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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8일 오전 10시30분, 서울 도봉구의 한 공사 현장. 새벽부터 계속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어림짐작으로도 80m가 넘어 보이는 아찔한 높이의 크레인 두 개가 흉물스럽게 비를 맞고 있다. ‘현장의 안전 사고는 가족과의 이별입니다’라고 쓰인 기다란 문구가 건설 현장을 쓸쓸하게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흰색 안전모를 쓰고 폭 60㎝가량의 철근 위를 걸어다니는 철골 조립공 2명이 눈에 띄었다. 불꽃을 날리며 용접을 하는 기능공 3명도 그 옆에 있었다. 건설협회에 따르면 지난 10월 현재 건설현장의 임시근로자 수는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8만5000명 줄었고 일용근로자 수는 작년 동월에 비해 6만1000명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줄고 인부는 늘고… 건설사도 구조조정
일 마치고 술 한잔 걸치던 것도 옛 풍경
“현장이 썰렁해 보이네요.”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왔잖습니까. 비가 그치질 않으니까 봉고차를 타고 와서 기다리던 일용직 근로자들하고 기능공 20명이 그냥 돌아가버렸습니다. 요즘엔 가뜩이나 일감도 적은데 비까지 오니까 표정들이 말이 아니었어요. 난 뭐 현장에서 상주하는 기능공이니까 그나마 좀 낫긴 하지만…. 요즘 같은 때는 ‘서울역 노숙자가 괜히 생기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씨는 연방 큼지막한 철근 볼트를 풀었다. 비가 내려 미끄러운 철근 위를 걷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일이 있는 것만도 감사하다”며 싱긋 웃었다.
흰색 컨테이너로 지어진 건설 현장 사무소 2층에서 ‘현장 사령관’인 소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건설 현장의 어려움을 이렇게 말했다.
“전반적으로 건설 경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는 경력을 3년쯤 쌓으면 그걸 토대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엔 그냥 눌러앉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일은 줄고 사람은 늘어나는데. 결국 자체적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옆에 있던 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건설 현장 분위기가 많이 삭막해졌죠. 예전 같으면 비 와서 공사가 진행되지 않는 날에는 직원들끼리 소주도 한잔하고, 명절 같은 때엔 건설현장 직원들로부터 구두표라도 한 장 받고 그랬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그런 게 거의 없어졌어요. 본사에서 결정하는 경영상의 변화가 특히 눈에 띕니다. 현장을 압박하죠. 현장은 본사에서 떨어져 있어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직원 복지를 축소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그래도 메이저 건설회사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소위 메이저 건설사가 전체 물량의 80%가량을 가져가거든요. 시나 도에서 발주하는 경우엔 지역 건설업체나 메이저 업체가 대부분의 물량을 가져갑니다.” 그가 입을 닫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2008년 10월 현재, 국내건설공사 수주액은 9조7200억원으로 전년 동월대비 21.5% 하락했다. 1년 새 20% 이상 수주액이 줄어든 불경기 속에서 메이저 건설사가 차지하고 남겨둔 20%의 물량을 나눠 가져야 하는 중견 건설사는 속이 탈 수밖에 없다.
원도급 업체는 돈 안 준 채 자꾸 미루고
하도급 업체는 부도나서 공사 포기하고
오후 1시. 비가 그치면서 인부들이 하나둘씩 현장으로 들어섰다. 현재 이 건설 현장은 한 하도급업체의 부도로 공사 진행이 원활치 못한 상태다. 다른 하도급 업체의 작업반장 권모(57)씨는 “건설 불경기 속에 정말 힘든 건 하도급 업체다”라며 울상을 지었다.
“어떻게 된 게 임금이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물가는 올라가는데 왜 임금은 오르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원도급 업체가 원래 우리가 해야 할 일 외의 일까지 포함해서 시키니까 더 미칠 노릇입니다. 각 하도급 업체마다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있거든요. 그런데 원도급 업체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까지 우리에게 미뤄버리고 정작 돈은 제대로 주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리 어려워도 원도급 업체가 갑의 위치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같은 현장에서 일하던 다른 하도급업체가 부도가 나면서 공사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어요. 요즘 같은 불경기 때는 우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하도급 업체가 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을 거예요. 원도급 업체도 사정이 어려운 것은 알지만 우리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사정이 딱하긴 인력사무소도 마찬가지다. 오후 2시30분 건설 현장에서 50m가량 떨어진 빌딩 4층의 한 인력사무소를 찾았다. 실장 이씨는 짜증 섞인 말투로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고 일터에 나가는 인력이 대충 50% 정도 줄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씨에게 “건설 경기의 위축이 인력사무소에서도 느껴지는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요즘 인력사무소 다 어려워요. 됐어요? 바빠요. 다른 데 가봐요. 나가보세요”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인력사무소를 나와 인부 대기실에 들어서자 하얀 천막 아래 빼곡히 쌓여있는 배낭들이 보였다. 일이 없어 인력사무소에 맡겨놓고 간 인부들의 짐이었다. 인력사무소 입구 오른편에는 ‘전회원에게 알림, 방치되어 있는 가방을 정리하라’고 쓰여진 A4용지 한 장이 붙어있었다.
“중국인 근로자 들어오면서 일감 더 줄어
일 안 뺏기려면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건설 경기의 찬바람은 건설 현장 인근 음식점에도 매섭게 불었다. 부도가 난 하도급 업체 직원들이 외상으로 먹은 식사 값이 수백만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건설 현장의 한 인부는 “근처 삼겹살 집 외상이 500만원도 넘을 것”이라며 “주인 아주머니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비가 그친 다음날 오전 10시 고양시 행신동의 아파트 공사 현장을 찾았다. 하얀색 안전모를 쓴 인부가 15명가량 모여 담장 옆에 잔디를 깔고 있었다.
“요즘엔 점심 때가 되면 인부들이 도시락을 먹어요. 밥값을 아끼려는 거죠.” 담배를 피우며 물끄러미 건설 현장을 바라보던 작업반장 김모(57)씨가 얘기를 꺼냈다.
“나 같은 경우는 아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했기 때문에 생계를 걱정하는 상황은 아니에요.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나한테 기대고 있는 작업자들이지. 17년간 같이 일한 사람도 있어요. 보통 일이 계속해서 이어졌는데 이번엔 이 공사가 끝나면 다음 공사가 없어요. 지금까지 4~5명의 기능공을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시켜왔는데 이 사람들이 걱정입니다.”
아파트 현장 주변에서 만난 한 일용직 근로자(59)는 “요즘 건설현장 일용직 근로자 중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 학기 등록금이 500만원이잖아. 자식이 한 명인가? 또 있거든. 진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오늘 새벽 5시30분에 용산 집에서 나와 6시30분에 서울역에서 기차 타고 이 곳으로 나왔어. 그나마 나처럼 열심히 해서 인정 받은 일용직들은 꾸준히 일을 주더라고. 근데 일 있으면 뭐해. 인력 사무소에 10% 수수료 떼고 나면 별로 남는 것도 없는데. 거기다 중국인 근로자들이 오면서 일감이 더 줄었어.” 오전 11시50분이 되자 그가 흰색 안전모를 쓴 다른 일용직 근로자 두 명과 함께 기차역에 설치된 계단으로 내려갔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뒤를 따라가자 그가 소리쳤다.
“따라올 거 없어. 다들 똑같은 소리 할 테니까. 아까 말했잖아. 요즘 건설현장에 안 힘든 사람이 없다고. 몇 살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도 성실하게 살아야 해. 그래도 성실하면 일거리가 좀 있더라고.”
/ 소재웅 인턴기자·고려대 언론학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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