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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 초기에는 예쁜 길로만 자전거 타보는 게 꿈이었다. 그림 같은 호수, 그 뒤로 병풍 같은 기암괴석, 엽서의 사진 같은 산수화 풍경을 배경으로 한 자전거 여행. 지금도 그런 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헌데 몽골에는 천불동의 협곡이나 장가계의 기암괴석이 없다. 대지에는 초원과 바람, 하늘에는 구름과 별뿐. 관념적이자 초현실적인 단어들이다. 좀 건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가지고 몽골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9월2일 몽골 울란바토르 아침 러시아워, 우리 일행은 자동차와 인파로 꽉 채운 비좁은 도시를 벗어났다. 자전거 4대에 5명의 1주일치 식량까지 실은 일제 RV차 안은 더욱 비좁다. 좌석 의자를 2개나 뜯어내고 천정까지 짐으로 가득 채우고 난 차량은 사람 앉을 자리가 모자란다. 비포장길의 자동차는 좌우로 요동치며 흔들어대지만 우리들 시선은 한결같이 창밖 초원을 향한다.
- ▲ 오르혼 폭포 가는 길. 초원에서 길을 벗어나는 일은 다반사다. 샛길로 빠지면 선두와 후미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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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흙먼지 날리며 달리는 자동차는 6시간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전거가 노닐 곳은 몽골의 옛 도읍지 하르호린(Kharkhorin). 이곳의 주산(主山) 격인 아르항가이 자연보호구역(Arkhangai Protected Area)이다.
초원의 메트로폴리스
아르항가이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자연보호구역으로 시베리아 침엽수림인 타이가숲의 남방한계에 속한다.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400km, 몽골의 정 중앙이다. 동서로 뻗은 타원형의 항가이산맥은 우리 경기도 면적만큼 넓다. 산 능선에는 초원에서 보기 힘든 침엽수가 빼곡하고, 야생 동식물과 함께 노천온천까지 있어 관광객이 즐겨찾는 곳이다.
항가이산(3,540m) 동편 자락에는 오르혼(Orhon) 강이 흐른다. 150km를 흐르는 물줄기는 하르호린을 지나 북쪽 저 멀리 바이칼호를 찾아간다. 우리의 자전거는 이 강을 거슬러 항가이산 자락 하나를 넘어갈 예정이다.
오후 내내 자동차를 타고 도착한 몽골제국의 첫도읍지 하르호린은 이미 밤이다. 내심 기대했던 마을 규모와는 너무 판이하게 작다. 집집마다 사람 키보다 좀더 큰 목책을 빼곡히 두르고 그 안에 게르(몽골 전통가옥)를 들여 놓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산비탈 판자촌 같다.
- ▲ 왼쪽부터 김창율, 유원봉 신부, 김종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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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셋째 아들로 2대 왕위에 오른 우구데이칸이 세운 몽골대제국의 40년 행정수도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하다.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기에 성시를 이룰 법한데도 하르호린에는 당시 청나라가 불태워버리고 남은 성곽과 라마사원(에덴조)만이 남아 있다. 몽골 정부는 2050년께 울란바토르의 수도를 이곳 하르호린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하지만 아직 먼 훗날 이야기다. 유라시아를 호령하던 칭기즈칸의 명성을 싹틔울 수 있을지.
딱히 볼 건 없어도 찾는 관광객 덕분에 50불이나 하는 호화 게르가 있지만, 우리는 10불 정도의 값싼 게르를 찾았다. 목책에 가려 어렵게 찾아낸 민박 게르. 그 첫날밤은 주인집 식구 3명과 우리 일행 5명이 비좁은 게르 한 동에서 묵었다. 좀 어색했지만 보드카 뒷맛처럼 잠도 달았다.
자전거 타는 첫날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게르에는 내리는 비를 볼 창문도, 비를 피할 처마도 없다. ‘문풍지 너머 처마 밑 낙숫물 소리’ 같은 건 몽골에 없다. 기온은 늦가을에 접어들었다. 북위 47도, 높은 산속은 영하로 떨어져 눈발이 날리고 있을 터이다. 간밤에 마셔댄 칭기즈보드카 취기를 수태차(양젖에 차 잎을 넣고 끓인 몽골 전통차)로 달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자전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이제 예쁜 강변길, 타이가 숲이 굽어보는 그림 같은 초원을 달리는 일만 남았다.
길에서 만난 길의 주인
아르항가이 자연보호구역임을 알리는 거대한 그림간판이 세워진 언덕에서 오르혼강을 내려다본다. 뱀 비늘처럼 윤기 흐르는 미끈한 물줄기 따라 버드나무와 초원에서 보기 드문 활엽수가 가로수처럼 띠를 이룬다. 우마차 다니는 비포장 초원길은 바람이 훑고 지난 흔적처럼 굽이굽이 지평선에 꼬리가 맞닿아 있다. 강도 흐르고 길도 흐른다.
- ▲ 오르혼 강을 따라 가파른 둔덕길을 오르는 유원봉 신부와 김종수씨. / 자전거 여정을 마치고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길에 염소 잡는 광경을 보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주 순식간에 고통 없이 숨통을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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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이발해 반반해진 머리통처럼 초원의 길섶 풀잎은 키가 작아 깡총하다. 키 자랄 틈 없이 온갖 가축들이 풀을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풀 뜯는 수십 두의 야크 무리를 지나면 더 많은 수의 양과 염소 떼가 길 위를 점령하고 있다. 길의 주인, 그들의 눈은 일제히 자전거로 향한다. 관객 없는 자전거 길에서 만나는 거대 관중이다. 자전거에 놀라 한두 마리가 뛰기 시작하면 수십 마리의 양과 염소가 덩달아 줄행랑친다.
검은 색의 투우(鬪牛)를 닮은 늙수그레한 덩치 큰 소 한 마리가 날카로운 뿔을 세우고 길 위에 버티고 자전거를 노려본다. 한 500kg 정도 돼 보이는 소다. 좀 무섭다. 무리의 왕초인지 길은 외길인데 자전거가 다가가도 피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다른 놈들은 일찌감치 길을 내주며 피하고 있는데 자전거가 더 가까이 가도 피할 생각을 않는다. 결국 자전거가 꼬리 내리며 비켜 지난다.
헌데 멀리 못가 더 무서운 복병을 만났다. 바로 개였다. 추운 북방 개답게 어깨가 떡 벌어지고 몸집이 아주 크다. 육식이 주식인 터라 힘차고 사납게 보이는 몽골 개들이다. 게르 몇 채가 모여 있는 민가에 들어서자 서너 마리의 개들이 자전거를 향하여 일제히 전력 질주한다. 사냥개가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대 듯 압도할 기세다. 개 주인 꼬마가 뭐라고 소리치며 말려보지만 끈 풀린 미친개처럼 소용없다. 페달 돌리는 다리를 물듯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끝장을 보자며 덤벼든다.
“그래? 그럼 어디 해보자는 거지.”
이번에도 꼬리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급제동하며 자전거에서 내려 길을 막아섰다. 여차하면 너도 혼난다는 식으로. 그제야 개가 꼬리를 내린다. 길에서 만난 이방인 대접이 말이 아니다. 우리 일행은 번갈아가며 개들에게 시달렸다. 이런 집 지키고 가축 지키는 개는 내일도 모레도 또 만나게 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개도 먹는 사람’이란 것을 알아챘는지, 식겁해서 식은땀까지 흘렸던 첫 번째 개의 기억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 ▲ 오르혼 강에서 만나는 첫번째 다리. 다릿발이 좀 약해보이고 상판 나무는 떨어져 나가 강 바닥이 훤히 보이기도 한다. 강이 깊지는 않지만 물은 차다. 가축 분비물로 그냥 마실 만큼 물이 깨끗하지는 않지만 여기선 식수로 사용한다. / 울란바토르에서 하르호린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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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평탄한 일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집에는 번지수가 없고 길에는 교통표지판이 없다. 떠도는 유목민에게 붙박이 집터가 있을 리 없고, 초원의 길이란 게 하나일 수 없기 때문에 이정표 둘 자리가 마땅치 않다. 같은 길을 가면서도 수많은 선택의 길이 앞에 놓인다. 길이 패여 웅덩이가 생기면 물을 피해 옆에 길이 나고, 돌이 튀어 나왔으면 이를 피하는 길이 다시 난다. 그 길이 굽었으면 옆에 직선길이 또 만들어진다. 길이 길을 낳고 그 수명이 다한 길은 먼저의 길처럼 또 다른 길에게 자신의 길을 내주어야 한다. 나서 자라 그 수명이 다해도 길은 사라지지 않는 생명체와도 같다.
궂은 날씨가 며칠간 계속됐다. 지평선 저 멀리 먹구름이 자기 무게를 못 이겨 대지에 비를 뿌려대는 풍경이 이채롭다. 윈드스토퍼를 입었어도 비바람이 지나는 길에는 한낮의 한기에 닭살이 돋는다. 초원에 소나기가 내리면 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태양이 작렬해도 나무그늘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넓은 하늘을 먹구름이 다 가릴 수는 없는 노릇. 한 차례 빗줄기가 지나고 나면 햇볕이 땅을 녹인다. 밤낮의 일교차 말고도 오락가락하는 빗줄기 탓에 대낮에도 수없이 냉온탕을 번갈아가며 담금질이다.
오르혼 강 주변으로 천연의 오토캠핑장이 널려있다. 게르민박 다음날부터 우리는 주로 야영을 했다. 설거지하기 좋은 강 사구(砂丘)에 자리를 잡는다. 말똥 소똥을 한 편으로 걷어내고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불을 지핀다. 밤하늘은 흐렸지만 달과 별을 맞을 준비는 마쳤다. 초원의 밤바람이 구름을 몰아내면 강물에는 달빛 흔들리고, 별빛 찰랑이는 보드카 안주로 숯불에 갓 구워낸 양고기 삼겹살 맛이 그만이다.
이튿날, 오늘은 70km 떨어진 오르혼 폭포까지 가기로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서지만 날씨는 연일 짓궂기만 하다. 앞서 간 에스코트 차량은 흔적도 없고 굵어진 빗줄기에 천둥소리는 더욱 가까이 진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