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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자신의 묘지에서 평생을 산다. 탯자리가 곧 묏자리다. 선(禪)이 인류에게‘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말을 선물하기 위해 수천 년 동안 면벽(面壁)을 했고(지금도 역시 하고 있고), 엄청난 양의 종이와 먹을 소비했다는 사실은 참 가련한 일이다. 나무는, 어린 나무 젊은 나무 늙은 나무 할 것 없이 자신이 죽을 자리에 당당히 삶을 세우고, 보태고 뺄 것도 없이 자신의 온 삶 그대로를 묘비명으로 새긴다. 어쩌면 막행막식(莫行莫食)을 일삼는 괴각승들의 행태는 ‘걸림 없는 삶의 몸짓’이 아니라, 생사의 경계를 지우려는 처절한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태어나면서부터 생사일여의 경지를 살아가는 나무를 보고서 절망한 나머지, 그저 ‘죽는 날까지 꾸역꾸역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을 위악적으로 위로하는 일은 아닐는지.
사람이란 타이틀을 단 목숨이 슬픈 이유는 인류의 수만큼이나 많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생사의 불화(不和)가 아닌가 싶다. 삶에 종속된 죽음은 오만방자를 나 몰라라 하고, 죽음에 종속된 삶은 당장의 하루하루를 물에 빠진 자의 지푸라기로 만들어버린다.
낙엽귀근(落葉歸根). 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는 말이겠다. 과연 그런가? 잎이 한 순간이라도 뿌리를 벗어난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기를 좋아할까? 바깥으로만 치달았던 기억이 낯부끄러워서 슬금슬금 주위를 살피며 매무새를 가다듬는 꼴은 아닐까?
좀 엉뚱한 비유를 들자면, 경제 파탄으로 세상을 수상하게 해 놓은 세계 최강국 미국이 오바마라는 사람을 새 대통령으로 뽑아놓고 환희하는 것도 비슷하다. 인류의 지난 역사가 그랬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고서 세계인권선언을 내놨지만 아직도 그것의 핵심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는 아주 우아한 종이조각에 적힌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뿌리 부정하기 혹은 뿌리 넘어서기가 아니었던가. 인류의 뿌리를 자연으로 본다면 말이다.
- ▲ 낙엽은 조락의 산물이 아니다. 삶에도 죽음에도 속하지 않은 적멸의 꽃이다. / 여위어가는 계곡, 태양의 사금파리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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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은 생사의 경계가 허물어진 자리에서 피는 적멸의 꽃
아파트 단지 안으로 노란 색 유치원 차가 들어선다. 문이 열리고 아이가 폴짝 뛰어내린다. 아이를 기다려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팔랑거리며 잘도 제 집을 찾아간다. 아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노란 은행잎이 돋아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늦가을 오후의 풍경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이십 년도 더 된 복도식이어서 집 밖의 풍경이 무시로 집안으로 들락거린다. 이웃들이 사는 모습이나 계절의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읽을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아주 즐긴다. 유치원 아이들도 대부분 낯익다. 지난 봄 그 아이들은 때맞춰 마중 나온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지금은 혼자서도 잘 해낼 만큼 여물었다. 참 보기에 좋다. 그 아이들의 발자국 같은 낙엽에서 나는 강렬한 생명의 기운을 느낀다. 조락(凋落)이라는 말은 영 마뜩치 않다.
체로금풍(體露金風). 통쾌하다. 가을바람에 나무의 몸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소식이다. 이 소식은 하나의 비유다. ‘본래면목’이 다 드러났다는 선가(禪家)의 공안(公案)이다(벽암록 제27칙). 따라서 이 말은 나무의 실제 살림살이와는 무관하다. 하여 나는 무모한 용감으로 시적 울림을 취한다. 금풍으로 호명된 가을바람이라니. 멋지다. 첫눈이 오기 전 그 바람을 만났다. 허공 가득한 낙엽의 군무! 생사의 경계가 허물어진 자리에서 피어난 적멸의 꽃이다. 생과 사,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다. 질서 따위가 있을 턱이 없지만 하나도 어지럽지 않다.
내친김에 감히 선가(禪家)의 소식에 도전해 본다. 체로(體露)가 ‘본래면목’이라면 ‘잎’은 ‘번뇌망상’의 비유일 터인데, 잎 없는 몸통이 가능하기나 할까? 선가(禪家)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범부가 곧 부처이고, 번뇌가 곧 지혜(凡夫卽佛 煩惱卽菩提)’라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 문제를 두고 씨름할 생각이 전혀 없다. 깨친 입장에서 번뇌를 마주한 적이 없고, 체로(體露)한 몸으로 잎을 본 적이 없으니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다만 나는 나의 번뇌가 무성할대로 무성해져서 어느 때, 어느 생에서건 금풍(金風)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나는 내장산의 가을 단풍나무보다도 야산의 낙엽송(일본잎갈나무) 단풍을 더 좋아한다. 출신 성분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기도 하지만 나는 좋다. 저물어가는 가을 한때 까무룩 자신을 사르는 열정 앞에서 나는 몽롱해진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느낌마저 든다. 한순간에 훌훌 털어버리는 모습도 좋다. 하여 나의 번뇌도 세상에 무해하게 마구 타올랐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감당하기 힘든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 겨울이 가을의 무덤이 아니듯,낙엽은 나무의 주검이 아니다
- ▲ 1 대지 위에서 다시 살아나는 또 다른 나무들. / 2 까무룩 온몸을 사르는 낙엽송의 열정. 바라보는 나는 덩달아 까무러칠 듯./ 3 어느 날 낙엽의 전언. ‘지금 하늘로 오르는 중.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찾지 말 것. / 4 生·老·病·死를 넘어선 자리. 해탈 꽃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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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이 낙엽에서 쇠락과 소멸의 이미지를 읽을 뿐
겨울이 가을의 무덤이 아니라면, 낙엽도 나무의 주검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낙엽에서 쇠락과 소멸의 이미지를 읽는 것일까.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욱이 이 마음이란 놈은 늘 몸에 착 달라붙어서 온갖 투정을 다 부린다. 사람들은 왜 나무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걸까?
느티나무는 겨울에 그 모습이 더 빛난다. 멀리서 보는 오래된 마을 동구의 겨울 느티나무는 커다란 한 장의 잎 같다. 나무에게 잎은 달려 있건 떨어졌건 한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의 몸에서 몸짓을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당연히 몸과 몸짓은 서걱거리는 법이 없다. 그런데 왜 마음과 몸은 시도 때도 없이 불화할까.
몸 떨어지면 마음도 떨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마음 다스리기’보다 ‘몸 다스리기’가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상처가 예뻐서 감싸는 게 아니라 몸을 위해서 그렇게 하듯이.
나뭇잎은 나무의 요구에 순응한다. 여름 날 잎의 요구에 몸통이 그러했듯이. 낙엽은 그 견고한 조응의 결정체다. 낙엽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지워진 자리에서 피는 적멸의 꽃이다.
낙엽에게 물어 본다. 내 몸과 마음은 언제쯤에야 나무와 낙엽의 관계처럼 살고 죽을 수 있을지를. 낙엽이 내게 말한다. ‘몸 따로 마음 따로’라는 말이 말짱 거짓인 걸 알라. 몸과 마음은 늘 함께 하는 바, 다만 마음은 몸을 배반하지 않고 몸은 마음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생사일여의 경지는 묻지도 탐하지도 말라. 마음과 몸이 서로 넘치는 요구를 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대도 금풍(金風)을 만나 체로(體露)할 수 있을 터인즉.
올 겨울엔 제대로 몸 두는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왕유(중국 당나라·699-759)의 절창 ‘산중(山中)’의 마지막 두 구절이 귓가에 어린다.
‘산길엔 비 온 적 없는데(山路元無雨) / 쪽빛 하늘이 옷깃 적시네(空翠濕人衣)’
어느 하루 볕 좋은 날, 깊은 산 속에서 낙엽을 덮고 누워 마음의 습기부터 어떻게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연재 끝>
/ 글 윤제학 동화작가 사진 정정현 조선영상미디어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