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봉황이 알 품은 지세, 武人의 기운 발원

화이트보스 2009. 1. 14. 15:59

[풍수기행]봉황이 알 품은 지세, 武人의 기운 발원

[풍수기행]<6> 西倉의 2개 양택지 (하)김동신 前국방부장관 생가 봉학마을
무등산 달려오다 솟아오른 제 1산맥 마을서 보면 포근, 주변 조화도 절묘


 


김동신 전 국방부장관 생가에서 바라보면 봉황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김 전 장관 생가는 포근함과 주변의 조화로운 구조가 돋보인다.


‘하늘의 별따기’라 할 만큼, 어렵고 험난한 역경을 딛고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이른바 장상(將相)으로 불리우는 김동신(金東信) 전 장관이 태어난 또 하나의 양택명당인 봉학(鳳鶴)마을을 찾았다.

봉학마을은 이 마을을 이루기 위해 내룡한 산맥이 무등산으로 부터 달려오다가 서창지구에 이르러 가장 힘차고 후중하게 솟아 올랐다.

특히나 구룡마을 및 봉학마을의 2대 양택길지를 형성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땅의 기운을 응결시켜 가다듬은 중조산(中祖山)격이라 할 송학산(松鶴山)의 鶴자와 봉황산(鳳凰山)의 鳳자를 따서 합성한 동명(洞名)이 바로 봉학마을이라고 한다.

봉학마을 역시 봉황산의 정기가 오롯이 마을터로 모아져 아늑하게 자리잡아 성서로운 기운(氣運)이 감도는 전형적인 양택명당임을 한눈에 알아 볼수가 있었다. 오히려 봉황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마을터 보다 마을에 들어서 느끼는 포근함과, 주변의 조화로운 구조가 더 돋보였다고나 할까.

같은 봉황산 자락의 출신이지만 봉학마을을 이루기 위해 발원(發源)한 주산의 모습은 둥그스레한 구룡터의 발원처와는 사뭇 다른 우뚝 솟은 목성체(木星體) 수봉(秀峰)인 것이다.

바로 그 아래에 또 다시 지기를 응축시키기 위해 형성된 낮으막한 산(玄武峰이라고 함) 봉우리는 마치 한자 ‘一字’모양으로 산 정상이 이뤄진 토성체(오행의 水, 火, 金,

木, 土 중 土를 일컬음)를 이루었으니, 국중(國中)에서 이름이 알려질 수 있는 걸출한 인물이 배출됐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그 현무봉의 토성체(一子文星)에서 내려온 산맥은 우선(右旋·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휘돌아 내룡한 산줄기)을 거듭하며 마무리하는 산맥이 낮으막하면서도 힘차게 후중한 만두(巒頭·한 덩어리의 큰 봉우리)를 형성시켰다.

이후 다시 한번 회두(回頭·돌아서 산줄기의 머리를 진행시킴)해 사뿐히 내려 앉은 그 곳에 자리잡은 평범하면서도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며 관리한 고택(古宅)이 바로 김 전 장관의 생가였다.

이 터 역시 회룡고조형세(回龍顧祖形勢)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 그 물형(物形)은 봉황포란(鳳凰抱卵·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라는 이름이 붙여질수 있는 형국이 아닌가 여겨졌다.

그 집터가 조금 높은 지대에 자리잡았으면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봉황이 집을 찾아 날아드는 형국)으로 보이겠지만 본양택지(本陽宅地)는 가장 끝자락의 낮은 곳에 자리잡았으므로 봉황포란형이라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성 싶다.(물론 물형이란 보는 사람의 시각적 관점에서 달리 설정될수 있으니 그 점 이해 바란다)

봉황산을 동일한 주산으로 삼아서 구룡터와 봉학터의 양택지를 결혈(結穴)시킨 2대 명당을 돌아보면서 한 곳은 부국(富局)의 양택명당이고, 다른 한 곳은 무인(武人)의 귀격(貴格) 양택명당으로 나뉘어졌음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것은 어디에 연유한 것일까. 독자들의 궁금증이 클 것이지만 지금 당장 그 까닭을 밝혀서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은 크게 무리한 것이라 여겨 이쯤에서 극을 맺을까 한다.(전문가들은 별도의 상자 기사를 참고하기 바람)

구룡마을과 봉학마을의 이야기를 멈추면서 못내 안타까움으로 남는 것은 이렇듯 검증된 명당터를 그냥 보존하고 관리하는데에서 한 걸음 나아가 후손들을 살게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생기있는 자연환경을 우리의 삶에 유익하게 활용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삼고 있는 풍수지리학의 본질에 접근시키는 일이야 말로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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