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1)]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투르크 유목민
이슬람 노예로 팔려온 투르크족
이슬람 제국 주인으로 세계사 호령
가즈나 왕국 세우고 세속군주 뜻하는‘술탄’ 칭호 첫 사용
뒤이은 셀주크 부족 바그다드 점령하고 비잔틴까지 휩쓸어
15세기 아나톨리아 투르크족 중심, 오스만 세력 급부상
콘스탄티노플 시작으로 아시아·유럽·아프리카 휩쓴 대제국 세우며 세계사 뒤흔들어
▲ ‘제왕의 서’에 나오는 삽화. 바흐람 구르가 용을 사냥하는 장면. 14세기 작품. 이스탄불 톱카프박물관 소장
과거 중국인의 세계관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화이지분(華夷之分)’이라 할 수 있다. 즉 세계는 문명의 ‘중화’와 야만의 ‘이적’이 거주하는 권역으로 나뉘어 있고, 역사는 이 두 세계가 충돌하고 갈등하면서 종국적으로 중화의 승리가 성취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물론 고대 그리스인도 이와 유사한 문명과 야만의 이항대립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 중국과 그리스의 세계관에 보이는 ‘야만인’은 분명히 달랐다. 중국의 경우 방위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붙여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불렀지만 중화의 문명에 대한 심각하고 현실적인 위협은 뭐니뭐니 해도 북방의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 중국인의 이러한 ‘화이지분’과 매우 흡사한 세계관이 바로 이란인에게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가 ‘이란(Iran)’과 ‘투란(Turan)’의 대결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란이 중화와 같은 문명세계의 표상이라면 투란은 이적(夷狄)과 같은 야만의 유목세계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계관과 역사관이 잘 드러난 ‘제왕(帝王)의 서(書)’라는 책이 있다. 이것은 11세기 초두에 피르다우시(Firdawsi)라는 시인이 이란인 사이에 전설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영웅들의 이야기와 역사상 실제로 출현했던 제왕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운문으로 만든 장편시이며, 지금까지 이란 민족이 자랑하는 민족의 대서사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국과 이란 두 민족이 이처럼 유사한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중국인이 만리장성 너머에 있던 투르크·몽골계 유목민과 대결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란인 역시 아무다리아강 너머에 있던 유목민과 힘든 싸움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싸움의 결과는 전설 속 이야기와는 달리 농경민족인 이란 영웅들의 화려한 승리로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고대 페르시아의 제왕 캄비세스를 전투에서 패사시킨 마사게태족, 알렉산더와 그 후계자들을 괴롭힌 사카족과 쿠샨족, 사산조(朝)의 후방을 유린한 헤프탈족 등은 중국의 한나라나 당나라와 대결했던 흉노와 돌궐·위구르 못지않게 무서운 상대였다. 11세기 초에 쓰여진 ‘제왕의 서’에서 ‘이란’과 숙명적 대결을 벌이는 ‘투란’, 즉 투르크인은 오랫동안 이란인의 세계를 엄습하던 북방의 유목민족 가운데 가장 최후에 등장한 민족이었다.
투르크인이 이란의 변경지역을 압박하며 남하하기 시작한 것은 9세기 후반부터였는데, 투르크인의 진출은 서아시아를 지배하던 이슬람 칼리프 정권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것과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당시 바그다드를 수도로 극도의 번영을 구가하던 압바스조(朝)는 9세기 중반을 정점으로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칼리프의 화려한 궁정은 하룬 알 라시드(786~809년) 시대의 번영을 배경으로 했다고 하는데, 그가 사망한 뒤 제국의 동부와 서부를 나누어 통치하던 두 아들 사이에 벌어진 암투는 칼리프의 위상에 치명적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 아랍인의 충성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칼리프들은 ‘맘룩(mamluk)’이라 불리는 노예를 모집하여 자신의 친위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래 이슬람에서는 같은 종교를 가진 신도를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거나 억제했기 때문에, 이슬람권 바깥에서 노예를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 같은 노예의 공급지역으로는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가 있었고 거기서 노예가 유입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에서 유입된 투르크 유목민 출신의 노예는 기마와 궁술에 뛰어나 탁월한 전투능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족의 질서와 규범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주군에 대한 충성과 헌신도 널리 인정 받았다.
귀족과 고관의 수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중앙아시아의 부하라 같은 도시에는 상설 노예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또한 붙잡혀온 투르크인을 그냥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아랍어를 가르치고 예의범절도 익히게 하여 상품가치를 높인 뒤 시장에 내놓았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했지만 그렇다고 노예 신분에서 즉각 해방되지는 못했다. 아무튼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권으로 유입된 투르크인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특히 바그다드의 칼리프 궁정에서는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1072년 최초의 투르크어 사전이 바그다드에서 편찬된 데도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다. 현재 신장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도시인 카쉬가르 출신의 마흐무드(Mahmud Kashghari)는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투르크 부족민을 방문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방언을 수집하여 ‘투르크어 사전(Divan Lughat at-Turk)’을 편찬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사전에 나오는 많은 단어와 속담을 아랍어로 설명하였고 완성한 뒤에 칼리프에게 헌정한 것이다. 이 같은 사전을 편찬한 것은 바그다드의 칼리프 궁정에 점점 더 많은 투르크인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생긴 이유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처음에는 친위병으로 고용되던 투르크인이 칼리프나 왕의 신임을 얻으면서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고 군대 사령관으로 혹은 지방 총독으로 임명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결국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 최초의 예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동북부를 중심으로 세워진 가즈나왕조(975~1187)였는데, 이 왕조의 건설자인 사복 테긴(Sabok Tegin)은 원래 투르크족 출신의 노예였지만 중앙아시아의 사만왕조 치하에서 총독으로 활약하던 인물이었다.
그의 후계자인 마흐무드는 998년 ‘성전(聖戰·jihad)’을 외치며 인도 서북부의 힌두교도를 공격하여 막대한 약탈물을 확보하였고, 이렇게 해서 축전된 재화는 아프간 남부의 수도 가즈니(Ghazni)를 화려하게 꾸미는 데 사용되었다. 아울러 그는 이슬람권 역사상 처음으로 ‘술탄(sultan)’이라는 명칭을 취하였다. ‘술탄’은 칼리프라는 성속(聖俗)일체의 지도자 동의를 근거로 그를 수호하는 세속군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술탄제의 등장은 칼리프 권위의 약화와 더불어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 뒤 이슬람권의 많은 군주가 스스로 ‘술탄’을 칭하며 자신들의 지배권을 합리화하려고 한 것은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가즈나조의 등장은 장차 이슬람권 전체를 덮어버릴 투르크인의 출현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아무다리아강 북쪽의 아랄해와 카스피해 부근에서 유목하던 투르크인 가운데, 오구즈 계통의 방언을 사용하던 셀주크(Seljuk)라는 이름의 부족이 있었다. 이들은 가즈나조의 북방을 압박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했고, 1039년에는 단다나칸(Dandanaqan·현재 투르크메니스탄 남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 정복자 티무르의 모습 (복원상) 셀주크 부족민은 토그릴(Togril)이라는 수령의 지휘 아래 서진을 계속하여, 드디어 1055년에는 시아파의 부이(Buy)왕조를 무너뜨리고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수니파임을 공언하며 칼리프와 이슬람 공동체의 새로운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1087년 칼리프는 셀주크의 군주인 말릭 샤에게 ‘동방과 서방을 지배하는 술탄’이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이렇게 해서 투르크인은 이슬람권을 수호하는 ‘칼을 든 사람들’이 된 것이며, 그들은 ‘펜을 든 사람들’인 이란인이나 ‘쿠란을 읽는 사람들’인 아랍인과 구별되었다.
셀주크 부족민의 이동은 바그다드의 점령으로 중지되지는 않았다. 보다 풍성한 약탈물을 획득하기 위해 그들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교도의 땅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비잔틴 측과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1071년 현재 터키 동부에 위치한 말라지기르(Malazigird·일명 만지케르트)라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져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고, 비잔틴은 아나톨리아 고원 거의 전부를 상실하여 에게해 연안의 소규모 왕국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아나톨리아 고원 중앙부까지 진출한 셀주크인은 코냐(Konya)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 이를 가리켜 ‘룸 셀주크(Rum Seljuq)’ 왕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셀주크족의 남하와 함께 열려버린 민족 이동의 문호는 쉽게 닫히지 않았다. 셀주크인이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에도 중앙아시아의 오구즈계 투르크 유목민은 계속해서 남하하였고, 기마무장집단인 이들의 유입은 셀주크왕조로서도 불안한 요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왕조 측에서는 이들로 하여금 제국의 영내를 통과하여 서쪽 변경으로 가서 거기서 비잔틴과의 ‘성전’을 수행하도록 유도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외부로 발산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그들을 ‘성전사(아랍어로는 ghazi)’라고 부른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이렇게 해서 소아시아 반도 서부와 북부에는 투르크 부족집단을 이끄는 ‘베이(bey)’라고 칭해지던 수령이 다스리는 군소왕국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후일 오스만제국을 건설하게 된 집단도 바로 이 같은 변경의 소왕국에서 시작했다.
▲ 투르크어 사전에 삽입된 세계지도. 위가 동쪽, 아래가 서쪽. 셀주크의 뒤를 이어 이슬람권을 제패한 호레즘 역시 투르크인이 세운 국가였다. 셀주크가 1141년 카트완(Qatwan)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하자, 셀주크 술탄의 노예였던 아누쉬 테긴(Anush Tegin)이라는 인물이 자기가 속한 호레즘인을 규합하여 아랄해 부근에 왕국을 세웠다. 호레즘은 13세기 초 셀주크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이슬람권 전체를 장악하였으며, 그 군주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전통적 계승자를 자임하면서 스스로 ‘샤(shah)’라는 칭호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이던 호레즘은 동방에서 출현한 새로운 세력, 즉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의 공격을 받고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호레즘이 무너진 뒤 이슬람권의 상당부분은 몽골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투르크인의 주도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이슬람권에서는 몽골인이 굴복시키지 못한 두 지역이 있었는데 하나는 인도 북부의 델리를 중심으로 유지되던 정권이고, 또 하나는 이집트의 카이로를 중심으로 세워진 정권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몽골의 기마군단을 막아낸 이 두 세력이 모두 투르크 노예 출신 장군에 의해 건설된 왕조였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맘룩왕조는 명칭 자체가 ‘맘룩’, 즉 노예를 뜻했고 인도 북부의 왕조에 대해서도 영어로는 ‘노예왕조(slave dynasty)’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14세기 중반 몽골제국이 무너진 뒤 곧바로 서아시아 본토에서도 투르크인의 정치군사적 헤게모니가 회복되었다. 서아시아 전체를 정복하고 중국을 향해 원정을 떠나다가 사망한 티무르는 원래 사마르칸트 부근을 무대로 활동하던 투르크 유목부족의 수령이었다. 티무르가 건설한 제국이 약화될 때 아나톨리아 고원을 중심으로 흥기한 오스만 세력 역시 투르크 부족민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과거 셀주크 시대에 비잔틴 변경 지역에서 ‘성전’을 벌이던 군사집단이 서서히 다른 세력을 병합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쌓기 시작했고, 마침내 1453년 오스만제국의 술탄인 메흐멧(Mehmet)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아시아·유럽·아프리카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앙유라시아의 투르크 유목민은 초원을 중심으로 유목생활만 하던 무지한 야만인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들은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로 들어가 그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
제왕의 서(Shah-name)
1010년에 피르도시가 35년에 걸쳐 집필하여 완성한 6만행에 가까운 장편 서사시이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전설시대에 관한 이야기로 최초의 ‘인간’인 가유마르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란민족의 전설적 영웅들이 등장한다. 특히 투란의 영웅 ‘아프라시압’과 대결하고 그를 꺾는 루스탐(Rustam)이란 영웅의 활약이 강조되어 있다. 후반부는 엄밀하게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란 역사상 실존했던 왕조의 군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알렉산더도 ‘시칸다르’라는 이름으로 이란의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제왕의 서’는 이란민족뿐만 아니라 인류가 공유해야 할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외국의 중요한 언어로는 모두 번역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조만간 많은 사람에게 읽힐 날이 올 것이다.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기획 = 박영철 차장대우 yc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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