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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에서도 성지라고 이름 붙은 곳은 왠지 발걸음부터 묵직해진다. 산서성(山西省) 오대현 동북부에 위치한 불교성지 오대산은 문수보살 도량으로서 아미산(峨眉山), 보타산(普陀洛伽山), 구화산(九華山)과 함께 중국 불교4대 명산 중 하나다. 오대산은 사찰의 건립시기가 가장 빨라 그중 으뜸이며, 중국 불교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 홍문암(鴻門岩)과 동대정(東臺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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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오대산중에는 100여 개의 사묘(寺廟)가 있으며, 그중 특히 유명한 것은 라마계의 진해사(鎭海寺)와 불광사(佛光寺)다. 불광사 본전(本殿)은 857년에 건립된 것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또한 신라의 혜초(慧超)가 이 산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입적했고, 이곳 오대산에서 문수진신을 친견한 자장율사는 한국으로 돌아와 상원사가 위치한 오대산을 개산(開山)했다.
오대산은 산림이 없고 누대처럼 5개봉이 솟아 있어 그렇게 불렀는데, 중대 취암봉(翠岩峯·2,893m), 동대 망해봉(望海峯·2,795m), 서대 계월봉(桂月峯·2,773m), 남대 금수봉(錦繡峯·2,274m), 북대 엽두봉(葉斗峯·3,058m)의 5대는 모두가 2,000m를 넘는다. 우리의 오대산도 똑같은 오대에 사찰과 암자가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의 오대산은 숲이 있고 이곳의 오대산은 숲이 없다는 점뿐이다.
이곳 오대산은 7개 명승경구로 나뉜다. 그중 중심이 되는 곳은 대회진경구(臺懷鎭景區)로 보살정(菩薩頂), 삼탑사(三塔寺), 현통사(顯通寺), 탑원사(塔院寺) 등의 규모가 큰 사찰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현통사는 오대산의 사찰들 중에서 400여 채의 당우가 있어 그 규모가 크고 역사가 가장 오래된 사찰이며, 탑원사는 오대산의 상징인 대백탑(大白塔)이 있는 곳이다. 대백탑은 높이가 54.6m이며, 탑의 꼭대기에는 200여 개의 동령(銅鈴ㆍ동으로 만든 종)이 달려 있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청명하고 아름다워 10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 ▲ 두타고행(頭陀苦行)의 삼보일배(三步一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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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정토 불법의 땅으로 지극한 불심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운 오대산. 나무 한 그루 없어 척박하고 버려진 땅 황토고원에 우공이산이란 말을 탄생시킨 태행산맥에서 가지 쳐 나온 오대산맥에 솟은 그 오대산을 필자는 이미 지난 4월 섬서미술관 류진생(劉秦生) 경리와 돌아보았다. 이 산을 이제 12월호에 소개하는 것은 중국 명산 기행의 마지막 회에 올림으로써 이 산의 의미가 남다름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불교성지이자 국가지질공원
운강석굴과 현공사를 둘러본 후 오후 4시30분이 되어 오대산으로 향했다. 거대한 산맥의 첩첩산중 낡은 포장도로를 따라 흙먼지를 일으키며 오대산을 찾아가는 길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저녁노을을 어깨에 걸치고 고행의 길로 들어서는 수도승의 길이었다.
산그늘에 가려 어두워진 흙집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작은 들판에 석양이 물드는 풍광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다시 협곡으로 접어들어 가파르고 굽은 산간도로를 따라 몇 시간 달리다 보니 길옆에는 잔설이 수북히 쌓였다. 오대산이 가까워지며 도로는 눈길로 변하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저녁 8시가 되어 가까스로 오대산 산문을 들어서니 날은 이미 어둠으로 변했고 늦은 밤 입산료를 받는 매표소 앞 전등불만 유난히 밝다. 우선 오대산장에 숙소를 정하고 여장을 푼 다음 빠이주 한 잔을 마시며 오대산의 첫날밤을 맞이했다.
- ▲ 북대정(北臺頂)의 심설(深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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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타고 왔던 차량 위에는 하얀 눈이 수북히 쌓였다. 눈을 쓸고 있는 유 경리에게 가게 아저씨가 말을 건다. 산행 입구까지 100위안에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도로에 눈이 많이 쌓여 승용차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곳부터 걸어서 산행을 시작하면 고갯마루인 홍문암(鴻門岩·산행입구)까지도 2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승합차를 타고 곡예하듯 눈보라 폭풍 속을 달려 홍문암에 도착했다.
바람이 너무 강해 날려갈 것만 같다. 4월인데 이곳은 북풍한설 한겨울이다. 그는 미리 준비해온 인민군 코트 3벌을 건네주며 입으라 한다. 유 경리와 채 경리가 코트를 입으니 모자만 쓰면 사진에서 보았던 중공군이 틀림없다.
홍문암에는 붉은 글씨로 ‘國家地質公園 五臺山(국가지질공원 오대산)’이라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이 서 있다. 홍문암과 표지석에는 수많은 빛바랜 깃발과 새로 매단 깃발이 뒤엉켜 바람에 심하게 나부낀다. 거대한 장승처럼 우뚝 선 산문에는 ‘淸凉勝地’(청량승지)라 새겨져 있다. 오른편은 동대로 오르는 길이고, 왼편은 북대로 오르는 길이다. 우리는 오대산 정상인 북대(北臺) 엽두봉(葉斗峰)을 향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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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등성이는 나무 한 그루 없이 탁 트였고, 능선을 따라 끝이 뵈지 않는 철조망에는 라마불경이 인쇄된 오색 깃발들이 찢어져 나갈듯 펄럭인다. 백두대간의 선자령을 올라 황병산까지 다시 하는 기분이다. 등산로는 어느 곳에는 눈이 바람에 날려 길바닥이 드러난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곳은 허벅지까지 빠진다. 이곳 오대산은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는 언제나 눈이 내려서 산행하기 힘들다고 한다. 하기야 이들은 산행을 운동화 신고 산보하는 수준이다.
류 경리와 나는 도로를 따라 걷다가 아예 능선으로 올라선다. 잡목 하나 없는 능선에서 어쩌다 눈 위로 솟아오른 것이 눈에 띄어 행여 나무인가 하고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엉겅퀴처럼 보이는 말라비틀어진 꽃대다.
- ▲ 대회진(臺懷鎭)의 서설(瑞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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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하는 마음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반복하며 한참을 오르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고개를 드니 ‘急彎’(급만·급한 커브길)이란 이정표가 우뚝 서 있다. 산행을 포기하고픈 생각이 목까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멀리 정상 아래 눈보라 속 작은 건물 하나가 보이는 곳까지라도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출발한 지 2시간이 되어 겨우 법운사(法雲寺)에 도착했다. 거대한 사자석상이 양편에 높게 앉아 지친 우리를 반긴다. 붉은 색 높은 담벼락에 건물은 채색이 안 된 콘크리트 단층 건물이다. 안에서는 향을 피워 놓고 스님이 연신 절을 하고 있다. 인적 하나 없는 이 산속에서 동안거라도 하는 것일까. 널따란 평정봉(平頂峰)에서 대회진을 내려다본다. 신선이 그린 수묵화가 이토록 아름다울까. 참으로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동대 오르는 길은 마치 소백산 연화봉 같아
완만하고 평탄하던 길은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세차게 얼굴을 스치는 강한 바람과 짙은 안개구름에 가려 옆 사람도 쳐다보기 힘들다. 정상엔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영응사(靈應寺)가 있으나 강풍과 짙은 안개로 인하여 인기척조차 없다. 체감온도는 너무 떨어지고 몸을 은신할 곳마저도 없다. 곧바로 뒤돌아서서 엉덩이 미끄럼을 타며 하산을 시작했다.
- ▲ 삼탑사(三塔寺)와 북대정(北臺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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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지고 뒹굴며 뛰다시피 내려서니 온몸에서 땀이 솟는다. 이제는 그 혹독한 바람도 약해진 듯하다. 약간의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우리는 다시 동대로 오른다. 동대 망해사(望海寺)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장관이라고 한다.
동대로 오르는 길은 마치 소백산 연화봉을 오르는 기분이다. 흔히 소백산 설경을 선이 고운 여체에 비교하지만 이곳에서 바라본 오대산 또한 어머니의 가슴처럼 포근하고 누나의 등처럼 편안하다. 세상살이를 어느 정도 겪은 뒤에야 그 넓이와 깊이를 느끼게 되며 나이가 지긋해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는 산. 그런 산이 바로 오대산이다.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있는 오대산. 세파에 시달린 지친 사람은 이곳 오대산을 찾아 수행하는 마음으로 설원을 걷다보면 눈보라 속에서 지혜의 문수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 ▲ 대백탑(大白塔)과 문수영풍(文殊靈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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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가난한 시대, 물질 상위의 이 혼란한 시대엔 사람들이 문수를 찾지 않는다. 문수신앙이 타력보다 자력의 신앙이며, 기복적이기보다 이지적 현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음이나 미타에 비해 대중이 멀리할 수밖에 없다.
동대에서 내려서서 천년고찰이 운집해 있는 대배진으로 향했다. 분지처럼 움푹 파인 이곳에 어느 사찰 하나만으로도 관광지를 이룰법한 대형 사찰들이 담을 사이에 두고 모여 있다. 서로 다른 종파가 이웃처럼 모여 사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들은 칼바람을 비켜가게 한다. 이곳 사찰만 다 돌아보는 데도 2~3일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시간이 허락치 않아서 보살정, 현통사, 삼탑사, 탑원사 등 대표적인 곳을 돌아보기로 했다. 우선 황궁 형식을 딴 보살정에 올랐다. 우리 사찰에 비해 그 규모가 대단하다. 이곳저곳에서 불사가 한창이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큰 건물은 여자불교대학으로 그 규모 또한 대단하다.
- ▲ 선승(仙僧)의 취권(醉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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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정을 둘러보고 108계단을 내려서니 선승의 취권 동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 경리가 선승이 끌어안고 있는 술독을 가리키며 “꿔어왼주(郭元柱)”한다. 스님이 나처럼 술을 좋아한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 한바탕 웃고 현통사, 삼탑사를 거쳐 오대산의 상징인 대백탑이 있는 탑원사로 들어서니 탑의 규모가 정말 대단하다. 여기저기서 널빤지를 깔아놓고 온몸으로 엎드렸다 일어나길 반복하며 합장한다. 이 혹한에 저토록 처절한 자기수행 없이는 문수를 만날 수 없나 보다.
탑원사를 나서는데 갑자기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친다. 문수란 지혜다. 세속의 지혜가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문수란 실존이기도 하고 상징이기도 하다. 나는 오대산의 혹한 속에서 정상을 오르며 문수의 영풍(靈風)을 보았고, 그것을 그리려고 했다.
/ 그림·글 곽원주 blog.empas.com/kwonjoo50 협찬 자이언트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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