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새벽 하얼빈, 만 30세의 안중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의 하얼빈역 북쪽 썬린가(森林街) 34호에 있던 동포 김성백(金成白)의 집에서였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오늘 저로 하여금 2000만 동포의 원수를 처단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검은색 모직 신사복 위에 반코트를 걸치고 납작한 모자를 쓴 안중근은 브라우닝 8연발 권총을 꺼내 손수건으로 닦은 뒤 오른쪽 속주머니에 넣었다.
오전 7시, 안중근은 마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러시아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지만, 그는 일본인 환영객 사이에 끼어 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중근은 플랫폼이 잘 보이는 역 구내 찻집에 들어가 차를 시켜 마셨다. 대륙을 침략할 야욕을 품었던 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그곳으로 오고 있었다. 참으로 기나긴 두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토가 열차 쪽으로 되돌아올 때, 안중근은 찻집을 뛰쳐나와 플랫폼으로 나섰다. 러시아 의장대 뒤로 바짝 붙어 선 그의 앞으로 이토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눈앞을 2~3보 지나쳤을 때 안중근과 이토의 거리는 10보 정도였다. 그 순간, 안중근은 권총을 뽑아 들고 사격했다. 일곱 발의 총성이 울렸다.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 총을 내던진 안중근은 큰 소리로 세 번 외쳤다.
"코레아 우라(러시아어로 '한국 만세'의 뜻)!"
안중근은 달려드는 러시아 헌병에게 포박됐다. 이토는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내장 부위의 출혈로 30분 뒤 숨졌다. 11시40분, 특별열차는 이토의 시체를 싣고 떠났다. 역 구내 헌병대 파출소에서 취조 받은 안중근은 오후 9시쯤 쇠사슬로 묶인 채 지금의 화위안가(花園街) 97호에 있던 일본 총영사관으로 이송돼 지하실 감옥 독방에 수감됐다. 그가 뤼순 감옥으로 이송된 것은 11월 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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