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5)] 소비에트 혁명과 중앙아시아
소련, 무슬림 단일국가 출현 막으려 카자흐스탄 등 5개‘스탄’으로 분할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 무슬림 세력을 혁명 파트너로 삼았다가 소비에트 정권 수립 후엔‘민족주의적 공산주의 배척’명분 탄압
▲ 소련에 의해 멸망한 부하라 칸국의 마지막 군주 무함마드 알림 칸(1880~1944). 1911년 촬영. 미 의회도서관 소장.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기 전, 즉 과거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일원이었던 ‘우즈베키스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존재할 당시 사람들이 부르던 ‘국가(國歌)’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되었다.
앗살람! 러시아 형제여,
그대는 위대한 민족!
불멸의 수령,
우리의 레닌 동지에게 영광 있으라!
자유를 위한 투쟁의 길에서
우리는 전진했으니,
소비에트 나라에서
우즈베크는 영광을 얻었도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우리 애국가의 가사를 생각해본다면, 도대체 한 나라의 국가라고 하기도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보아도 ‘큰 형(Big Brother)’ 러시아에게 노골적으로 아부하는 듯한 국가는 당시 우즈베크 민족의 처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지만, 이런 식의 가사는 우즈베크뿐만 아니라 타지크와 투르크멘 등 중앙아시아 다른 공화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우즈베크가 1991년 독립한 직후 가사를 갈아치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사만 바뀌고 곡조는 옛날 그대로이니, 이는 러시아 지배의 역사적 유산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에는 소위 ‘스탄(‘-stan’은 원래 이란어에서 ‘…의 땅, 지방’을 뜻하는 접미사)’을 돌림자로 갖는 5개의 공화국(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이 독립해 있는데, 소비에트 시대가 남긴 가장 큰 역사적 유산은 바로 이 같은 민족의 분할이다. 즉 이 지역이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에 편입될 당시에는 그렇게 분명히 나뉘어 존재하지 않던 민족이 소비에트 체제를 거치면서 5개의 독자적 민족으로 형성되고 오늘날과 같이 각자 독립된 국가를 갖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것은 20세기 전반 볼셰비키 혁명이 터지고 소비에트 체제가 확립되는 와중에 중앙아시아가 겪어야 했던 역사적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20세기 초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중앙아시아에서는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 인물은 크리미아 출신의 타타르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Ismail Gasprinsky·1851~1914)였는데, 그는 소위 서구식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전통적 이슬람 교육방식을 지양하고 새로운 내용의 커리큘럼으로 이루어진 교육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와 의견을 같이 했던 지식인들은 소위 ‘자디디즘(Jadidis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또한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일어나던 범(汎)투르크주의·범이슬람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부하라를 중심으로 봉건적 관습의 타파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피트라트(Abdarrauf Fitrat·1886~1938)를 비롯한 이들은 소위 ‘부하라 청년단(Young Bukharans)’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목소리와 노력은 제정 러시아의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견제를 받거나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남아있던 부하라 칸국의 지배층에 의해 탄압을 받았고, 결국 이렇게 절망한 중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개혁이 아니라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바로 그때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터졌고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새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중앙아시아의 민족적·문화적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과거 러시아 제국의 식민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영내의 무슬림(이슬람교도)대표들은 그해 5월 회의를 열고 범이슬람주의와 범투르크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해 러시아 민족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천명했다. 이런 가운데 10월에 다시 볼셰비키 혁명이 터졌고, 임시정부 측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지지를 필요로 했던 그들은 무슬림 민족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적군과 백군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결국 무슬림들도 양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러시아와의 타협을 거부한 채 게릴라식 투쟁방식을 택했던 ‘바스마치’ 운동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민족문제에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적군(赤軍) 측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볼셰비키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결국 같은 배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별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즉 계급과 민족, 양자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우선시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양측은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민족문제, 즉 민족의 자결과 번영이라는 지상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했다.
그들이 사회주의를 택한 것은 민족 해방을 위한 ‘이념’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대중을 동원하고 조직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일찍이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 보다 많은 민족주의자와 제휴할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겉으로는 민족주의자를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혁명가들은 사실상 “겉으로는 사회주의자이지만 속으로는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백군(白軍)과의 투쟁과정에서 이 같은 민족주의 진영을 적극적으로 포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지시에 따라 스탈린은 1917년 ‘민족문제 인민위원회(Narkomnat)’라는 조직을 만들어 위원장이 되었다. 그루지야 출신이었기 때문에 민족문제의 유용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잘 알고 있던 그는 많은 무슬림에게 일단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고, 무슬림들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세력이야말로 중앙아시아의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줄 것으로 확신하고 적군에 적극 가담했던 것이다.
▲ 중앙아시아 무슬림의 대표였던 술탄 갈리에프. 당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주장을 가장 집약적으로 대표했던 술탄 갈리에프(Sultan Galiev·1892~1940)라는 인물도 처음에는 스탈린과 매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그를 돕고 있었다. 우랄산맥 남쪽 바슈키르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영내의 많은 무슬림이 혁명에 가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주장은 공산주의·민족주의·이슬람, 이 3자를 결합한 것으로서 오늘날 ‘술탄 갈리에프주의’라고 명명되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그의 사상은 소비에트 체제하에서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 이념적 유효성은 잃고 말았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이 근대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미래에 관한 체계적 비전으로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적 표상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술탄 갈리에프의 주장 가운데에서 가장 핵심적 개념은 ‘프롤레타리아 민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도출된 개념이다. 즉 레닌의 이론은 자본주의 국가 간 식민지 쟁탈전으로 인해 계급투쟁의 양상은 국제화되고, 이에 따라 전 세계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양분되며, 혁명은 그 가장 취약한 부분에서 일어나 제국주의의 연관고리가 분쇄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종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형성이 미약한 것으로 여겨지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야 할 필연성과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이었다. 그러나 술탄 갈리에프는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전 세계가 ‘가진 민족’과 ‘못 가진 민족’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독일·프랑스의 중산층은 중앙아시아의 부유층보다도 더 부유한 것이 현실이며, 기본적으로 중앙아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성숙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회 내적인 계급 갈등보다 약소민족에 대한 우세민족의 집단적 착취가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전 세계는 ‘프롤레타리아 민족·국가’와 ‘비(非)프롤레타리아 민족·국가’로 양분되어 있고, 따라서 혁명은 바로 ‘민족해방’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 해방이 성공하면 민족 내부의 계급문제는 자연적으로 해소될 것이라고 믿었고, 민족 해방을 통해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계급 없는 민족’을 이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렇게 그는 민족을 혁명의 기본단위이자 출발점으로 설정했는데, 민족은 공통의 역사와 전통을 갖는 단위이고 중앙아시아에서 각 집단이 공유한 그러한 전통은 바로 이슬람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의 이상은 원시 이슬람의 정신에 이미 구현되어 있고, 그 실현의 구체적 현장도 이슬람의 ‘움마(umma·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인정하되 그 광신성과 미혹성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결국 이슬람을 공통의 유산으로 갖는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이 연합해 해방을 성취함으로써 ‘투란(Turan)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술탄 갈리에프와 그의 동료들이 ‘민족생활’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주장한 이러한 내용은 결국 소련 영내, 특히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모든 무슬림을 하나로 묶는 ‘투란민족’을 상정하고 그 정치적·문화적 독립을 주장한 셈이었다. ‘투란’은 ‘투르크’의 또 다른 명칭이니, 결국 공산주의를 표방하기는 하되 독립된 투르크인들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소련 집권층과의 입장 차이는 너무나 분명했고, 이것은 마침내 1924년에 극명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해에 열린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의 맹렬한 비난에 뒤이어 술탄 갈리에프는 이탈과 반역의 죄목으로 비판 받고 당적을 박탈당했고, 이어 호자에프(Fayzullah Khojaev), 리스쿨로프(Turur Ryskulov) 등 다른 무슬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뒤따랐다. 이러한 비판, 숙청, 처형은 1937~1938년경 절정에 이르렀다.
물론 이 시기에는 스탈린 개인 숭배가 강화되면서 수많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도 체포·처형되었다. 그러나 무슬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은 스탈린 개인의 우상화와는 별도로 소련 공산당의 기본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특히 1920년대는 소련공산당이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의 ‘포위’로부터 극도의 위기의식을 느끼던 시기였고, 그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혁명의 수출보다는 내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주도하의 혁명보다는 우선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반(反)제국주의 운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 천명되었고, 터키의 케말 아타투르크, 중국의 장제스, 이란의 레자 샤 등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슬림 민족주의자들은 이 같은 노선을 비판하면서 이들 후진지역에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혁명의 수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무슬림에 대한 탄압은 술탄 갈리에프와 같은 정치가뿐만 아니라 작가, 예술가, 학자로까지 확산되었다. 이와 함께 이슬람 자체에 대한 박해도 병행되어 1942년경 중앙아시아에서 모스크의 수는 2만6000개에서 1312개로 급감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무슬림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는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되었다. 스탈린 사후 후루시초프에 의해 일부 인사에 대한 복권 조치가 이뤄지긴 했지만, 그들의 이념은 이미 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 당국은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단일 민족·국가의 출현을 막기 위해 소위 ‘민족분할(natsional’noe razmezhevanie)’ 작업에 들어갔다. 이 결정이 술탄 갈리에프의 숙청이 있었던 1924년 공산당대회에서 이루어졌던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1924년에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이 만들어지고, 1929년에는 타지키스탄이, 1936년에는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 성립되었으며, 1937년에는 각 사회주의공화국의 헌법이 채택되면서 드디어 ‘분할’ 작업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부족적 차이가 민족의 차이로 바뀌었고, 서로 다른 방언이 이제는 독자적 언어로 인정 받게 되었다. 더구나 투르크인들의 내적 결속을 견제하는 쐐기를 박기 위해 동부 이란어를 사용하는 타지크인들을 별도로 독립시켜 공화국으로 만든 것은 당시의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그야말로 로마제국이 즐겨 사용하던 ‘분할통치(divide et impera)’의 정신에 충실한 정치적 결정이었던 것이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 탄생한 5개의 ‘스탄’ 공화국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의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민족자결을 주장하던 목소리가 강제로 침묵되고 대신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시행된 민족분할적 식민정책의 잔재가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이 직면한 오늘의 문제와 미래의 비전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올바로 인식하고 소비에트 시대가 남겨준 유산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극복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 바스마치 운동의 지도자 엔베르파샤)1881~1922) 바스마치 운동
제정 러시아에 저항한 무슬림의 독립운동
바스마치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1916년 여름, 제정 러시아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독립운동을 가리키는 러시아어이다. 러시아 측에서 이를 비하해 ‘도적, 강도’ 등을 뜻하는 바스마치(basmachi)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연속해서 터지고 백군과 적군 사이에 내전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상당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독자적 활동공간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 지도층은 호자에프와 같은 자디디즘 계열의 지식인에서부터 무함마드 알림과 같은 부하라의 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잡했기 때문에 결속력은 비교적 취약했다. 내전이 끝나갈 무렵인 1921년에는 터키에서 국방장관까지 지낸 엔베르 파샤(Enver Pasha)가 이 운동에 가담해 무장세력을 재조직하여 투쟁을 이끌었으나 1922년 적군의 반격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그 뒤 바스마치 운동은 게릴라식 저항의 형태를 띠다가 사라져 버렸다.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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