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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부터 한반도에 최악의 가뭄 시작된다

화이트보스 2008. 11. 3. 22:17

2012년부터 한반도에 최악의 가뭄 시작된다


나라를 망치게 하는 ‘역사의 폭군(가뭄)’에 우리는 아무 대비책 없어




가뭄으로 국가가 멸망한 예는 많다. 동양의 한나라, 신나라, 당나라, 발해, 명나라 등은 가뭄이 한 원인이 되어 멸망했다. 남미의 마야 문명의 멸망도 가뭄 때문이었다.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기록이 명확하지 않을 뿐 유사한 사례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뭄은 흔히 ‘역사의 暴君(폭군)’ 이라고도 불렀다.

기원전 1850년 이집트의 힉소스 왕조는 7년 풍년 후의 7년 가뭄을 예측하고 이에 대비한 덕에 초강대국이 됐다. 반면에 가뭄에 대비하지 못한 이스라엘 국민은 모세가 60만명의 동족을 데리고 出(출)에 굽하기까지 430년간 이집트에 종살이를 해야 했다.

가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폭군’이다. 20세기에 지구촌의 100대 자연재해 중에 가뭄이 전체 재해의 25%를 차지한다. 가뭄으로 인한 사망자도 1000만명을 넘었다. 가뭄이 주원인인 기근, 기아 등을 포함하면 전체 재해 비율의 거의 50%에 달한다.

2008년 9월 현재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는 사상 최저수위를 기록하여 이스라엘 정부가 초긴장 상태다. 호주는 100년만의 가뭄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란, 에티오피아, 칠레, 중국(랴오닝성), 스페인 등도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다. 21세기에도 가뭄의 폭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역사에 기록된 우리의 가뭄


가뭄은 대한민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자식을 먹었다느니(1278년), 인구의 절반이 죽었다느니(1360년), 서로 잡아먹었다느니(108년,499년,1361년), 버려진 아이들이 길에 가득했다느니(1381년) 등등의 참혹한 기록은 모두 우리의 역사에 기록된 가뭄 관련 내용이다.

<삼국사기><고려사><증보문헌비고><조선고대관측보고><조선왕조실록>(이하<실록>이라 함), <일성록> 등에는 가뭄이 旱(한), 大旱(대한), 無雨(무우), 한발, 소우 등의 여러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饑饉(기근), 기아, 흉년 등의 재해도 가뭄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1392년부터 1909년까지 <실록>에 기록된 가뭄, 한발, 한해, 한재란 단어를 모두 합치면 약5100건에 이른다. 가뭄이 주원인인 기근, 기아, 흉년은 7700여건에 이르러 다른 어떤 재해보다 피해가 심했다.

더구나 1882년부터 1910년까지 이어진 29년 간의 가뭄은 대한제국의 멸망과 연관이 있다. 고려의 멸망도 가뭄과 무관하지 않다. <고려사>와<증보문헌비고>에서 가뭄이 발생한 해는 395년 동안 127회(32%)에 이르는데, 고려 멸망이 가까운 1376년부터 1392년까지 17년 동안은 10회(59%)나 됐다. 특히 1376년부터 1383년까지 8년 중 7년이 가물었다. 우리나라의 국가흥망도 직간접으로 가뭄과 연결되어 있었으니, 外侵(외침)보다 더 뭐운 것이 바로 가뭄이었다.


이런 역사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가뭄 대비태세는 대단히 빈약하다. 호우, 태풍 등등 다른 재해들은 경보, 주의보, 예비특보 등의 감시체제가 있지만, 가뭄은 아직 경보도 예비특보도 하지 못한다.

다른 재해들은 거의 매년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는 활동과 연구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가뭄은 사정이 다르다. 가뭄은 짧으면 6년, 길면 124년마다 한번씩 닥치는 재해다. 전문가가 대비 계획을 세우려 해도 그 계획이 세월이 지나서까지 유효할지 의문이고, 유효하다 해도 미래에 본인이 같은 위치에서 일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연구도 대비도 어려웠던 것이다.

가뭄 대비책을 세우기 어려운 이유가 몇 가지 더 있다. 가뭄의 대비는 개인과 기업차원에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정부만이 가능하다. 중국의 堯(요) . 舜(순)임금과 우리의 세종대왕 같은 聖君(성군)들은 가뭄대비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보통의 집권자들은 외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류는 근대 기상 관측치를 기껏 100여년 정도만 보유하고 있는데, 가뭄은 그보다 긴 역사를 한 주기로 하여 明滅(명멸)하기 때문에 아직 인류의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대한민국이 현대화된 이후 가뭄과 연관된 경험이 아주 빈약하다는 데에 있다. 특히 서울은 1952년 이후, 1982년에 잠시 부분적 斷水(단수)가 있었을 뿐 57년간 큰 가뭄이 발생하지 않은 행운의 시대를 누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의 가뭄에 대한 인식은 바닥수준이고, 대비대세는 취약할 대로 취약한 상태다.

이제 이 행운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위험이 시작될 조짐이 발견됐다.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가뭄은 124년,38년,12년,6년 등의 간격으로 발생했다.

이 가뭄 간격은 지금까지는 서로 엇갈리며 다른 해에 나타났지만, 이제 이 네 개의 가뭄주기가 한꺼번에 닥치고 있음이 발견된 것이다. 한마디로 가뭄이란 ‘폭군’이 떼지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의 보통 가뭄들과는 달리 현재의 가뭄은 ‘신무기’들로 무장까지 했다. 제1 신무기는 ‘지구 온난화’다. 기온이 높을수록 수분 증발이 증가하니. 땅은 더욱 메마르게 될 것이고, 가뭄은 덩구 심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는 반론도 있다.

온난화가 심해지면 강수량이 증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온난화를 관측한 여러 수치 모델들은 두 이론을 종합한 최종 결론을 제시했다. 지구완난화는 한반도에 약한 가뭄은 약하게, 강한 가뭄은 더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위험은 더 심해진다는 말이다.

제2의 신무기는 ‘물 수요의 급증’이다.

물 수요는 20년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지구는 이미 이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한계에 도달했다.

그래서 미래에는 물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 명백하며, 물로 인한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질 것이다. 대한민국도 통일 후에는 중국 및 러시아와 국경선에서 물싸움을 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3의 신무기는 ‘수질의 오염’이다. 시대는 지금 ‘물이라고 다 물인 것은 아닌’ 시대로 돌진하고 있다. 오염 정도에 따라 물의 용도가 세분되므로 물을 옆에 두고도 물이 없다고 탄식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특히 이웃나라 중국의 오염은 어디까지 갈지 가늠하기 힘들다.




124년 간격의 ‘極大가뭄’ 2012년부터


1777년 測雨(측우)가 시작된 이후, 서울의 최고 가뭄은 1901년이었는데 이해 年(연) 강수량이 373.6mm에 불과했다. 최근의 연평균 강수량(1976~2005) 1384.7mm의 27% 정도다. 이 가움은 1882년부터 29년간 지속됐고, 종료되던 1910년에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당시(1901년 9월29일, 양력) 고종황제는 “추수가 끝나기도 전인데 백성들이 굶주림을 당할 걱정으로 떠도는 참상은 더없이 참혹하다”고 걱정했다.

두 번째 심한 가뭄은 1777년으로 강우량은 430mm였다. 이해부터 강우량의 관측을 다시 시작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아, 직전에도 크게 가물었을 것이나 기록을 찾지 못했다. 5월3일(음력), 정조는 “八道(팔도)가 같은데, 보리는 이미 절딴이 났고, 벼도 또한 시기를 어긴 상태에서 夏至(하지)가 멀지 않았으니 가을 수확을 알 수 있다” 했다.

124년 간격으로 발생한 이 두 가뭄은 피해가 엄청나게 컸으므로 이하 ‘極大(극대)가뭄’ 이라 gkh자 한다. 그런데 실록에 1777년 이전에도 124년씩 거슬러 올라가는 해에는 큰 가뭄이 발생한 것이 발견된다. 당시의 강수량 기록은 없으므로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관련 용어인 ‘가뭄’과 ‘기우제’란 용어의 사용빈도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조사했다.

‘기우제’는 주로 봄과 여름의 농사철에 사용되었지만, ‘가뭄’은 가을과 겨울에도 물 부족이 염려되면 사용됐다. 이 용어들의 사용횟수가 많을수록 가뭄이 강했다고 추측되며, 기우제란 단어의 사용횟수는 기우제 시행횟수와 거의 비례했다.

1777년(정조 1년,18,23)에서 124년 간격으로, 1653년‐¹(효종 2년,24,9),1529년(중종 24년,39,5), 1405년(태종5년,15,4)이다. 여기서 괄호 안의 숫자는 ‘가뭄’ ‘기우제’란 단어의 사용횟수를 순서대로 나타낸 것이다(1653년‐¹은 한 해 앞선 1652년에 가뭄의 중심이 발생했음을 의미).

조선왕조 518년(1392~1909) 동안 이 두 단어 사용횟수의 평균값은 각각 ‘6.3’ ‘2.9’ 회인데, 위에 언급한 5개 연도 모두에서 이 두 단어 사용횟수가 전체 평균 값보다 높게 나타나고, 5개 연도의 평균값(23.8,10.3)도 전체 평균보다 월등하게 높다.

고려시대인 1281년은 1279년부터 시작된 12년의 가뭄 기간에 속한다. 즉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281년 이후 조선말까지 6번 연속 124년 간격으로 극대가뭄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57년과 1033년은 ‘큰 가뭄’ 이라고 할 흔적이 확실하지 않다). ‘태종우’란 말이 생긴 것도, 효종이 필생의 과업으로 추진하던 북벌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 극대가뭄 발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극대가뭄들은 거의 정확하게 124년 간격을 유지했다. 왜 124년의 간격을 가지는지에 대해 관심을 보인 연구는 아직 국내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124년의 간격이 정확하게 지켜지는 것을 볼 때 기상학적 문제가 아닌 천문학적 문제일 수 있으며, 따라서 7번째 극대가뭄도 같은 간격으로 발생할지도 모른다.

1777년에 중심을 둔 극대가뭄은 1771년에 시작되어 13년 지속됐고, 1901년에 중심을 둔 극대가뭄은 1882년에 시작하여 29년간 지속됐다. 즉, 시작연도는 111년의 간격을 가지고, 중심연도는 124년의 간격을 가졌으니, 다음 극대가뭄은-직전 상황이 반복된다고 가정함-2012년에 시작하여 2025년에 중심이 될 것이다.

약간의 변화가 생겨 시작이 더 빨라지거나 늦어질 수도 있고, 강도가 더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도 있겠지만, 중심이 2025년인 것은 크게 변화가 없을 것이다. 6번 반복되는 동안 그랬기 때문이다.


38년 간격의 ‘대가뭄’은 2013년부터


극대가뭄 외에 다른 가뭄 간격도 발견됐다. 1901년의 극대가뭄 이후 가장 가뭄이 심했던 해는 38년 후인 1939년 이었다. 그런데 다시 38년 후인 1977년에도 심한 가뭄이 발생했다. 두 가뭄은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그리고 1976년부터 1978년까지 각각 3년씩 이어졌다(이하 38년의 간격은 ‘대가뭄’ 이라 호칭).

1977년의 대가뭄은 1974년 이후 전국으로 확산된 기상 관측망 덕분에 서울에서 발생한 가뭄이 아닌데도 포착됐다. 1976년은 충북, 1977년은 전북과 경북, 1978년은 서해안이 가뭄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 대가뭄은 1901년 이전에도 있었다. 한개의 파가 아니고 두개의 파였다. 제1파는 1419(15,3), 1458년‐¹(20,9), 1496‐²(46,3), 1534년‐¹(14,2), 1572‐²(5,2), 1610‐¹(21,10), 1648‐¹(13,2), 1686(5,6), 1610‐¹(21,10), 1648‐¹(13,2), 1686(5,6), 1724‐¹(18,6), 1762(7,8), 1800‐¹(12,11), 1838(1,6,-2.16), 1876(14,40,-2.0) 으로 이어지는 13회와 앞서 설명한 3회이다.

각 연도 오른쪽의 작은 숫자는 가뭄 중심이 앞당겨 졌거나 늦어진 연도를 의미한다. 즉 1458년이 주기에 해당되나, 기우제 기록빈도 등으로 봐서 그보다 1년 앞선 1457년에 해당하는 숫자들을 기록한 것이다. 38년의 간격이 반복되는 동안, 간격이 1~2년 가감된 경우가 8번이다. 감해진 경우가 더 많다. 즉, 이 간격은 대체로 잘 지켜진 것이다.

이 13회의 대가뭄에서 가뭄과 기우제 기록빈도의 평균은 각각 14.7회와 8.9회다.

극대가뭄보다는 작은 수이나, 518년 전체의 평균인 6.3,2.9회보다는 월등하게 크니, 38년 간격으로 큰 가뭄이 발생함이 증명 된 것이다(괄호 안의-2.16 등으로 표현된 세 번째 숫자는 서울의 연 최저 가뭄지수 E야, 심한 가뭄이 발생했음이 확인됨).

대가뭄도 극대가뭄처럼 한번 발생하면 수년간 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제1파는 총 16회 반복하는 동안, 간격이 25년으로 작아진 경우 한번(1901년 직전)을 제외하면, 거의 38년 간격이다. 따라서 17번째인 다음 대가뭄의 중심은 2015년이 된다.

대가뭄은 중심 연도보다 1~2년 앞서 발생한 경우가 많았으니, 2013년부터 시작 될 수도 있다. 1974년도 가뭄이었음을 고려하면 2011년부터도 가능하다. 극대가뭄이 시작되는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다.

대가뭄의 제2파는 1982년의 가뭄부터 역으로 38년 간격으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확인된다. 1982년(*,*,-2.14)부터 1944(*,*,-1.88), 1906(1,7), 1868‐¹(6,5), 1830‐²(5,9), 1792+²(14,14), 1754‐¹(12,13), 1716(12,2), 1678(13,12), 1640(10,4), 1602‐¹(6,1), 1564(7,1), 1526‐¹(35,14), 1488‐¹(20,6), 1450‐¹(12,4), 1412‐¹(18,6)로 이어지는 16회이다.

‘*’는 기우제 기록 등이 없음을 의미한다. 대신 가뭄지수(EDI)가 상당히 강한 가뭄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14번의 대가뭄에서 가뭄과 기우제 기록빈도의 평균은 각각 12.2회와 7.0회로, 앞서 소개한 제1파의 강도보다 약하지만, 518년 평균인 6.3과 2.9보다는 여전히 월등하게 크다.

이 제2파의 다음 대가뭄은 2020년으로 계산되는데, 제1파가 지나간 5년 후이니 제1파의 후유증이 가시기 전에 닥치는 가뭄이 된다. 또 극대가뭄에 시간적으로 더 가까우니 가뭄 발생의 가능성도, 위험도 더욱 높다고 볼 수 있다.



12년 간격의 ‘중가뭄’ 2018년에


124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뭄 발생이 38년 간격이 생기는 원인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고, 비슷한 연구도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메톤주기(19년)의 두 배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관심을 끈다. 메톤주기란 태양력과 태양태음력(흔히 음력이라 부름)의 순환이 일치되는 주기를 말한다.

그래서 만19세, 38세 되는 해의 생일은 간혹 하루의 오차가 나기도 하지만, 음력과 양력이 모두 생일이 된다.

해와 달과 지구의 상대적 N이치가 특정위치에 도달하게 되면 한반도에 가뭄이 발생한다는 의미인데, 그것이 매번이 아니고 한 번씩 걸러서 가뭄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의문을 남기고 있다. 38년 간격과는 달리 가끔 19년의 간격도 발견되나, 보이다가 말다가 한다.

1974년 이후는 전국에 약 60개 이상의 우량계 관측치가 유효하므로 광역에 걸친 비교적 정밀한 분석이 가능해졌다.

12년 가뭄 간격은 1982년과 1994년에 장마의 실종과 연관된 강한 가뭄이 발생했다는 사실과, 220년 전인 1789년에 조선의 가뭄은 12년 간격이라는 기록이 실록에 있는 것을 실마리로 하여 조사한 것이다(이하 12년 간격의 中가뭄이라 호칭).

중가뭄의 간격은 앞서 설명한 대가뭄이나 극대가뭄의 간격과는 달리 상당히 복잡하다. 1982년의 가뭄은 장마가 너무 늦게 시작하여 생긴 가뭄이었다.

12년 후인 1994년은 장마가 너무 일찍 종료되어 가뭄이 됐다. 1994년의 12년 후인 2006년은 가뭄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을장마가 실종되면서 이듬해인 2007년 봄에 약간 가뭄이 발생했다.

그 이전인 1970년과 1958년에는 가뭄이 강하지 않았고, 1946년(최소 EDI=2.59)에는 큰 가뭄이 발생했다. 또 1934년, 1922년에도 가뭄의 흔적이 보이지 않다가 1910년(최소 EDI=-1.91)에는 보인다. 즉, 중가뭄은 실종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12년 간격의 축에서 1898년부터 역으로 1394년까지 총 43개 사례를 조사했는데, 가뭄 및 기우제란 용어 사용빈도 평균은 12.8회와 7.6회로, 역시 518년 전체 평균보다 훨씬 높은 값이다. 이때 12년 주기상에서 2년 전 또는 후로 가뭄중심이 변하여 발생한 것이 7번 있었고, 1년 변화를 본인 경우가 26번 있었다.

실제로 12년 간격의 軸(축)상에서 발생한 것으로 계산된 것은 10회에 불과했다.

기간변동이 심하며 제1파, 제2파 등으로 나누어지는 파가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이 간격도 엄연히 존재하므로 다음 중가뭄은 2018년임을 주의해서 봐 두어야 한다. 이도 극대가뭄이 진행되고 있는 기간이다.

이 12년 주기에 대해 해외에서는 태양 흑점주기(약11년)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조사해 보았으나, 둘 사이의 연관성은 발견되지 않았다. 태양활동을 나타내는 인자 중의 하나인 F10.7이 지구대기의 성층권을 교란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 현상이 한반도 상공에서도 발생하는 것이 확인됐지만, 이들이 지구상 또는 한반도 상공의 강수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밝힌 연구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6년 간격의 ‘평가뭄’은 2013년에


1974년 이후 연도별로 가뭄이 발생한 관측소 수를 집계하여 보면 다음 결론에 도달한다. 한국 전역에서 동시에 가뭄이 발생한 경우는 없었으며, 어딘가에서 강한 가뭄이 발생하는 주기는 약6년이다.

이 6년 주기는 특히 최근에 잘 지켜져 왔다. 1976년, 1982년, 1988년, 1994년 그리고 2001년과 2007년이다. 다음 주기는 2013년이다.

따라서 2013년부터는 여러 개의 가뭄 주기가 겹친다. 1974년 이전의 분석에서 이 6년 주기가 잘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관측소 수가 부족하여 충분한 분석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위에 열거한 124년, 38년, 12년, 6년의 간격에 해당하지 않으면서도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가뭄도 적지 않다. 1974년 겨울의 충북, 강원내륙의 가뭄과 1992년 여름의 서해안 가뭄이 그런 종류다. 이런 경우는 발생간격에서마저 다른 가뭄들과 공통성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가뭄의 발생 원인이나 예측방법의 연구에서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인류는 가뭄의 주기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그 방법에서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관측된 자료가 없어 나무의 나이테나, 호수의 퇴적층 두께 등을 이용하여 강수량을 추정하여 사용했다는 점이다. 나이테는 강수량의 영향도 받지만 병충해나 기온의 영향도 받는다. 퇴적층도 강수량 외에 지형변화의 영향도 받으니 모두 정확성이 떨어진다.

두 번째는 진단방법도 문제였다. 가뭄은 가뭄지수로 진단해야 하는데 가뭄지수를 사용하지 않았거나. 사용한 가뭄치 수가 부적절한 경우가 많았다. 세 번째는 스펙트럼 분석 등 과학적인 방법들은 가뭄지수나 강수량의 時系列(시계열) 곡선이 가지는 전체적 특성으로서의 주기를 계산하는 것이고, 가뭄의 발생 간격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닌데 이 점에 착안하여 구별한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연구된 결과들은 너무 각양각색이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12년,38년,124년의 간격과 연관이 있는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많은 연구들이 태양과 달의 활동과 지구상의 가뭄 주기와 관련성이 강하다고 했으나 이를 부정하는 연구도 없지 않다. ENSO(엘니뇨)와의 연관을 주장한 연구도 있고, 이를 부정한 연구도 있었다.


큰 재앙, 이렇게 막아보자


식량이나 공산품과는 달라서 물은 물쓰듯 쓰지 못하면 모르는 곳에 막대한 피해가 쌓인다. 물이 모자라면 먼저 생태계 파괴 등으로 피해가 나타나다가, 다음은 治安(치안)이 흔들리고, 나중에는 개인의 생명을 위협받고, 결국 국가의 안전까지 위태롭게 되는 것이 역사에서 나타나는 수순이다.

지금 다가오는 재앙도 국가의 안전과 연관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보여 이를 막을 만한 短想(단상)을 열거해 본다.

첫째, 가뭄에 대해 호주는 특이한 대응을 한다. 이 나라에는 가뭄이 발생해도 국가가 보상해 주지 않는다는 법이 있다. 재앙에 국민 각자가 직접 대응하도록 유도하여, 국가 전체적으로 피해가 경감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대신 가뭄과 관계된 모든 기상 자료들, 관측 및 분석, 연구 자료들을 국가가 최대한으로 지원한다.

독립된 예보를 발표하는 두 개의 국립 기상청과, 난립한 민간 예보기관들이 모두 서로 정확한 진단과 예보를 내기 위해 경쟁하니, 가뭄의 발생과 발달에 대한 국가적 감시가 저절로 진행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재난지역으로 지정 받아 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해 피해를 일부러 키우거나 상황을 부풀려 보고하기도 하며, 재난보상과 관련한 대규모 시위도 일어나 해마다 피해가 증가한다는 소문이 있다.

둘 때, 수자원 저장 능력의 확대다. 현재 우리나라는 그해 비축된 수자원으로 다음 장마까지 버티는 식으로, 한 해 단위의 수자원 정책이 운용되고 있다. 최근 50년간 큰 가뭄을 겪어 보지 못한 때문에 이어져온 졸속 정책의 결과이니 시급히 수정되어야 한다. 한해 한해 대비하는 방식은 연속 2년 가뭄을 당하면 속수무책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후버뱀이나 중국의 싼샤댐처럼 든든한 생명줄을 가지기 위해 김대중 정권에서 시도했던 동강댐보다 더 큰 댐이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대한제국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는 29년 가뭄이 다시 닥쳐도 국가를 지킬 수자원이 비툭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삼천리 금수강산에 틈 있는 곳은 모두 물저장과 물 생산 장치로 바꾸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지구온난화, 물수요 급증, 그리고 극대가뭄의 위협에 직면한 우리 세대의 의무다.

따라서 전국 대운하 계획은 뱃길이 아니라 물길과 물 관리 차원에서 추진되어야한다. 전국토의 수로를 연결하면서 가뭄과 홍수를 대비할 장치를 추가하면 된다.

캄보디아의 톤레삽 호수가 좋은 예다. 환경적 또는 정치적 이해에 의해 큰 댐과 대수로의 건설을 반대하는 의견이 많은 것도 좋은 일이다. ‘그래서 안 한다’ 가 아니고 ‘그 문제는 이렇게 보완했다’로 대처하면 반대가 많을수록 전화위복이 된다.

대운하 계획에 무조건적인 반대를 해온 세력들은 한글창제를 반대한 사람들, 쇄국정책을 고집한 사람들과 같은 비중의 죄를 역사에 짓고 있는 것이 나닌지 한 번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가오는 가뭄, 기후변화, 그리고 폭발하는 물 수요는 비전문가들이 왈가왈부할 만큼 만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강수량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댐과 水路(수로)에 물을 채우는 것도 쉽지 않다. 홍수가  발생할 때 최대한으로 저장하는 방법이 있고, 지속적으로 인공강우 기술에 투자하여 결과를 기대해 보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둘 다 아직 기대치가 크지 않다. 海水(해수) 담수화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으나 아직 생산비가 경제성을 맞추지 못하고 수질문제를 해결하기는 더욱 어렵다.


얼음물 만들기


얼음동굴이 많은 동유럽에 가뭄이 없다는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물을 얼음으로 저장하면 증발을 막고, 응결을 촉진하여 수자원이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 수면에서 증발로 인한 유실은 연간 약1100mm의 강수량에 해당하는데, 대청댐과 그 유역에서만 계산해도 일년에 4억4000만t에 이른다.

얼음은 日射(일사)나 빗물과 접촉되지 않으면 공기 중의 수증기를 물로 바꾸어 놓는다. 이 경우 얼음 중량의 4%의 수자원이 증가하며, 수질 개선이란 부가적 효과까지 있다. 유명한 ‘에비앙 생수’는 알프스 산속 얼음동굴의 얼음물이다. 세계적 3대 장수촌(파키스탄의 훈자마을, 그루지야의 압하지아, 에콰도르의 빌카밤바)은 모두 얼음 녹은 물를 식수로 이용한다. 소도시인 밀양에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것도 얼음골 등에서 나오는 ‘육각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얼음을 통해 확보된 양질의 물은 가뭄이 아닌 해에는 경제 부흥에도 이용할 수 있다. 바로 이웃한 중국이나 중동의 산유�에 무진장한 생수 시장이 있기 때문에 국제시장을 선점하여 ‘석유보다 비싼 생수’를 ‘생산량이 모자랄 만큼’ 파는 전문적인 생수 생산국으로 발전하면 자손만대 물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다. 실제로 제주의 ‘삼다수’는 이미 생산량을 조절해야 할 정도라고 들었다.

얼음물 만들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겨울에 북향한 협곡이나 동굴에서, 찬 공기 위에서 물을 분사하면 대규모로 언다. 그 위에 일사 및 강수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공기 유통을 억제하면 얼음 상태로 여름을 난다. 동굴이면 이 과정이 저절로 해결된다. 동 유럽의 얼음동굴들, 그리고 미국 뉴멕시코 주의 반데라(북위35도)등이 좋은 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북향 협곡을 이용하면 된다.

끝으로 가뭄 문제는 정부와 국민의 이해와 합의가 요구되고 있는 상황임을 다시 확인한다. 우선 지구 기후의 변화, 물수요 급증, 한계에 도달한 물 공급, 수질의 오염 등등이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가뭄 및 홍수 피해가 심각했던 대한민국 역사에서 극대가뭄과 대가뭄, 중가뭄 등이 중첩되어 다가오는 위협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중 가장 시급한 것은 극대가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가안보와도 직결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