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3)] ‘대중국’의 탄생
淸은 중국·몽골·티베트의 연합국가
강희·옹정·건륭제 3대에 걸쳐 정복전쟁, 중앙 유라시아까지 영토 확장
총 면적 한반도 54배로 명나라 때의 3배 규모인 거대중국 만들어
몽골·티베트·신강 주민, 중국을 지배자가 아닌 제국의 일원으로 생각
고위관리에 한족은 배제하고 별도 통치, 한어 외 4개 언어도 공용어로
▲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던 티베트의 포탈라 궁.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약 950만㎢에 달한다. 이 방대한 지역 안에는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점유하는 한족(漢族)을 제외하고도 55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제국’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남북한 다 합해서 22만㎢밖에 되지 않는 우리 입장에서는 부럽기도 하지만 실로 두렵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중국이 우리에게는 항상 ‘대국’처럼 보였던 것도 결코 착시현상은 아니었다. 오늘날 ‘사대주의’라고 우리가 맹렬하게 비판하는 조상들의 중국에 대한 태도 역시 자존심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00~3000년의 역사를 훑어보면 중국이 항상 이런 정도의 ‘제국’의 사이즈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보다 큰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그런 엄청난 규모는 아니었다. 멀리 올라갈 것도 없이 명나라(1368~1644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영토는 400만㎢를 넘지 않았으니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셈이다. 과거 한(漢)이나 송(宋)과 같은 왕조도 명나라보다 적으면 적었지 더 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거대한 제국의 영토는 언제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바로 17~18세기, 즉 청나라 중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18세기 후반이 되어 청제국의 영토는 거의 1300만㎢를 육박하게 되었으니, 이는 명나라의 영토를 세 배 이상으로 불린 것이었다. 이 청제국의 영토 가운데 ‘외몽골’이 독립해서 떨어져 나갔을 뿐, 나머지 대부분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바로 오늘의 중국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이 표방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는 사실상 따지고 보면 청제국의 유산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청조에 대한 인상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한때 지중해를 석권하고 빈의 성문을 두드렸던 막강한 오스만 제국이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유럽의 병자’로 불렸던 것처럼,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망한 청조는 무기력과 부패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는 ‘대청제국’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청조는 ‘이민족’인 만주인이 중국을 ‘정복’해서 건설한 정권이나 외세에 찌든 무력한 왕조가 아니라, 중국민족이 건설한 위대한 왕조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생겨난 민족적 자부심의 고양과 무관하지 않으나, 자칫 과거와 같은 ‘대(大)중화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한(漢)·송(宋)·명(明)과 같이 한족이 건설한 왕조가 지배할 때에는 영토가 비교적 소규모였지만, 몽골족의 원(元)이나 만주족의 청(淸)과 같이 이민족이 건설한 왕조가 통치할 때에는 규모가 갑자기 확장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중국’과 ‘소중국’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났던 셈이다. 당(唐)도 ‘대중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그 건국집단은 학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관롱집단(關集團)’이라는 특수한 명칭으로 알려져 있듯이 이민족과 한족의 혼혈인이었다.
이처럼 이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건설한 왕조들은 이제까지 ‘정복왕조’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려왔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다분히 중국중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복왕조’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곧 바로 중국의 왕조사 맥락 속에 들어와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조’와 ‘청조’는 중국사의 일부가 될 뿐, 독자성을 지니면서도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의 ‘몽골제국’이나 ‘만주제국’의 이미지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제국의 역사는 중앙유라시아라는 새로운 컨텍스트(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17~18세기에 청제국이 이룩한 성취는 바로 이같은 중앙유라시아적 맥락이 아니면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강희·옹정·건륭, 이 3대 황제의 시대에 확보된 영토가 내몽골·외몽골·티베트·신강 등 모두 중앙유라시아 지역이었고, 만주의 황제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는 다양한 민족집단을 지배할 때 표방한 이념 역시 중앙유라시아의 정치적 전통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가 모피 획득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 러시아인의 동진을 촉발시킨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청제국의 경우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정치·군사적 측면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이 내·외몽골과 티베트와 신강을 정복하게 된 까닭도 이들 지역이 정치·군사적으로 분리되기 어려운 ‘하나의 패키지’와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몽골인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티베트를 장악해야 했고, 몽골을 정복하고 나니 신강이 일종의 ‘덤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파미르 고원의 서쪽은 이 패키지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만주 팔기병의 말발굽은 파미르 기슭에서 멈추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몽골-티베트-신강이라는 트라이앵글의 구조, 즉 서로 분리되기 어려운 역사·지리적 연관성은 어떻게 해서 형성된 것일까.
몽골-티베트 커넥션은 이미 13세기 몽골의 대칸 쿠빌라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유교나 불교, 기독교와 이슬람 등 모든 종교에 대해 대체로 관용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티베트 불교에 많이 경도되어 파스파(Pags-pa)라는 젊은 승려를 초치해 와서 ‘국사(國師)’라는 거창한 호칭을 주고, 티베트에 대한 성속(聖俗)의 지배권은 물론 제국 안의 불교 교단에 대한 관할권까지 부여하였다. 그리고 쿠빌라이 자신은 불교를 보호하는 세속의 군주, 즉 전륜성왕(轉輪聖王·차크라바르틴)을 자칭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그후로도 계속되다가 1368년몽골이 중국의 영토를 상실한 뒤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 알탄 칸(Altan Khan)이란 인물이 소남 갸초라는 승려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헌정하고, 자신은 쿠빌라이의 뒤를 이어 불교 교단의 보호자임을 자임함으로써 몽골-티베트 커넥션은 부활하게 되었다.
소남 갸초의 뒤를 이어 달라이 라마(제4대)가 된 인물은 알탄 칸의 손자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몽골 귀족이 티베트로 가서 승려 수업을 받기도 하고, 티베트에서 승려들이 몽골로 와서 이동식 사원을 세우고 경전을 가르쳤으니 양측의 긴밀한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가 자야 판디타이다.
▲ 자금성에 있는 비석. ‘관원들은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리시오’라는 내용이 한자, 만주, 몽골, 티베트, 오이라트, 위구르 등 여섯 종류 문자로 새겨져 있다.
강희제가 17세기 말 서몽골 준가르의 갈단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문제가 바로 티베트와의 커넥션이었다. 왜냐하면 제5대 달라이 라마가 1682년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섭정으로 있던 인물이 그의 죽음을 은폐하고 계속해서 갈단을 지지하는 것처럼 위장했기 때문이다. 섭정은 달라이 라마가 사망한 지 15년이 지난 1697년, 즉 갈단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같은 사실을 공포했다. 강희제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티베트를 장악하지 않고는 몽골인들을 승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후 서몽골 준가르와 청제국의 만주 황제들 사이에서는 몽골-티베트인의 종교적 지도자이자 상징적 구심점인 달라이 라마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1720년 마침내 강희제는 당시 청해 부근의 쿰붐 사원에 있던 제7대 달라이 라마를 손에 넣고, 청군으로 하여금 그를 호송하여 라싸로 진입시킴으로써 티베트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몽골-티베트-신강의 고리 가운데 마지막 부분인 신강은 최후의 유목국가인 준가르가 정복되면서 제국의 강역 안으로 편입되었다. 오늘날은 ‘신장위구르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지역은 사실상 준가르인이 유목하던 초원과 그들의 지배를 받던 타림분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타림분지는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사이에 둘러싸인 매우 건조한 지대로서, 그곳에 산재한 오아시스에는 농경을 위주로 생활하지만 실크로드를 통한 원거리 교역에도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원래 인도-이란 계통이었지만 대략 기원후 10세기를 전후해서 투르크 계통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곳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지리적 특성상 대규모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한계가 있어, 북방에 사는 유목민들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청이 정복하기 전에도 준가르가 거의 반세기 이상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18세기 중반 준가르가 패망한 뒤 그 지배를 받던 타림분지가 청제국의 판도로 편입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물론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오아시스 주민들은 모두 무슬림이었고 그들의 종교적·세속적 지도자로서 ‘호자(khoja·스승)’라고 불리던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이 자신들의 전통적 지배권을 주장하면서 청군의 진입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준가르에도 대항할 수 없었던 그들이 청제국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호자 형제’로 알려진 부르한 앗 딘(Burhan ad-Din)과 호자 자한(Khoja Jahan)은 파미르 산중으로 도망쳤고 거기서 살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새로 편입된 서부지역은 ‘새로운 강역’이라는 뜻에서 ‘신강(新疆)’이라 불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지명이 되었다.
이미 누르하치 시대부터 내몽골의 부족들을 복속하기 시작한 만주인들은 그 뒤를 이은 홍타이지의 시대에 내몽골 전역을 장악하고, 강희제 때에는 외몽골과 티베트를 편입시켰으며, 마침내 건륭제에 이르러 서몽골과 신강을 점령함으로써 청제국의 판도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주인의 제국 운영방식은 전통적 한인왕조와 크게 달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제국의 강역에 새로이 편입된 이들 지역은 한족의 영토인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이 청제국을 구성하는 일부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청제국은 중국을 위시하여 만주, 내·외몽골, 티베트, 신강으로 구성된 집합체였던 것이다.
만주족 군주들은 이렇게 다양한 지역과 주민들에 대한 통치의 정통성을 중국의 전통적 유교이념에서만 구하지 않았다. 물론 한족에게 그들은 천명을 부여받은 ‘황제’로 비쳐졌고 또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러나 몽골인에게는 과거 대몽골 제국 군주들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칸’이었고, 티베트인에게는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세속군주인 ‘전륜성왕’을 자임했던 것이다. 신강의 무슬림에 대한 입장은 보다 미묘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만주족 군주들은 불교도였지 무슬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술탄’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몽골제국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던 중앙아시아의 무슬림에게도 만주의 군주들은 ‘대칸’으로 인정되었다.
호자 형제는 그의 후손이다. 또한 이들 지역에 대한 통치방식도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한족의 거주지역, 즉 좁은 의미의 중국에 대해서는 성(省)에서 주(州)·현(縣)으로 내려가는 전통적 지방행정제도가 적용되고 만주족과 한족이 동시에 관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은 성으로 편입되지 않았고, 한족은 철저하게 배제된 상태에서 만주족이나 몽골족 팔기 출신들에 의해서만 통치를 받았다. 만주는 물론이지만 몽골, 티베트, 신강 어디에서도 한족이 장관으로 임명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 지역은 한족 거주지역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별도의 방식에 의해 관리·운영되었던 것이다.
제국의 공용언어로는 만주어·몽골어·한어(漢語)·티베트어·위구르어의 다섯 가지가 공히 인정되었고, 이에 따라 각 지역의 보고서도 서로 다른 언어와 문자로 작성되었다. 이러한 다언어 운영실태를 잘 보여주는 예가 국가에 의해 편찬된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鑑)’이라는 책인데, 이것은 이들 5종 언어의 대조어휘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1911년 청제국이 붕괴되었을 때, 몽골과 티베트와 신강 지역의 주민들이 모두 독자적 국가의 수립을 추진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자기들이 속했던 대청제국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한족의 지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한족은 그들과 똑같이 제국의 일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족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에게 청제국은 중국의 왕조였고 그 강역은 중국의 영토였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처럼 한족과 비(非)한족은 청제국이라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극명하게 대립되는 역사관을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가 결국 20세기 전반에 벌어진 수많은 갈등과 비극의 근본적 원인을 이루게 된 것이다. ▒
티베트 승려가 된 서몽골의 자야 판디타(1599~1662)
서몽골 귀족의 자제였던 그는 1616년 티베트로 가서 승려가 되어 22년간 수업을 한 뒤 제5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1638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그는 25년간 몽골 각지를 여행하면서 귀족들과 친분을 맺고 티베트와의 연결관계를 강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1648년 그는 이제까지 몽골인들이 사용하던 문자를 개조하여 ‘토도 비칙`(todo bichig·분명한 문자)’을 만들었고, 이 문자를 이용하여 200부가 넘는 다수의 불경을 몽골어로 번역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번역으로는 ‘금광명경(Altan Gerel)’이 꼽힌다. 그는 또한 정치·외교 방면에도 깊이 개입하여 1640년에는 동서 몽골의 수령들이 모두 참석하는 대회의를 주선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분쟁해소와 평화유지, 대외적으로는 외적에 대한 공동의 대처 등을 합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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