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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傭兵)을 쓰는 세계 9위 군사대국

화이트보스 2008. 10. 23. 15:53

용병(傭兵)을 쓰는 세계 9위 군사대국
조정훈·사회부 차장 대우 donju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조정훈·사회부 차장 대우
지난 4월 28일 아프리카 북동부 소말리아 인근 해역인 아덴만. 호주에서 네덜란드로 철광석 20만t을 싣고 가던 H해운 소속 화물선 주변에 소형 쾌속정이 다가왔다. 악명 높은 소말리아 해적이었다.

해적들은 RPG(로켓추진수류탄) 1발을 배 바로 옆에 쏘며 위협했다. "정지하라"는 신호였다. 선장은 멈추지 않고 항해를 계속했다. 해적들은 이번엔 선장이 배를 지휘하는 곳인 선교(船橋)에 RPG를 발사했다. 철판에 큰 구멍이 뚫렸다. 다행히 배의 높이가 높아 해적들이 배에 오르는 데는 실패했고, 화물선은 납치라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다. 동원호, 마부노 1·2호에 이어 세 번째로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되는 한국 선박이 될 뻔했다.

해적의 위협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H해운은 영국의 경호 전문 업체에 의뢰해 외국 용병(傭兵)을 고용하기로 했다. 지난 6월 1일 호주 글래드스톤을 떠나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석탄 15만t을 싣고 가던 운반선에 처음으로 영국인 경호전문가 4명이 동승했다. 아덴만 해역을 빠져나가는 일주일 동안 지켜주는 데 9만 달러였다. 하지만 부대 비용 등을 포함하면 20만 달러 정도가 들었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용병들은 '영화처럼' 총이나 수류탄으로 무장을 하지 않았다. 살상용 무기를 휴대하고 승선할 경우 외교통상부에 신고해야 할 뿐 아니라 입항과 출항 때 신고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음파(音波)를 쏴서 상대를 퇴치하는 장비인 MAD(Magnetic Acoustic Device)가 유일한 무기였다.

하지만 영국인이 배에 탔다는 것만으로도 해적 접근 예방 효과는 충분했다. 아덴만에 파견된 영국 군함이 자국 국민이 안전한 지역까지 빠져나갈 때까지 '보호' 시스템을 가동하기 때문이다. H해운 관계자는 "적어도 용병을 고용했던 4차례 항해는 해적들의 공격 자체가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승승장구하던 해운업계는 최근 불황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곡물이나 광물을 실어 나르는 화물선인 벌크선의 시황을 보여주는 BDI(발틱운임지수)는 20일 1355포인트로 추락했다. 올해 최고점(5월·1만1793포인트) 대비 89% 정도 빠진 것으로, 2002년 10월 이후 6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결국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할 상황에 몰린 해운업계는 '용병 공동 구매'라는 전례 없는 자구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불황에 휘청거리면서도 용병을 고용하는 것은 해적에 납치될 경우 피해가 워낙 막대하기 때문이다. 선박가격만 보통 1억 달러, 또 선원들의 몸값으로 해적들에게 보통 300만 달러 안팎의 돈을 건네야 한다. 해적에 의한 피해는 보험 적용도 되지 않는다. 어지간한 중소업체의 경우 배가 해적들에게 납치되면 곧바로 도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세계 각국은 소말리아 해적 피해를 입은 자국 선박들을 위해 신속한 대응을 하고 있다. 이미 21개국 군함들이 소말리아 해역에서 활동 중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계속 "검토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달 말쯤 합동실사단을 소말리아 해역에 파견한 뒤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함정 파견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는 동안 국민들은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외국 용병'을 고용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미CIA의 '2007세계군사력보고서'에서 세계 9위의 군사대국으로 평가받은 한국의 이상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