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세계사 주역은 동양도 서양도 아닌 중앙유라시아였다
동서양 쥐고 흔들며 3000년 역사 호령… 화려한 문명의 맥박이 유럽을 넘어 한반도까지 전해져
실크로드 지배자는 초원의 유목민과 사막의 오아시스민
실크로드는 단순한 교통로가 아닌 문명의 진원지… 대륙의 정복자였던 중앙유라시아 주민, 캐러밴 무역을 이끌던 국제 상인이자 선교사 역할
중앙유라시아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몽골, 중앙아시아, 만주, 시베리아, 티베트, 아프가니스탄, 헝가리 등 유목민족의 활동무대였던 중앙유라시아는 최근 풍부한 부존자원을 바탕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어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Weekly Chosun은 이번 호부터 중앙유라시아사의 권위자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을 연재합니다. 중앙유라시아는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을 연결시켜 세계사를 가능하게 만든 문명입니다. 초원과 사막의 중앙유라시아 문명은 영역이 광대하고 독자적 문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홀하게 다뤄진 측면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의 기원도 이들 문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구소련 붕괴 후 등장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는 ‘고려인’으로 불리는 수많은 우리 핏줄이 살고 있는 데다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는 이들 지역과의 경제적 교류도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 대한 국내의 관심과 수요는 높아지는 반면 깊이 있는 정보는 턱없이 부족한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Weekly Chosun은 국내 잡지 사상 최초로 중앙유라시아를 주제로 한 대형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연재를 맡은 김호동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중앙유라시아 권위자로,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 하버드대학에서 내륙아시아 및 알타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6년부터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심오한 전문지식과 유려한 필치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김 교수의 문명 탐험은 독자 여러분을 매혹적인 지적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중앙유라시아’라는 말이 매우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라는 말의 합성어인 유라시아라는 말도 그리 자주 쓰는 용어가 아닌 터에 ‘중앙’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었으니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 선뜻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다지 익숙치 않은 이 ‘중앙유라시아’란 용어가 앞으로 계속될 연재에서 키워드처럼 자주 사용될 것이기 때문에 먼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 도대체 그것을 논의할 필요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우리가 그동안 많이 써온 ‘동양’과 ‘서양’이라는 말이 개념적으로 아주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한 바 있다. ‘동양’의 원어에 해당되는 ‘오리엔트’는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으로 원래 유럽인들이 지중해 동부 연안, 즉 오늘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는데, 후일 그들의 지리적인 지식이 넓어지면서 그 너머의 모든 동방지역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오리엔트’라는 말은 근대에 들어와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며 ‘우리’와 ‘그들’을 규정할 필요가 있었던 유럽인에게는 나름대로 유용한 용어였겠지만, 공통성이 별로 없는데도 한꺼번에 ‘동양’으로 분류된 중국·인도·아랍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말은 무용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이라는 말에 담긴 이같은 개념적 오류와 문화적 편견을 ‘오리엔탈리즘’이라 규정하고 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제기된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제 우리 주위에서는 서구 중심적인 이같은 이론에 대한 비판적 주장을 거의 일상적으로 듣게 되었다. 아니 요즘의 논자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사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동아시아에 있었고 유럽은 근대에 들어와 ‘운좋게’ 기회를 잡아 일시적으로 헤게모니를 잡은 것일 뿐, 이제 머지않아 동아시아가 주도하는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이라는 자신에 찬 낙관론을 제기할 정도가 되었다. 최근 놀라운 경제적 발전과 함께 이런 분위기에 한껏 고무된 중국이 신(新)중화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며 역사 해석 문제를 두고 주변국들과 갈등까지 빚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목도하는 바이다.
이렇게 해서 작금의 상황은 총성만 들리지 않을 뿐 전후방의 구분이 없이 벌어지는 치열한 ‘역사전쟁’의 와중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자기가 속한 국가와 민족을 중심에 두는 역사 해석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고, 또 그 자체가 이론과 연구의 영역에 머무르고 정도가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면 그다지 비난 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애국애족의 역사관을 표방하지 않으면 혐의와 질시를 받고 사회적으로도 매도되기에 이른 오늘날의 상황은, 거의 맹목적으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를 외치는 그야말로 주체사관의 올무로 우리를 밀어넣고 있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세계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대단히 피상적이고 일방적이라는 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중고등학교에서 세계사 교육이 홀시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세계사 과목은 아주 소수의 학생만이 선택하기 때문에 대학 신입생들의 평균적인 세계사 지식은 통탄할 지경에 이르렀다. 국내의 역사연구자들도 한국사를 제외하고는 주로 구미·중국·일본 등 ‘주류’ 국가들에 집중되어 있고 인도·동남아·아랍권의 전문가는 가뭄에 콩 나듯한 실정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세계사인 전반에 대한 우리의 무지로 연결되고 무지는 배타적인 주관과 아집을 낳게 되는 것이다.
세계사는 한 폭의 카펫과 같다. 이는 필자의 은사인 조셉 플레처 교수가 즐겨 쓰던 비유다. 각 민족·국가·지역·문명의 시간적·종적인 전개과정(날줄)이 그들을 연결하는 횡적인 고리들(씨줄)과 얽힐 때 비로소 세계사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날줄과 씨줄이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무늬가 곧 세계사의 양상이요 특징인 것이다. 만약 이러한 횡적인 연결고리들이 없다면 상호연관성이 없는 개별적인 민족과 국가의 종적인 역사만 존재하게 되고, 세계사는 종횡이 어우러져 짜여진 카펫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지 않은 한 웅큼의 실타래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같은 횡적인 연결들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여기서 우리는 실크로드라는 친숙한 용어를 떠올리게 된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잇는 대간선로였던 실크로드는 분명히 그같은 연결고리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실크로드를 매개로 유라시아 문명들의 상호연관성을 설명하려면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 문제는 실크로드가 교통과 교류의 ‘루트’에 불과했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실크로드는 문명이 교류될 때 이용되는 대상, 즉 주체적인 의지가 있을 수 없는 교통로에 불과하기 때문에 교류를 추진하는 쪽은 동아시아나 서아시아 혹은 유럽과 같은 역사의 주체들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세계사가 여전히 ‘주류’ 문명 중심의 관점과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것이 바로 ‘실크로드 사관(史觀)’의 한계이다. 세계사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은 실제로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관리하던 주체가 중국인도 아랍인도 유럽인도 아니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럼 누구였는가. 그것은 바로 중앙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과 사막의 오아시스민들이었다. 실크로드가 경유하는 대부분의 지역이 중앙유라시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동쪽으로는 만주의 흥안령 산맥 부근에서 시작해서 서쪽으로는 헝가리 초원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고, 북으로는 시베리아 삼림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남으로는 티베트 고원과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중앙유라시아는 지역적으로 엄청나게 넓은 범위를 포괄하고 있다.
중앙유라시아는 대륙의 주변부에 위치한 집약적인 농경이 가능한 습윤지역, 즉 동아시아· 동남/남아시아·서아시아·유럽의 주요 문명들과 모두 접하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문명권을 이루어 왔다. 이곳을 진원지로 하여 시작된 파동은 주변부의 역사를 끊임없이 요동치게 만들었다. 중국사에 관해서 만리장성을 둘러싼 남북의 대립의 역사로, 러시아사에 대해서는 삼림민과 초원민의 투쟁의 역사로, 이란사에 대해서 이란과 투란의 갈등의 역사로 보는 전통적인 시각들도 모두 중앙유라시아가 역사에 미친 충격파의 거대함을 느끼게 해준다. 중앙유라시아의 주민들은 기마군단으로 이루어진 정복자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캐러밴 무역을 이끌던 국제상인이었고 이국의 신들을 소개한 선교사이기도 했다. 중앙유라시아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한반도 지형의 골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만주의 삼림과 몽골의 초원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이미 선사시대 이래로 중앙유라시아에서 비롯된 맥동은 부단하게 한반도로 전달되었다.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이를 말해주고, 거란·여진·몽골·만주족과 끊임없이 투쟁하며 교류해야 했던 우리의 역사가 입증해준다. 그동안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던 관점과 서술방식은 당연히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중앙 유라시아 커넥션의 중요성에 대한 주의가 환기될 때이다.
중앙유라시아는 오랫동안 주변의 농경문명권 사람들에게 ‘미지의 땅’, 아니 ‘야만의 땅’으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며 지금 우리는 그같은 인식 태도를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그들의 역사를 말해주는 문자 기록의 대부분이 이처럼 그들을 무시하고 야만시하던 농경민족에 의해 쓰여진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기록에 의존하여 역사를 이해해온 우리는 중앙유라시아를 세계사라는 무대에서 이름없는 조연 정도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각본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를 알아야 할 때가 왔다. 중앙유라시아가 세계사의 당당한 주연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진정한 이해를 위해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할 커다란 퍼즐 조각이었음을 알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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