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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짝 마른 돈줄에 시름 앓는 기업들

화이트보스 2008. 11. 8. 10:11

부동산 담보 충분해도, 흑자가 나도… 대출금 회수 공포
● 바짝 마른 돈줄에 시름 앓는 기업들
대기업은 제2금융권, 중소기업은 사채에까지 매달려
은행들, 유동성 지원대책 철저히 외면… 꺾기 강요도
예금 빼내려 하면 "대출 만기 연장 못해준다" 으름장
방성수 기자 ssbang@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장원준 기자 wjjang@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김승범 기자 sbkim@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자산 규모 3조원이 넘는 중견 대기업 A사는 요즘 은행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올해 초 기업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해 1년 만기로 3000억원을 빌린 게 화근이었다. 기업 인수에 성공했지만 예상치 못한 경기 침체로 돈줄이 막힌 것이다. 자금 시장이 얼어붙어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발행도 어려운데, 은행은 내년 초 만기가 돌아오는 3000억원을 무조건 갚으라고 종용하고 있다.

A사의 재무담당 임원은 "부동산 담보가 충분하고 흑자도 내고 있으니 만기 연장만 해달라고 읍소하고 있지만, 은행은 '우리도 돈이 없다'며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급 순위 10위권에 드는 한 대형 건설회사는 최근 저축은행에서 연리 13%에 만기 6개월짜리 300억원을 빌려 자금난을 간신히 해결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건설업체는 은행 대출은 물론, 회사채 발행까지 모두 막혀 있다"며 "대형 업체들도 연리 15% 전후의 저축은행 돈을 빌려 급한 자금을 겨우 막고 있다"고 말했다.

한·미 통화 스와프 합의로 외화 유동성(현금 흐름) 위기는 수그러들었지만, 국내 기업들의 돈 가뭄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은행들이 연말 재무건전성 기준을 맞추기 위해 적자 기업은 물론 흑자 기업에 대해서도 마구잡이로 대출을 회수하고 있는 게 큰 원인이다. 자금 시장 경색으로 일부 우량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회사채 발행을 통한 직접 자금조달도 끊어졌다. 때문에 현금 확보를 위해 대기업은 저축은행 등 제2 금융권으로, 중견·중소기업은 사채시장으로 달려가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유동성 지원대책 쏟아지지만…

가장 다급한 곳은 중소기업이다. 정부가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 대책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은행들은 중소기업 대출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탓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6일 발표한 '10월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은행권의 중기 대출은 2조6000억원 증가에 그쳤다. 지난 4월(7조4000억원)의 3분의 1 수준이다.

경기 성남에 있는 섬유업체 B사는 이달 초 정부의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 소식을 듣고 은행에 대출 상담을 하러 갔다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부모 소유의 부동산을 추가 담보로 제시하고 토지 보상금으로 받게 될 1억5000만원 중 1억1000만원을 예금으로 넣으라는 은행 측 요구가 터무니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매달 500만원씩 적금을 부으라는 '꺾기(대출을 조건으로 한 예·적금 강요)' 요구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전자부품업체 사장 김모씨는 "운영자금이 부족해 예금 1억원을 인출하려고 했더니, 은행측에서 돈을 빼내가면 기존 대출금 만기 연장을 해주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기도했다"고 말했다.

다급해진 중소기업들 중에는 사채시장으로 달려가는 이들도 적잖다. 인천 남동공단의 플라스틱 사출기 업체 사장인 김모씨는 "사채를 빌렸다가 제 날짜에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가 들이닥쳐 기계를 뜯어간 기업도 있다"고 말했다.
▲ 홍석우 중소기업청장이 지난 6일 정부 대전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최근 금융시장 불안으로 자금조달이 어려운 중소기업의 경영안정을 위해 내년 예산에 중소기업지원분 1조6000억원을 추가로 반영해 편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대전=뉴시스
무역업체 신용장 개설도 어려워

자금난은 무역업체에도 불어 닥치고 있다. 수출입 기업의 신용장을 매입하면 은행 부채로 잡혀 재무건전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시중은행이 신용장 개설을 기피하고 있는 탓이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정수기 수출업체의 최모 이사는 "은행에서 신용장을 매입해줘야 원자재를 사서 기업이 돌아가는데 지금은 신용장 개설이 어렵다"며 "외국 바이어로부터 직접 송금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규모 설비투자가 진행 중인 한 대형 철강회사도 지난 달 일본에서 들여올 설비에 대한 신용장을 주거래은행으로부터 받지 못해 설비 도입이 지연됐다. 국제무역연구원의 신승관 팀장은 "특히 내년에 대금이 들어오는 60~90일짜리 신용장은 개설 자체가 어렵다"며 "정부와 한국은행이 무역금융 지원을 독려하지만 일선 은행은 연말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여전히 위험 회피에 급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에도 "무조건 대출 회수" 통보

대기업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시중은행들이 개별 기업의 재무상태와 상관없이 연말 만기가 돌아오는 대출을 모두 회수하겠다는 방침을 통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규 대출은 이미 중단된 지 오래이다. 4대 그룹 계열의 수출업체 임원은 "글로벌 경기 악화 속에서도 수출 호조로 돈을 벌고 있는데, 은행은 무조건 돈을 회수하겠다니 참 답답하다"고 말했다.

업체들은 회사채 시장을 두드리고 있지만 '벽'이 높다. 지난 6일 회사채를 발행한 동부제철은 연 10%의 금리에 200억원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당초 예정 금액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규모였다. 한 대형 건설업체 관계자는 "그나마 회사채 발행이 가능한 곳은 형편이 좋다"며 "국내 주요 건설사는 은행·증권사의 반응이 워낙 냉담해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이승철 전경련 전무는 "경제가 어려울수록 기업과 은행의 신뢰가 중요하다"며 "은행이 '나만 살겠다'는 식으로 나와서 우량 기업마저 흔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