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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회항(回航)

화이트보스 2008. 11. 7. 10:30

 

 

미국의 회항(回航)

 

 

'패권 미국' 앞길의 빨간불로 시장 최우선 주의 철회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국가 수리·보수 기간 가질 것


 금융 위기 이후 미국에선 '미국의 세기는 끝나는가'를 묻고 답을 구하는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런 담론들의 유사한 구성이다. 전반부엔 '서서히 저물고 있거나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미국'을 걱정하지만, '그러나' 하고 시작하는 후반부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을 만만치 않은 미국의 저력이 덧붙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후에 자주 등장하는 사례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금융위기 직후 '진앙지는 미국이다'며 손가락질하고 '미국의 시대는 끝났다'고 조롱하던 이들이 금방 줄줄이 워싱턴에 모여들더라. 처음엔 손가락질이 즐거운 줄만 여기다가 자기 발등에도 큰 불이 떨어진 걸 알고는 불을 끄느라 미국보다 더욱 바쁘게 뛰어다니지 않는가."


"미국 증시가 추락할 동안 다른 나라 증시도 함께 추락하거나 미국보다 더 떨어지더라."



"달러 패권의 시대는 끝났다더니 달러를 못 구해서들 난리이고 미국 재무부 채권은 여전히 가장 안전하고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다."


모두 사실이고 이 시점에서 맞는 말들이다. 그러나 이 맞는 말들을 '그러나'의 앞에 둘 때와 뒤에 둘 때, 그 느낌은 전혀 달라진다. '미국은 여전히 세다. 그러나…' 하는 식으로 담론의 구성이 바뀌면 담론의 내용도 바뀐다. 지금 미국에선 그렇게 바꿔 생각해봐야 할 사례들이 자꾸 생겨난다.


미국은 14일 정부가 부실은행의 주식을 직접 사들이는 '영국식 해법'을 공식 수용했다. 부실 은행을 사실상 국유화(國有化)해버리는 아주 단순한 방안이다. 옛 유럽의 사회주의 냄새가 짙은 '국유화'는 적어도 미국에선 오랜 세월 사문화(死文化)되다시피 한 기피단어이자, 혐오스런 아이디어였다. 이 관(棺) 속의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는 데 지금까지 이렇다 할 저항이 나오지 않았다. 7000억 달러 구제금융안을 공화당 의원들이 주동이 돼 한 차례 부결시켰던 것 같은 파동도 이번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미국의 처지가 다급해졌다는 뜻이다.


7000억 달러 구제금융 결정이 시장 최우선의 미국식 자본주의를 관 속에 집어넣은 조치였다면, 이번 은행 국유화 결정은 그 관에 대못을 박은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관 속에 넣고 미국이 어디로 갈지는 모를 일이다. 분명해진 건 미국이 지금까지 오던 길을 멈추고 회항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국유화 선창과 이를 공동의 나침반으로 받아들인 유럽의 인도 아래 시작한 새로운 항해이다. 이 항해에 함께 손잡고 갈 나라의 범위는 G20으로까지 넓혀 잡아 놓았다. 현찰을 손에 많이 쥔 건 중국(1조8000억 달러) 일본(1조 달러) 러시아(5800억 달러) 같은 나라이고 이들이 미국채를 사주어야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미국은 이번에 세계 최대 빚투성이의 나라임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개인, 은행, 지방정부, 중앙정부 할 것 없이 똑같았다. 이 빚투성이의 나라가 이번 사태로 더 많은 빚을 지게 됐으나 이 빚을 제도적으로 떠받쳐온 금융시스템은 무너졌다.


국유화된 은행, 관치금융 아래 미국은 안으로 상당기간 수리보수 기간을 갖고 거품과 비용을 줄이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미덕은 더 이상 소비가 아니고 저축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이루고, 재정적자,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려면 상당한 고통이 따르겠지만 그쪽으로 향하는 항로를 바꾸긴 힘들다.


밖으로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1960년대 베트남 전쟁 와중에 달러화가 크게 흔들린 경험을 갖고 있다. 당연히 이라크 전비(戰費)가 미국 경제에 주는 부담이 감당할 만한 수준인가 아닌가에 대한 정밀한 재평가를 할 것이다. 그 재평가 작업은 중동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후퇴하는 뒷마당을 차지하려는 EU,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경쟁도 치열해질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미국은 한번 시작한 회항을 되돌리지 못한다.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해도 이런 방향 자체를 바꾸긴 어렵다. 민주당 오바마 후보가 당선되면 지금의 회항에 가속(加速)하려 할 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이 결정하는 건 회항 중인 미국의 방향보다는 속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