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9)] 파미르 원정대를 이끈 고선지와 그의 시대

화이트보스 2008. 9. 27. 19:31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9)] 파미르 원정대를 이끈 고선지와 그의 시대

고구려 후예인 唐 맹장 고선지

파미르 넘어 타슈켄트까지 정복

중앙아시아 패권 놓고 압바스 왕조와 탈라스 전투

제지기술자 포로로 끌려가 이슬람권에 첫 제지술 전파

패전 후 황제 호위대장군에 임명 ‘안록산의 난’ 진압 지휘

부관 거짓밀고로 전장에서 참형, 비운의 영웅으로 남아 

 

 


▲ 고선지 장군의 활동 무대였던 파미르 산중의 와한 계곡.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 접경하는 곳에는 탈라스(Talas)라는 이름의 그리 크지 않은 강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지금부터 1250년 전 여기서 거의 10만명의 중국군과 아랍군이 격전을 벌여 중국군이 참패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탈라스의 전투’(751)이다. 그때 중국군을 지휘했던 사람이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었던 고선지 장군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전투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중국과 이슬람이라는 두 개의 문명권이 충돌한 것이고, 오늘날까지 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가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는 것도 이 전투의 결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탈라스전투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이처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승리를 거둔 아랍 측에서는 이 전투에 대해 거의 아무런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수만 명이 몰살당한 중국 측에서도 아주 단편적인 기록만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사건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별로 하찮은 일 같아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중요성이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고선지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단지 고구려인의 후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앙아시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격돌의 현장에 주역으로 활약했던 그의 생애와 활동이 곧 당시 세계사의 응축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의 정사(正史) 속에 포함된 열전(列傳)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처음에 그의 부친 고사계()는 오늘날 감숙(甘肅)지방에 주둔하던 하서군(河西軍)에 배속된 군인이었는데,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사진장교(四鎭將校)로 승진했다. ‘사진’이란 ‘안서사진(安西四鎭)’을 뜻하는 것으로, 현재 신강에 위치한 네 도시, 즉 쿠차(龜玆)·카라샤르(焉耆)·호탄(于)·카슈가르(疏勒)에 배치된 군대를 말한다. 그 사령부 격인 안서도호부는 쿠차에 있었다. 고선지는 서부전선에 장교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처음으로 서역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 고선지 장군의 원정도

그는 20살쯤 되었을 때 ‘음보(蔭補·아버지가 고관일 경우 자식에게 낮은 관직을 임명하는 제도)’로 유격장군(游擊將軍)에 임명되었는데, “용모가 빼어나고 기사(騎射)에 탁월했으며 용맹”했기 때문에 신속하게 승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으니, 아직 최고사령관인 절도사의 눈에 띄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티베트계 출신의 부몽영찰이 절도사로 부임해 오면서 주목을 받아 중책을 맡기 시작했고, 곧 호탄과 카라샤르와 같은 도시를 방위하는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740년경 그는 불과 2000명의 기병을 데리고 천산산맥 서부에 있던 달해(達奚)라는 부족을 정복한 공을 인정 받아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에 임명되고 곧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으니, 사실상 절도사 다음의 부사령관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명성을 내외에 드높인 것은 747년의 파미르 대원정이었다. 오늘날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이 접경하는 파미르고원의 해발 4000~5000m 고지를 넘나들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그는 마침내 공로를 인정받아 서부방위 최고사령관인 안서절도사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당제국이 고선지가 이끄는 원정대를 이처럼 고산지대로 보낸 까닭은 티베트 지방에서 흥기하여 당의 서부 변경을 압박하면서 중앙아시아 각지로 세력을 뻗침으로써 안서도호부의 목을 죄고 있던 토번(吐蕃)이라는 강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파미르 산중에는 20여개의 군소국가가 산재해 있었는데, 이들이 토번의 압력을 받아 당과 관계를 단절하자 당의 서역경영은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선지를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임명하고 1만여명의 기병을 주어 토벌을 명령하였다. 현존하는 기록을 통해서 원정과정을 재구성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사령부가 있던 안서(쿠차)를 출발하여 소륵(疏勒·카슈가르)을 거쳐 파미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총령수착(蔥嶺守捉·타쉬쿠르간)을 지났다. 거기서 20일을 진군하여 파미르강에 이르렀고, 20일을 더 행군하여 오식닉(五識匿·시그난)이라는 곳에 도달했다. 그로부터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호밀(護密·와한) 계곡을 거쳐 연운보(連運堡)를 공략했는데, 이곳은 지형이 험난하고 1만명에 가까운 토번의 병력이 수비하고 있는 데다가 요새 아래로 흐르는 파륵천(婆勒川)의 강물까지 불어서 도저히 접근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고선지는 희생물을 잡아서 강에 제사를 올리고 병사에게는 3일치 식량만 챙기게 한 뒤 도하를 지시했다. 장병들은 모두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강을 건너고 보니 “사람이 든 깃발도, 말의 안장도 젖지 않은 채” 온전하게 맞은편에 도착했던 것이다. 고선지는 “하늘이 이 반도의 무리를 우리 손에 넘겨준 것”이라고 선포하며 산을 올라 공격을 개시했고, 마침내 5000명을 죽이고 1000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고구려 후예인 唐 맹장 고선지

파미르 넘어 타슈켄트까지 정복

중앙아시아 패권 놓고 압바스 왕조와 탈라스 전투

제지기술자 포로로 끌려가 이슬람권에 첫 제지술 전파

패전 후 황제 호위대장군에 임명 ‘안록산의 난’ 진압 지휘

부관 거짓밀고로 전장에서 참형, 비운의 영웅으로 남아 


 

 


▲ 투르판에서 출토된 신강위구르박물관의 8세기 당대(唐代) 기마인물용. 그러나 그 고개를 내려가지 않고는 아노월(阿弩越·야신)과 소발율에 도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고선지는 기지를 발휘하여 20여명의 기병을 몰래 미리 아노월 쪽으로 보내놓고, 거기서 적군인 것처럼 변장해 당나라 군대를 환영하러 오도록 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군사의 사기를 회복시킨 뒤 아노월 성채로 들어가 토번을 추종하던 수령들을 참수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747년 음력 8월 고선지는 소발율의 왕과 시집온 토번의 공주를 포로로 잡아 귀환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는 귀환하는 도중에 부하에게 시켜서 승리를 알리는 고첩서(告捷書·보고서)를 써서 직접 황제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상관 부몽영찰은 극도로 분노했고, 귀환한 고선지를 면전에 두고 “개의 창자를 먹는 고려노(高麗奴)야! 개의 똥을 먹는 고려노야!”라는 욕을 퍼부으면서, 이제까지 뒤를 돌보아주던 은덕을 모르고 자신을 무시한 채 황제에게 직접 보고서를 올린 그의 방자함을 질책하였다.


이로부터 몇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아 조정에서 부몽영찰을 해임시키고 고선지를 신임 절도사로 임명하는 명령서가 도착하였다. 이렇게 되자 부몽영찰은 물론 그에게 고선지를 참소했던 사람까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자기의 옛 상관을 전처럼 공손하게 대했고, 참소했던 부하들에게는 “자네들 얼굴은 사나이 같은데 마음은 여자 같으니 어째서 그러냐?”고 꾸짖고는 지난 일을 잊어버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호방한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파미르원정과 고첩서사건은 고구려 출신으로서 갖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와, 그러면서도 하루빨리 공명을 얻고자 하는 조급성도 동시에 갖고 있는 젊고 패기 있는 장군 고선지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750년 그는 파미르고원 서쪽에 있는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에 대한 원정을 감행했다. 이번 원정의 배경에는 토번이 아니라 아랍의 진출이 있었다. 과거 이슬람 군대가 중앙아시아로 들어와 그곳 여러 도시에 압박을 가했을 때, 궁지에 몰린 왕들이 당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황제는 이를 무시했고 결국 이들은 당과 관계를 단절하고 아랍 측에 복속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파미르원정으로 토번의 세력을 꺾은 당제국은 이들을 다시 영향권 아래에 두기를 원했고 그래서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궁지에 몰린 타슈켄트는 전투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성문을 열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국왕을 포로로 잡아 장안으로 압송시켰고 국왕은 거기서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슬슬(瑟瑟·lapis lazuli·청금석)이라는 보석 10여가마, 낙타 5~6마리에 가득 실린 황금과 명마들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중국 측 기록에서조차 “성품이 탐욕스러웠다(性貪)”고 평가할 정도였으니, 현지 주민의 반발과 분노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타슈켄트는 다른 도시들과 연락하여 아랍 측에 지원을 요청하고, 함께 연합군을 편성하여 안서사진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제 막 건설된 압바스 왕조는 이에 호응하여 지야드 이븐 살리흐(Ziyad ibn Salih)라는 장군에게 3만명의 군대를 주어 현지에 투입했고, 이 소식을 들은 고선지는 휘하의 군사와 천산 방면에 거주하던 카를룩(Qarluq)이라는 유목부족을 규합하여 모두 7만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아랍군을 맞으러 나갔다. 이렇게 해서 751년 음력 7월 탈라스 회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전투는 아틀라흐(Atlakh)라는 곳에서 벌어졌는데 현재 카자흐스탄 가장 남쪽에 있는 타라즈(Taraz·일명 Aulie-ata, Zambul) 부근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전투는 닷새 동안 벌어졌는데 당군과 연합했던 카를룩이 이반을 하여 당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져 버렸다. 대부분의 병사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고선지도 겨우 목숨만 살아 나오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아랍군의 포로가 된 사람들 가운데 제지기술자가 섞여 있었고, 이들에 의해 이슬람권에 처음으로 제지술이 전달되고 그것이 결국 유럽까지 전파되었다는 것은 동서문명의 교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 티베트 라싸 조캉 사원의 좌상. 왼쪽부터 네팔공주, 송첸감포, 문성공주.

그가 안서절도사의 직에서 해임된 것은 아마 패전의 책임을 물었기 때문일 텐데, 그 이상의 무거운 처벌은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황제의 호위를 책임지는 우우림위(右羽林衛)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755년에는 밀운군공(密雲郡公)에 봉해졌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안록산의 난이 터지자 조정은 진압을 위해 11만명의 ‘천무군(天武軍)’을 편성하여 고선지에게 지휘를 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군대는 파미르를 넘나들던 안서도호부의 정예군과는 달랐다. 섬주(陝州)에서 벌어진 반란군과의 일전에서 패하자 고선지는 수도 장안의 방어를 위해 동관(潼關)이라는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퇴각을 결정했다. 아울러 나라의 창고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곳에 쌓아둔 돈과 비단을 병사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최후를 불러온 빌미가 되고 말았다. 과거 파미르에서도 같이 싸운 적이 있던 변령성이 그를 조정에 고발했고 현종은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참형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고선지는 퇴각의 죄는 인정할 수 있지만 국고를 사사로이 취했다는 것은 억울하다고 항변했고,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그의 주장에 호응하는 가운데 마침내 755년 음력 12월 참수되고 말았다.




이처럼 고선지의 생애는 아이러니컬하면서 동시에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갖고 있다. 즉 망국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던 한 고구려 유민의 후예가 당제국의 서부방위 사령관으로까지 승진했다는 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제국이 반란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가 모함에 걸려 처형되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중앙유라시아의 패권을 두고 제국들이 쟁패하던 역사적 현장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우리는 그의 생애와 활약상을 통해서 8세기 중반 토번과 아랍의 팽창과 중앙아시아 진출, 이에 대한 당제국의 군사적 대응, 뒤이은 안록산의 반란과 제국의 동요라는 일련의 역사적 흐름을 보다 또렷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





당제국과 토번제국의 대립




토번이라는 나라는 원래 7세기 전반 송첸감포라는 인물이 세운 나라였는데, 당태종도 그의 군사적 압력에 견디지 못해 641년 문성공주(文成公主)를 보내줄 정도였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 있던 토욕혼(吐谷渾)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다툼이 벌어져, 670년에는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10만명의 당군이 원정을 갔다가 참패하고 토욕혼은 멸망했으며, 그 여파로 당의 안서도호부 사령부가 함락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토번은 그 여세를 몰아 676년에는 감숙과 사천으로까지 밀고 들어왔고, 당은 18만 대군을 보내 이를 막으려 했으나 거의 전군이 사망하는 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그 후 토번의 팽창이 소강상태를 맞긴 했으나 중국의 서부 변경과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토번과 당 사이의 줄다리기는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747년 고선지의 원정도 이 두 제국 사이의 오랜 기간에 걸친 대립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