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역사기행] 연재를 마치며
중앙유라시아의 세계사적 의미 재평가
21세기 한국의 미래 위한 나침반 되길
‘중앙유라시아 역사기행’을 통해서 우리는 지난 3000년 동안 중앙유라시아의 초원과 사막을 무대로 펼쳐진 다양한 역사의 현장들을 찾아보았다. 그동안 이 글을 챙겨서 읽은 독자라면 그 수많은 현장에서 조금은 낯선 역사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흑해(黑海) 연안의 초원을 주름잡던 스키타이인, 실크로드를 누비던 소그드의 국제상인들, ‘타타르의 땅’을 찾아나선 유럽의 프란체스코파 수사(修士)들, 만주족 강희제와 제국의 운명을 걸고 대결을 벌인 갈단…. 어쩌다 들어봤을지 모르지만 우리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것은 필자의 의사전달이나 표현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서 전해주고 싶었던 메시지는, 그 동안 우리가 생소하게 여겨온 중앙유라시아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이 사실은 세계사의 전개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과잉’에서 벗어날 때
또한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마치 강력한 지진파가 외부를 향해 퍼져나가듯 주변 세계, 즉 동아시아·서아시아와 유럽에 부단한 충격을 가하며 그 역사적 흐름에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을 여러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전문적인 연구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이제까지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관심의 초점은 지나치리만큼 실크로드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실크로드가 역사적으로 동서문화를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연결하던 내륙 교통로를 지칭하던 실크로드라는 말의 의미가 점차 확대되어 북방의 초원루트와 남방의 해양루트까지 포괄하게 되면서 이제는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유효성을 의심케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 지난 7월 11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몽골 전통축제 '나담축제' 개막식에서 기마대가 트랙을 따라 행진하고 있다. / photo 조선일보 DB
더구나 실크로드의 상업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측면이 정도 이상으로 부각되었고, 이는 실크로드의 역사적 진상을 호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이제는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를 바라볼 때 이 같은 실크로드 ‘과잉’에서 벗어나 그 세계사적 의미를 진지하게 다시 검토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해외 역사학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우리에게 좋은 출발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냉전의 종말과 인터넷의 확산은 그야말로 ‘지구화(globalization)’ 시대로의 진입을 실감케 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어 역사학계에서도 이제까지 고립되고 독립적인 국가·지역·문명에 대한 연구에서 벗어나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소위 ‘신(新) 세계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같은 경향은 중앙유라시아의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근본적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다.
더 이상 ‘변방의 역사’ 아니다
예를 들어 제리 벤틀리(Jerry H. Bentley)와 같은 학자는 기원후 500년에서 1500년까지의 1000년을 ‘유라시아적 통합’이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특히 1000~1500년의 기간은 ‘초(超)지역적 유목제국’이 주도하던 시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서구에 의한 소위 ‘근대적 세계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유목제국에 의해 구대륙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 같은 통합은 기존의 ‘실크로드’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보다 근본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와 융합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중앙유라시아는 ‘세계사’의 지나온 궤적을 이해하는 데 매우 긴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더 이상 ‘변방의 역사’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중앙유라시아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은 우리 민족의 과거를 올바로 이해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세우는 데도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21세기 인류의 역사는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고 그 격랑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의 정립을 요청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지혜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작금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지난 몇 세기 동안 확고부동하던 ‘서양’의 절대적 우위는 흔들리는 반면 이슬람의 도전과 중국의 부상(浮上)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으며 장차 세계사의 흐름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겠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국제 학술계에서는 치열한 지적 모색이 진행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우리나라에서 유행되다시피 한 서구중심적 관점에 대한 비판은 카타르시스를 위한 심리적 효과나 독자의 호응을 기대하는 상업적 효과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이상의 건설적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지구촌은 머지않아 ‘다(多)중심체제’의 시대로 진입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중심’들이 형성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구미권·이슬람권·중화권과 같은 커다란 블록이 예상된다. 물론 인도나 중남미 같은 변수도 존재할 것이다. 아무튼 문제는 우리 한국이다. 개항 이후 지금까지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서구의 문명·과학·이념을 비판하고 거부한다고 해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회귀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이슬람은 우리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이긴 하지만 우리의 것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운 실체이다.
우리 민족 역사와도 깊은 연관성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역사기행’에서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21세기를 맞아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성찰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형성하는 데 작으나마 기여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중앙유라시아는 세계사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지난 2000년 동안 한반도와 그 주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한민족의 독자성과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반도와 중앙유라시아, 즉 역사적 ‘남북관계’를 항상 대립적인 것으로 서술해왔다. 그래서 북방 ‘오랑캐’와의 항쟁을 강조해왔고,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시대는 외세에 굴복한 수치스러운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돌아보면 ‘남북관계’는 대립에서 융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의 접촉과 교류를 포괄하는 관계였다. 우리의 언어·풍속·제도·종교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는 그 영향을 받아왔다. 한반도는 한편으로는 바다를 향해 열려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유라시아를 향해 열려 있었고, 북방의 채널을 통해 그곳의 문물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온 것이다.
필자는 지금이야말로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세계사의 지난 궤적을 이해하고 현재의 국제적 상황의 원천을 올바로 파악하는 데 긴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과 미래 비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역사는 지나칠 정도로 ‘중국중심’ 혹은‘민족중심’으로 해석되어왔다. 중앙유라시아와의 연관성은 한낱 에피소드로 치부되었지 우리 역사에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편견을 벗어버려야 할 때다.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만주와 몽골을 거쳐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듯 우리의 역사도 중앙유라시아와의 심층적이고 광범위한 연관성 속에서 전개되고 발전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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