도의 존재에 대해서 중세 유럽인들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던 것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를 말해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소위 ‘사제왕(司祭王) 요한의 전설(The Legend of Prester John)’이다. 동방 어디엔가 거대한 기독교 왕국을 다스리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사제왕이 있어, 그가 용맹한 기독교 군대를 이끌고 와서 팔레스타인에서 십자군을 괴롭히고 있는 사라센인들을 쳐부수고 성지를 탈환해 줄 것이라는 설화이다. 사제왕 요한의 설화는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성경에 나오는 아기 예수의 탄생과 연결된다. ‘마태복음’에는 별을 보고 예수 탄생을 알게 된 세 명의 동방박사(Magi)가 각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경을 지고의 권위로 받아들인 중세 서구인들은 이 이야기에 각종의 상상과 허구를 보태어 동방박사를 동방의 임금으로까지 격상시켰던 것이다.
설화는 또 다른 설화를 낳게 마련이다. 1165년경에는 사제왕 요한이 보냈다는 편지 한 통이 유럽에 출현해 각지에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 편지는 비잔틴의 황제에게 보내진 것인데, 거기서 사제왕 요한은 자신을 바벨탑이 있는 곳에서부터 해가 뜨는 곳까지 세 개의 인도를 지배하는 임금이라고 소개한 뒤 자기가 직접 군대를 끌고 가 그리스도의 대적을 쳐부수고 예루살렘의 성묘를 탈환하겠다고 호언했다. 실제로 그런 인물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중세 유럽인들은 마침내 칭기즈칸이라는 인물이 갑자기 출현하여 서쪽으로 군대를 끌고 와서 호레즘을 정벌하고 곳곳에서 이슬람 세력을 격파했을 때, 그가 바로 대망의 사제왕 요한이 아닌가 하는 환상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13세기 전반 몽골 군대가 볼가강을 건너 키에프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폴란드의 리그니츠에서 기독교도 연합군을 괴멸시키고 말았을 때 그들은 결국 사제왕 요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방기독교는 몽골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다수의 추종자를 확보했고 그들이 후원을 받으며 크게 발전해갔다. 특히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인 톨루이의 부인은 아주 독실한 신자로 유명했고, 그 영향을 받은 중국과 이란의 통치자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인 정책을 견지했다. 따라서 몽골 지배층 일부의 이슬람과 불교로의 개종, 그리고 나아가 제국의 붕괴는 네스토리우스교단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으며, 14세기 중반 갑작스럽게 창궐한 흑사병은 그렇지 않아도 쇠약해진 교단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5세기 이후 동방기독교도는 중국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명나라 말기인 16세기에 중국을 찾아온 마테오 리치(利瑪竇)는 기독교도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초원에서도 기독교가 쇠퇴하고 신자가 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십자가의 성스러운 의미만은 완전히 잊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전반 내몽골에 살던 ‘에르쿠트(Erkut)’라는 이름의 부족민은 장례를 치를 때 죽은 사람의 두 팔을 좌우로 벌린 다음 손바닥을 펴서 위로 향하게 한 뒤 두 손을 머리 뒤로 가지런히 모으게 했다. 그리고는 두 발은 붙인 상태로 곧바로 내뻗게 하여, 죽은 사람의 모습이 마치 십자가를 닮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을 닫기 전에 십자가 모양의 조그만 휘장(徽章)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이 휘장은 웅구트족이 남긴 비석에 새겨진 십자가와 흡사한 모습이지만 그 중심에 만(卍)자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 달라서 불교의 영향을 생각게 하는데, 이러한 휘장을 두고 흔히 ‘오르도스의 십자가’라고 부른다. 부족의 이름인 ‘에르쿠트’는 사실 시리아어로 기독교도를 뜻한다. 그 후에는 아예 에르쿠트족의 종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로써 중앙유라시아를 무대로 펼쳐진 동방기독교의 오랜 역사가 피날레를 고하고 만 것이다.
▲ 부처를 닮은 예수상.(투르판 출토)
이제까지 우리는 불교나 이슬람교 같은 종교가 중앙유라시아를 매개로 하여 동방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이미 7세기부터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전래되어 교회를 건설하고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방기독교는 이제까지 서구기독교단을 중심으로 서술된 교회사에서 도외시되고 잊혀진 존재일 수밖에 없었지만, 앞으로 기독교 발전의 균형 잡힌 이해를 위해서는 물론 중앙유라시아를 통한 동서 문명교류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탐구해야 할 주제이다. ▒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내용
이 비문은 ‘아라가(阿羅訶)’의 천지창조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아라가’는 곧 ‘알라하’ 혹은 ‘알로하’를 옮긴 말이니,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아의 또 다른 이름 ‘엘로힘’이나 이슬람교에서 절대신을 칭하는 ‘알라’와 어원을 같이하는 말이다. 이어 사탄(娑彈)의 유혹에 의해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경위를 적고, 메시아(彌施訶)가 인간의 육신을 입어 동정녀(室女)의 몸에서 태어나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된 이야기를 설명한다. 나아가 당태종 정관(貞觀) 9년, 즉 635년에 아라본(阿羅本)이라는 대주교(大德)가 이끄는 선교단이 중국에 파견된 이래 황제들의 은덕에 힘입어 얼마나 번창하게 되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비문 마지막에는 “현재 법주(法主)인 승 영서(寧恕)가 동방의 경교도를 관할하고 있다”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영서’라는 인물은 바그다드에 있던 네스토리우스교단 본부의 총주교인 하난 이쇼(Hanan Isho·재위 774~780년)의 이름 가운데 ‘이쇼’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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