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박정희와 10월유신
- “청와대 시절 접고 시골 내려가 살 궁리했었다”
‘독재자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 사후 세인들의 이런 평가에 자녀들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짐작이 간다. 박 전 대표는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청와대를 나온 이후 정권 차원의 아버지에 대한 매도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 3남매는 부모님의 기일을 포함한 어떤 공식적인 행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6년 동안 아버지의 추도식을 공개적으로 치를 수 없어 집에서 조용히 동생들과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가는 현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근령 씨는 언니가 지인들의 변모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돼 언니가 집에 오더니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오늘 모씨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인사하니까 얼굴을 돌리더라’고요. 언니는 당시 식탁 앞에서 아버지의 업적을 비방하는 기사를 보면 마음이 상해 수저를 들지 않고 방에 들어가 한참을 있다 나왔어요.”
“조국 근대화는 아버지 신념·집념의 산물”
박 전 대표는 자서전에서 “국익 최우선이라는 아버지의 정치신념은 확고했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국민을 안정시키는 일에 당신의 전 생을 걸고 계셨다”고 표현했다. 둘째딸 근령 씨에게 정치인 아버지 박정희는 어떻게 평가될까?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그에게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용기 있는 평가를 기대해 봄직했다.
-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분분합니다.
“아버지는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되기만 바라신 분이었어요. 심지어 영화를 보실 때도 스토리뿐만 아니라 그 영화 속의 배경이 된 도시의 모습, 지하철·육교·도로망·건물·상가까지 유심히 보신 후 우리에게 말씀하셨죠. ‘언제 우리나라도 저렇게 될까’라고요. 세상을 떠나시던 그날까지 경제선진국이 되기를 자나깨나 바라며 사신 분입니다. 아버지와 방학 동안 가끔 차를 같이 타고 고속도로를 지날 때면 주택이 개량돼가는 농촌의 모습을 가리키며 흐뭇해 하시고, 우리도 곧 선진국 농촌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보이셨어요.”
- ‘3선개헌’까지는 이해해도 ‘10월유신’은 과욕이었다는 평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납니다. 유신은 우리나라에서만 한 것이 아니에요. 일본도 메이지(明治)유신을 했습니다. 결국 국가의 공권력이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한강의 기적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중국이 그렇게 빨리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국가 통제권이 살아있는 사회주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요? 우리나라의 대다수 국민은 5,000년간 헐벗고 가난했잖아요? 설상가상으로 6·25를 겪으면서 전쟁의 폐허 속에 국가경제가 거의 미국의 원조에만 의존하다시피 했던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1인당 국민소득은 당시 필리핀보다 훨씬 낮은 두 자리 숫자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1960년대 초 제조업체를 시찰하시면서 성냥개비 하나도 제대로 만들 수 없는 우리나라 경제 실정을 개탄하시며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도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갖고 국민 모두 총화단결해 전국의 새마을운동을 성공시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것 아닙니까?”
그의 아버지에 대한 절대 신봉은 언니 박근혜를 능가했다.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지금도 저개발국, 개발도상국 등에서 이 기간에 있었던 고도성장 경제발전 모델을 배우기 위해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2차대전 이후 210개국 나라 중에서 경제성장률 1위를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자나깨나 국가 발전과 조국 근대화만 생각하셨던 아버지의 신념과 집념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국민이 아버지의 이런 모습과 애국심을 의심하지 않고 국민적 화합에 협조와 협력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 아버님의 신념을 십분 이해합니다만 집권기간을 좀 줄였다면 가족의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을 법한데요.
“(잠시 침묵하다) 가족 입장에서는 그렇죠. 어머니도 항상 그러셨어요. 청와대 생활 그만 접고 시골에 내려가 우리 가족끼리 조용히 살고 싶다고요.” 이에 대해서는 박 전 대표도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아버지는 서서히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고 계셨다. 한번은 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채 1년도 안 된 때였는데, ‘차기 대통령으로는 누가 적합할까’ 하고 물으신 적이 있다. (중략) 아버지는 혼란 없는 정권 이양을 위해 구체적인 준비를 하고 계셨다. 퇴임 후 남쪽으로 낙향해 독서와 글쓰기에 전념해 평화로운 말년을 보내고 싶다는 말씀도 여러 차례 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결단을 내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아버지와 근혜 언니의 공통점은 뭡니까?
“사(私)보다 공(公)을 먼저 생각하는 점이죠. 개인보다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할 정도로 사사로운 감정이나 일은 내세우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들한테는 오해를 살 정도로 섭섭한 점도 있었죠.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 친구들은 가끔 걸스카우트 같은 단체 활동을 통해 외국에도 다녀오고는 했는데, 두 분은 저희에게 외국에 나가보라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당시에는 시골에서 소 팔고 논 팔아 서울에 와서 유학시험을 보고도 외국을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너희도 대학이나 졸업하면 그때 갈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하시면서 자꾸 미루셨어요. 아마 언니도 대학을 1등으로 졸업하지 않았으면 ‘어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너뿐이냐’ 하시며 또 미루셨을 거예요. 해야 할 말은 꼭 하되 말의 절제력에서 두 분은 똑같았죠. 두 분이 강아지를 좋아하셨다는 것과 운동을 좋아하셨다는 것도 공통점이군요.”(웃음)
- 두 분이 달랐던 점은 무엇인가요?
“언니는 언어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셨지만 아버지는 영어를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외국어 공부가 내 적성에 안 맞아’ 하시며 우리한테 영어를 열심히 배우라고 하시면서도 당신은 영어공부를 포기하셨죠. 아버지는 서부활극 같은 액션물을 좋아하셨고, 언니는 학창시절 책을 많이 좋아했던 문학소녀였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영화화한 작품을 좋아했어요.”
- 아버지는 언니와 근령 씨를 어떻게 대하셨나요?
“마음 속으로는 언니를 더 아끼셨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부모 된 입장에서 교육상 그렇게 내색하지는 않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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