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박정희家 진실을 말하다

화이트보스 2008. 10. 22. 16:25

박정희家 진실을 말하다 - “근혜 언니와 갈라선 18년, 통곡의 ‘짝사랑 세월’ 보냈다

 

 


 

 


박근령 씨가 인터뷰 중 흐느끼고 있다. 왼편 흐릿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남편 신동욱 교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끝내 오지 않았다. 지난 10월13일. KT 여의도 웨딩컨벤션 3층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표의 동생 박근령(54) 씨의 결혼식장. 기다리던 언니가 나타나지 않자 근령 씨는 결혼식 직전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을 터뜨렸다.


박 전 대표의 불참은 이미 예정돼 있었다. 결혼식 3일을 앞두고 있던 지난 10월10일 일간지와 각종 인터넷 언론에는 일제히 ‘박근혜 대표의 결혼 불참’ 제하의 기사가 나왔다. 식장은 예상대로 썰렁했다. 현역 정치인이라고는 한나라당 흥사덕 의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난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박태준 전 총리,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 김형오 국회의장 등이 보낸 화환만이 ‘전직 대통령 딸’의 결혼식임을 짐작하게 했다. 두 자매의 불화가 결혼식을 통해 확인된 셈이었다. 기자는 결혼식을 앞두고 세 차례 근령 씨를 만났다.


<월간중앙> 회의실에서 진행된 첫 인터뷰는 지난 9월25일 오전 10시에 시작해 오후 3시께까지 5시간 동안 진행됐다. 두 번째는 1주일 후인 10월2일 서울 동부지원 근처 한 변호사 사무실과 차 속에서 4시간, 세 번째는 지난 10월8일 오전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1시간여 동안 계속됐다. 근령 씨보다 열네 살 연하인 예비신랑 신동욱(40·백석문화대 광고마케팅학과) 교수는 이 세 차례의 만남에 모두 동행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그는 근령 씨의 생각을 거들며 간혹 본인의 의사를 표출하기도 했다.


1. 나와 달랐던 ‘언니 박근혜’

- “겉으로는 차가워도 속으로는 한없이 따뜻한 분”




관련사진



지난 8월15일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34주기 추모식에 함께한 근혜(오른쪽), 근령 자매. 모처럼 밝은 모습이었다.

박지만 EG 회장 전화 인터뷰

“근령 누나의 판단력 믿을 수 없다”

박근령 씨의 동생 박지만 EG 회장은 둘째누나의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근령 씨의 결혼 발표가 보도된 직후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가족은 이 결혼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불편한 심정을 공개했다.


근령 씨의 결혼을 3일 앞두었던 지난 10월10일. 일부 언론에 또다시 ‘박근혜 전 대표가 동생 근령 씨 결혼에 불참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동생 박지만 회장도 불참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기사가 보도된 당일 <월간중앙>은 박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는 속내를 듣고 싶었지만 박 회장은 언론과의 전화 통화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인터뷰는 짧게 진행됐다. 다음은 박 회장과의 일문일답.


-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째누나의 판단력을 믿을 수 없습니다. 누나는 지금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근혜누나나 저나 같은 형제인데 왜 도와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꾸 주변의 말에 솔깃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더는 어쩔 수 없습니다.”


- 박 회장과 근령 누나의 관계가 좋았던 것으로 아는데요.

“좋았죠. 좋았는데…. 자꾸 딴 이야기를 하시고, 만나면 제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당신 주장만 옳다고 하시니까….”


- 결혼식은 끝까지 참석하지 않으실 것인가요?

“결혼식에는 안 갑니다. 제가 계속 말하면 또 오해가 생길 것이고…. 더 이상 시간도 없고, 이만 끊겠습니다.”

첫 인터뷰를 했던 지난 9월25일. 근령 씨는 붉은 색 계통의 잔잔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오래 전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색깔이 옅게 들어 있는 선글라스를 낀 채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가능한 한 언니 얘기는 하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가뜩이나 본인의 결혼 때문에 혹여 언니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라며 언니에 관한 질문을 자제해 주기를 재차 당부했다.


언니에 관한 질문에 민감한 경계심을 나타내면서도 그는 정작 언니 이야기가 나오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며 인터뷰 내내 울먹이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 결혼 축하드립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 교수를 택하신 이유는?

“육영재단 문제를 상의하면서 믿음직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같은 듬직함도 느꼈고요. 신 교수가 가진 단점을 다 끌어 안기로 결심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처럼 사랑을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둘 모두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니 오누이처럼 서로 남은 인생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동생 지만에게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은 매형을 갖게 해서 미안할 뿐입니다.”


- 언니가 결혼식에 오시리라고 믿습니까?

“언니 주변 분들이 말리지만 않으신다면 언니는 올 것입니다. 언니 마음은 제가 압니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언니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습니다.”


- 근령 씨에게 언니는 어떤 의미입니까?

“언론이 언니한테는 제 이야기를 잘 안 물으시잖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런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언니가 공인이시다 보니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제 생각대로 거침없이 말씀 드리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언니는 오래 전부터 나라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신 분이니까…. 일반 가정처럼 친언니로서의 정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사사로운 정에 신경 쓸 분이 아니시죠.”


근령 씨는 언니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이 한마디를 하고는 목이 메었다. 박근령. 20대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언니 박근혜와 달리 공개되지 않은 삶을 살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 딸. 얼굴이 알려진 언니를 대신해 속옷을 사러 시장에 나가고, 언니가 읽고 싶어하는 책을 대신 사다 주기 위해 서점에도 들르던 박 전 대표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다.


여느 집안의 자매라면 두 살 터울의 언니와 친구처럼 지냈을 수 있었겠지만, 둘은 그렇게 지내지 못했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한 근령 씨는 1982년 풍산그룹 창업주 류찬우 씨의 장남 류청 씨와 결혼했으나 1년이 채 안 돼 헤어졌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다 1990년 귀국해 언니 박 전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던 육영재단의 신임 이사장으로 추대된다.


자매 간의 불화는 육영재단 분규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박 전 대표는 당시 육영재단 이사장이었다. 숭모회라는 단체가 나타나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육영재단에서 지난 10여 년간 전횡을 일삼던 최태민 고문과 무능한 박근혜 이사장은 즉각 퇴진하라”고 주장할 때까지 둘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1974년 8월 육영수 여사 서거 직후 박 전 대표가 측근 최태민 목사와 ‘구국선교단’ ‘구국여성봉사단(후에 새마음봉사단)’ 같은 전국 조직을 만들어 움직이자 세간에는 곱지 못한 여론이 등장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앞으로 근령·지만 남매가 “최씨가 언니를 통해 육영재단과 어린이회관까지 간섭했다”고 주장하는 편지를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육영재단 파문은…

“법치 국가에서 폭력 강탈은 있을 수 없는 일”

지난 5월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에 대한 이사장승인취소처분이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로써 박근혜 전 대표에 이어 설립자의 자녀들이 모두 재단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됐다. 1969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는 육영재단을 설립했다. 어린이 복지사업을 하려는 목적이었다.


1974년 육 여사 작고 후 육영재단은 크고 작은 분쟁 속에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1990년 박근혜 전 대표가 동생 근령 씨에게 육영재단 이사장 직을 물려주고 떠난 이후에도 분규는 끊이지 않았다. 1994년 육영재단 직원들이 근령 씨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고, 육영재단의 관리·감독기관인 서울 성동교육청은 2001년과 2004년 근령 씨에 대한 이사장취임승인을 취소했다.


부실 경영과 감사 거부 등이 이유였다. 이에 근령 씨 측은 불복 소송을 냈으나 3심까지 이어진 재판 끝에 패소했다. 지난 5월15일 내려진 대법원 최종 판결에 따라 근령 씨는 실질적 이사장 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2006년 12월 근령 씨와 신동욱 교수의 약혼 사실이 알려지면서 육영재단의 문제는 더욱 악화됐다. 사무국장과 일부 직원들이 이사장인 근령 씨와 당시 육영재단 감사실장으로 있던 신 교수의 퇴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28일에는 근령 씨의 퇴진을 요구하는 직원들이 어린이회관을 점거하면서 폭력사태까지 일어났다. 근령 씨와 신 교수는 이 폭력사태로 육영재단에서 나오게 됐다. 현재 서울 광진경찰서에는 육영재단과 관련한 고소·고발 및 진정 사건이 20여 건 넘게 접수돼 있다. 근령 씨는 현재 후임 이사가 선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등기부상 이사 권한은 유지하고 있다.


그는 “법치국가에서 폭력 강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대법원의 판단은 존중하지만 등기부상 이사의 권한이 살아있기 때문에 재단 업무 수행권을 복원하고 권리를 찾을 법적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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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일가의 단란했던 모습. 왼쪽부터 박근령 씨, 고 박정희 대통령,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고 육영수 여사, 박지만 EG 회장.

“언니 휴대전화번호 모른 지 수년째”


최씨 소동이 노사분규로 번지자 박 전 대표는 1990년 11월 어린이회관 이사장직을 동생 근령 씨에게 넘겨준다. 근령 씨를 지지하던 숭모회와 박 전 대표를 지지하던 ‘근화봉사단’은 육영재단이 있던 어린이회관에 수백 명씩 몰려와 몸싸움을 해댔다. 박 전 대표가 이사장직을 양보하면서 싸움은 일단락됐지만, 이 때부터 둘의 관계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 언니 이야기를 꺼리시는 이유는 뭡니까?

“제가 그 동안 언니한테 크게 기여도 못 하고…. 뒷바라지도 못해 드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디 나가 박근혜 동생이라고 하기도 부담스럽습니다. 언니는 지금 공인으로 계시니까요. 그래도 남들이 “네가 돌아가신 부모님한테 잘한 게 뭐가 있느냐”고 물으시면 지금은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니 부담이 없어 말할 수 있는데, 언니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고민이 돼요.”


- 두 분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이 1990년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미국에서 사업을 구상 중이었어요. 지인들과 말이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 결심하고 한국에 잠깐 들어왔었는데 육영재단 문제가 이미 곪아 있었던 것입니다. 최태민 고문을 몰아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제게 ‘너는 박정희 딸 아니냐? 육영재단 문제를 풀 사람은 너밖에 없다’며 저를 앞장세운 거죠. 그들은 제게 ‘최태민 목사의 사조직인 근화봉사단이 근혜 언니를 엄청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어요.”


-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앞으로 동생 박지만 회장과 근령 씨가 “최태민 목사로부터 언니를 구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신 것으로 아는데요.

“제가 지금 와서 썼다 안 썼다 말씀 드릴 상황이 아닙니다.”


-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자매지간 아닙니까? 시간이 흐르면서도 용서되지 않았나요?


충북공동선대위원장 수락으로 자매 불화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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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덕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언니의 휴대전화번호도 모릅니다. 언제부터인가 번호가 바뀌어 직접 통화를 하지 못하고 있어요. 집에 전화 드리면 항상 안 계시고요. 몇 년 전 언니가 제게만 개인 이메일을 가르쳐 주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외부에 알려졌는지 그 이메일로 쓸데없는 글이 보내졌나봐요. 언니는 그나마 제가 알고 있던 이메일을 없앴다고 하더라고요. 둘이 주고받던 소통의 끈이 아예 없어진 거죠. 청첩장이 나오자마자 삼성동 언니 댁에 가져다 드렸는데, 직접 드린 것도 아니고 경비실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아직 못 받으신 것 같아요. 다시 찾아갔는데 일하시는 분이 집에 안 계시다고 번번이 돌려보내는 바람에 최근 언니 얼굴조차 못 봤어요.”<<계속>>

박미숙 기자 [planet88@joongang.co.kr]


추석이나 설에도 이들 3남매가 모두 모이는 일은 드물다. 박 전 대표는 미니홈피에 2005년 9월 동생 지만 회장의 득남 소식에 기뻐하며 조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근령 씨와는 왕래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15일 육영수 여사 34주기 추모식 때 근혜·근령 자매가 모처럼 정답게 웃는 사진이 언론에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지난번 어머님 추모식 때 자매 간에 다정하게 웃던 모습이 공개됐는데 공식적인 자리가 끝나면 따로 만나시나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공식적인 자리 외에 집에서 안 만난 지 오래 됐어요.”


- 동생 박지만 회장이 득남했을 때 조카를 보러 가셨을 텐데요?

“언니와 제가 따로 갔기 때문에 마주칠 일이 없었습니다.”


- 박 전 대표의 조카 사랑이 각별하신 것 같더라고요.

“조카와 잘 지내고 싶어도…. 그 말 못하는 마음을 구구절절 어떻게 말로 다하겠습니까?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는 손주를 한번 안아보시지도 못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 자꾸 눈물이 나서요. (침묵) 저도 마찬가지인데 언니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2006년 12월 근령 씨와 신 교수의 약혼 사실이 알려지자 박 전 대표는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지만 회장도 “누나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둘의 결혼은 가족들의 반대로 약혼 발표 후 1년이 넘도록 진행되지 못했다. 박 전 대표의 측근은 “박 전 대표는 한동안 ‘부모 자식도 못 말리는 사랑을 형제가 어떻게 하겠느냐’며 잠시 받아들일 생각도 했었다”고 말했다.


이혼 후 혼자 된 동생이 누구를 만나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면 언니로서 마음이 편하지 않겠느냐는 것. 자매 간 화해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던 그 즈음. 다시 둘 사이의 불화를 심화하는 결정적 사건이 벌어진다. 지난 4월 총선 때 근령 씨가 오장세 위원장과 함께 한나라당의 충북공동선대위원장으로 나선 것. 대선 후 친(親)박근혜계를 챙기지 않았던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대립구도는 조조와 유비의 적벽대전에 비견될 정도였다. 이런 마당에 치러진 4월 총선에서 친동생이 언니에게 칼날을 세운 격이었다.


- 언니를 그렇게 위하면서 지난 총선 때 한나라당 충북공동선대위원장에는 왜 나선 것입니까?

“그걸 나쁘게 보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그때 언니에게 사전에 말씀 드리려고 연락했는데 답이 없으셨어요. 언니도 어차피 한나라당을 위해 뛰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동생 입장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드리고 싶었어요. 선거 때 미국에서도 가족이 다 나섰잖아요? 한나라당에서 제게 제안이 들어왔던 것이고, 언니도 결국 한나라당이 잘되기를 바라실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과반의석 확보에 성공하며 거대야당으로 거듭난 한나라당이 충북에서 완패한 것. 8개 선거구 가운데 통합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은 제천-단양 한 곳에서만 승리한 초라한 성적표를 기록했다. 한나라당이 선택한 ‘근령 카드’가 박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꼼수’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일부 한나라당 친박 후보들은 근령 씨의 지원유세를 거부하기도 했다.


당시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충북지부가 근령 씨의 사퇴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서면서 오히려 충북에서 만만찮은 세를 유지하고 있던 박 전 대표 지지층 이탈을 가속화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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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도 대답없는 언니 박근혜”


“친박근혜니, 친이명박이니 한나라당 경선 내내 이런 말이 돌았잖아요? 제가 언니 마음을 대신한다는 것은 외람되지만…. 일단 경선이 끝난 후 언니는 아름답게 승복했다고 믿었습니다. 일단 경선을 거쳐 한 사람이 당선됐다면 당을 위하는 길로 나가야 하는 거죠. 결국 총선이 끝난 후 친박계 인사들도 당에 합류하지 않았습니까? 한나라당은 총선 때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저희 외가인 충북에 저를 앉혔던 것 아닙니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저는 지금도 잘못했다고 보지 않아요.”


근령 씨는 주변의 평가가 어떻든 언니가 속한 한나라당을 돕는 순수한 마음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한나라당 경선 때 외국을 오가는 박 전 대표를 마중하러 인천공항에 꽃다발을 들고 나가기도 했다. 언니에 대한 애정의 제스처를 보였지만 언니 박근혜는 수년째 대답이 없다. 언니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얼마 전 아시는 분이 언니가 나오신 모임에 동석했는데 아마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저와 관련한 안 좋은 말을 꺼내셨나 봐요. 그런데 언니가 ‘동생 얘기는 그만하시지요’라고 하셨대요. 남들이 자꾸 언니와 저의 불화, 앙금이라는 말씀을 하는데 듣기 안 좋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한데 우리가 다툴 일이 없지 않습니까? 주변 분들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오래전 언니가 어느 글을 통해 ‘천륜’(天倫)이라는 말을 쓰셨어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언니의 표현이 이해되더라고요. 자매 간의 정은 누구도 끊지 못합니다.”


박 전 대표에게 근령 씨가 믿는 ‘천륜’의 정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지난해 7월 펴낸 박 전 대표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는 동생 근령 씨에 대한 애틋함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근영이는(근령 씨는 이름을 세 번 바꿨다. 근영→서영→근령) 예술감각이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심미안이 있었다. 나는 첫째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을 느끼면서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자랐지만, 근영이는 좀더 창조적인 아이였고, 그만큼 자유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이런 성격 때문에 근영이는 제약과 통제가 따르는 청와대생활을 3남매 중 가장 많이 답답해 했던 것 같다.”


이 책에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때 맏이로서 지켜본 동생 근령에 대한 당시 심정도 묘사됐다. “근영이의 눈에서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겉으로는 야무지고 강단있어 보여도 마음이 여리고 섬세한 아이였다. 나는 가만히 동생들을 끌어안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우리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나는 동생들을 품에 힘주어 안았다.”


“[TV문학관] 보며 훌쩍거리며 울던 근혜 언니”


박 전 대표는 자서전에 근령 씨를 ‘여리고 감성적인 아이’ ‘예술감각이 뛰어난 창조적인 아이’로 표현했다. 동생이 보는 언니 박근혜가 궁금했다.<<계속>>



(위)어머니 육영수 여사는 생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청와대 생활 그만 접고 시골로 내려가 가족끼리 살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아래) 2004년 12월14일 동생 박지만 씨의 결혼식에 참석한 근령(왼쪽에서 둘째) 씨와 박근혜 전 대표(왼쪽에서 셋째).

- 언니에 대한 동생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한참을 뜸들이다) 저를 테스트하시는 것 같아요. 언니가 어떤 분이라는 것은 이미 평가받지 않았습니까? 제가 표현이 부족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미 세인들에게 알려진 대로 언니는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분이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언니의 대담함과 침착성에 놀랐습니다. 항상 개인보다 공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언니는 어떠한 시련이 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언니는 2006년 5·31 지방선거 때 백주에 테러를 당했을 때도 그렇게 침착했고…. 그때 어찌나 놀랐던지….”(울먹임)


- 박근혜 전 대표의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침착성은 때로는 ‘얼음공주’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건 모르는 말씀이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차가워도 속으로는 한없이 따뜻한 분이에요. 예전에 언니와 같이 살 때 언니는 이나 <전원일기> 같은 드라마를 보다 좀 슬픈 장면이 나오면 아예 휴지를 옆에 가져다 놓고 훌쩍훌쩍 울면서 보셨어요.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언니는 직선, 나는 곡선이라고 말들 했지만 언니의 내면에는 따뜻한 감성이 흐르고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외국에 간다고 하면 여행가방을 쌀 때 옆에서 어머니처럼 이것저것 챙겨 주시고 세세하게 마음을 써 주셨죠. 언니는 22세 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런 세세한 마음을 나타낼 여유가 없었던 거예요.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강인해지는 훈련을 한 거죠. 예전에 같이 TV를 보다 미국이나 일본사람들이 큰 사고를 당하고도 한국사람들처럼 대성통곡하지 않는 장면을 좋게 평가했어요. 슬퍼도 상대에게 폐가 되지 않게 울고, 남 앞에서는 자제하는 훈련을 하신 거죠. 당신은 혼자 방문을 닫아걸고 대성통곡하더라도 말이죠.”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1974년 8월15일 박 전 대표는 프랑스 유학 중이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미니홈피에는 당시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깊숙이 묻어나 있다. “비행기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도, 닦을 생각도 못하고 계속 울고 또 울고…. 아마도 내가 흘린 눈물이 내 생애에 전부 흘린 눈물을 다 흘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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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박근령·신동욱 부부.

“초등학교 시절 항상 시녀 역할 해”


평소 자기절제를 해왔던 박 전 대표도 어머니의 청천벽력같은 비보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근령 씨는 “어머니 만날 날짜만 기다리던 언니에게 그 비보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언니는 프랑스 유학도 대통령 딸이라는 것으로 괜스레 폐를 끼치게 될까봐 파리로 가지 않고 조용한 시골을 택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니로부터 온 편지를 읽는 것이 낙이셨죠. 언니의 편지가 오면 아버지는 층계를 두 계단씩 뛰어 올라가고는 하셨는데…. 아버지는 항상 ‘근영아 읽어봐라’ 하셨죠. 한참 읽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찾으면 눈물을 닦고 오시고는 했어요. 어머니를 만날 날을 너무 기다리던 와중에 언니가 그런 일을 당하다 보니까 언니가 걱정되더라고요. 언니는 우리의 우려와 달리 어머니 영결식에서도 역시 침착하게 대응하셨죠. 아마 가슴은 시커멓게 타 들어갔을 것입니다.”


- 너무 언니 칭찬 일색이어서…. 그래도 동생으로서 남들이 모르는 언니의 단점이 있을 텐데요.

“죄송해요. 단점을 못 찾겠어요. 언니는 어릴 때부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분을 대할 때도 항상 똑같이 친절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감정의 굴곡이 심한 편이었지만 언니는 어릴 때부터 항상 모범생이었죠. 그래서 저는 부모님께 꾸중도 많이 들었어요.” (웃음)




박 전 대표와 두 살 터울인 근령 씨는 1954년 6월30일생이다. 언니 박근혜가 내성적이고 차분하고 엄숙한 것에 반해 근령 씨는 자유분방하고 활달하며 깐깐한 성격이었다. 그는 장충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 청와대로 들어가면서 이듬해 청운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했다. 그리고 광화문에 있는 경기여중·고를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생일이라고 용돈을 주었는데 장난감 북을 사들고 올 정도로 악기와 음악을 좋아했다. 중학교 때도 한번 들은 음악을 피아노에 옮겨 칠 정도로 음악적 감각을 인정받은 그는 결국 재능을 살려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들어갔다. 박 전 대표는 어머니에게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지만 근령 씨는 매를 맞으면서 컸다.


청와대 시절부터 자유분방함과 소탈함을 보여주는 근령 씨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근령 씨는 대학 시절 한여름에 청와대의 사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아침이슬>을 피아노로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당시 <아침이슬>은 금지곡이었다. “어머니가 뛰어나오면서 그러시더라고요. 가사에서 ‘묘지’를 ‘대지’로 바꿔 부르라고요.(웃음) 저는 그때 그 곡이 금지곡인 줄도 몰랐어요.”


근령 씨는 3남매 중 경호원들의 간섭을 가장 싫어했다. 가끔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닐 때 경호원들을 따돌리기 위해 앞문으로 탔다 몰래 뒤로 내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의 한 초등학교 동창은 “초등학교 시절 근령이와 공주놀이를 하면 자기는 시녀 역할을 하고 나를 공주 시켰다”고 회상했다.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해 사진을 찍어도 정면보다 측면, 앞보다 뒤에 섰던 근령 씨. 20대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언니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정치를 하고 싶었던 생각은 없었을까? 더구나 일부에서 국가 재건의 영웅으로까지 추대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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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13일 여의도에서 열린 근령 씨와 신동욱 교수(오른쪽)의 결혼식에 언니 박근혜 전 대표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 언니처럼 정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요?

“저는 언니처럼 정치가 적성에 맞는 것 같지 않습니다. 충북공동선대위원장도 부모님을 좋아하시는 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나온 것이지 어디 제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나온 것인가요? 저 혼자 힘으로는 너무 부족하고요. 다만 누군가 옆에서 도와준다면 아예 마다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치를 한다면 언니처럼 하고 싶습니다.”


근령 씨는 언니 옆에 젊고 유능한 참모진이 많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언니의 주변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언니가 가지고 있는 저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특정인을 말씀 드리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고요. 물론 연세가 있으신 참모진의 연륜은 무시하지 못하지만, 이제 언니 옆에 혈기가 있는 젊은 분들이 앞장서서 소프트웨어든 하드웨어든 좀 미래 전략적 부분을 도와드릴 사람이 필요하다고 봐요.”


대통령학 전문가인 최진 한국리더십연구소장은 오랫동안 박정희 대통령 일가에 대해 연구해 왔다. 그는 근혜와 근령 두 자매는 무의식적인 ‘자매 콤플렉스’가 있다고 분석했다. 언니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근령 씨에게는 언니를 정복하거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언니를 따라잡으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언니 박 전 대표에게도 동생에 대한 열등감이 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좀 억지스러운 주장이지만 사람들은 박 전 대표에게서 육영수 여사를, 근령 씨의 모습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실내에서도 잘 벗지 않는 선글라스, 절제된 행동, 완벽주의 등은 박 전 대표보다 오히려 근령 씨 쪽이 아버지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박 전 대표는 근령 씨가 비록 동생이어도 함부로 야단치지도 못한다. 아버지를 빼닮은 동생을 무의식적으로 경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측근들이 회상하는 박 대통령은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잘 벗지 않았고, 식사할 때 숟가락과 젓가락이 조금이라도 비뚤어져 놓여 있는 것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최 소장의 분석대로 근령 씨는 세 번의 인터뷰 내내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였다. 밖에서 식사할 때는 건강을 이유로 따로 현미밥을 싸서 다닐 정도로 자기관리에도 철저했다. 차는 커피 대신 냉녹차나 사과주스만 주문했다. <<계속 연재됩니다>>


박미숙 기자 [splanet88@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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