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2代에 걸쳐 명재상 나오고 將帥의 충절도 길이 남기니… 명성은 세세년년 전해져
[풍수기행]<7> 순창 황희 정승의 조부墓
|
사람은 누구나 현세(現世)에서 천수를 누리다 목숨을 다하면 내세(來世)로 돌아간다. 이런 피할 수 없는 생사의 법칙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소크라테스도 “인생 60이 넘으면 죽는 연습을 하라”고 말했다. 노후에 이르러 부질없는 탐욕과 아집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히 살길에 대해 사색하면서 자기정리에 임하라는 메시지를 전 인류에게 보낸 것이다. 사후 자기 한몸 의지할 곳을 선택해 정하는 일은 필연적이라고 본다. 이 일을 풍수지리학에선 음택(陰宅·죽어서 묻히는 곳)이라 한다.
음택에 대한 학리(學理)나 그에 깃든 난해하기 이를데 없는 해설을 쓰기에 앞서 음택 풍수지리에 관한 몇가지 실제적 사례를 우선 소개할까 한다. 상당수 사람들이 현존하는 부귀영화에 대해 치열하리 만치 집착하고 추구한 까닭에 양택 풍수 이야기에는 귀를 귀울인다. 그러나 사후에 의탁할 음택에 대해서는 관심밖의 일로 여기거나 미신으로 터부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필자 역시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시작하게된 동기가 양택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음택 풍수지리에 얽힌 엄연한 사실을 접하고 부터 관심을 갖게 됐다고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영(先瑩)은 물론 죽은 뒤에 사람의 체박(體魄·죽은사람의 시신이나 유골)을 좋은 땅에 묻는 것이 결코 미신으로 치부해 버릴 하찮은 일이 아니라 매우 중시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그림1중앙#
조선조 500년 역사상 명재상 하면 황희 정승을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훌륭한 업적, 올곧게 산 황희 정승 삶의 궤적은 후세 사람들의 추앙은 물론 모범 공직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토록 유명한 인물이 배출된데는 여러가지의 변인이 있을 터지만 가장 확실하게 전해온 이야기는 방촌(尨村·황희 정승의 호)의 조부 산소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황희 정승의 조부가 홍곡단풍형(鴻鵠斷風形·기러기 또는 따오기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모양새)을 띤 음택명당에 묻힌 뒤 그 음덕으로 황희 정승이 태어났다는 음택 풍수지리의 이치가 있음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유명한 명혈대지를 구해 황희 정승 조부를 그 자리에 모시게 된데는 참으로 기이한 인연과 사연이 전해진다. 묘혈대지의 혈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지정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나옹대사다. 고려말 공민왕때 王師요, 지공·무학대사와 함께 3대 화상으로 불리운 나옹대사가 금강산을 거쳐 전라도 땅 남원의 한 산사에 머물렀을 때 일이다. 당시 고을의 재력가인 尹 進士에게 비홍재(풍수지리 양택과 깊은 관계가 있는 고개로 차후 소개할 예정) 너머 산촌마을 뒤에 홍곡단풍형의 명당대지를 잡아 주는 대가로, 3년여에 걸쳐 1천량의 돈을 갖다 불사(佛事)에 사용했다. 3년이 지나고 차일피일하다 명혈이 있는 곳은 알려주면서도 유독 재혈(裁穴·적확하게 묘터, 집터의 핵심자리와 좌향을 설정함)과 이장 택일은 알려 주지 않았다. 윤 진사는 노발대발해 나옹대사를 묶어 놓고 무수히 때렸다. 유혈이 낭자한 나옹대사가 광한루 앞을 지난 즈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방촌의 부친 황씨가 나옹대사를 집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고 나옹대사가 윤 진사에게 빚진 1천량을 대신 갚아줬다. 달포쯤 지나 황씨와 나옹대사는 홍곡단풍형의 명혈이 있는 비홍재를 찾아 나섰다. 이전에는 비홍재만 오르면 안개가 시야를 가리거나 많은 비가 내려 재혈을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따라 날씨가 화창해 그 명혈을 잡을 수가 있었다. 방촌의 조부를 그 명혈에 안장한 후 나옹대사는 방촌의 부친에게 “하루속히 개성으로 이사하라. 2대후에 명재상 둘이 나오고, 충장(忠將) 한 사람의 후손이 나올 것이다. 이런 명성은 세세년년 전해질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이후 적성강 물이 보일때까지는 귀족명문의 맥이 유지될 것이나 그 후는 알 수 없다”고 알려줬다. 조선 세종때 방촌(1431년)은 영상의 자리에 올라 1449년 고령으로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 재임기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또 황희 정승의 아들 수신(1407- 1467)도 도승지를 거쳐 우상, 좌상, 영상에 올랐다. 황진 장군(?-1539)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권율 장군과 함께 3대장군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황희 정승의 조부장 이후 600년이 흘렀다. 그동안 적성강변의 토사가 밀려, 강 한 가운데 섬이 생겼다. 이에 따라 물줄기 흐름도 자연히 바뀌었다. 처음엔 화산(華山) 밑에 있던 강 유역이 1㎞밖으로 밀려났고 물줄기도 그 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황희 정승의 후손들이 유명한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나옹대사가 아니고는 몇백년 후사를 짐작이나 했을까. 그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나옹대사는 홍곡단풍형의 명혈이 귀인이 배출될 명당이나, 빈국(貧局·부자가 아닌 청빈한 귀인이 날 명당)이라 지근거리에 있는 부국지지(富局之地)인 숙호형(宿虎形·호랑이가 잠자는 형세)의 명당을 찾아서 조부 산소를 쓰게하는 배려까지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숙호혈은 전북 순창군 동계면 황곡에 위치하며 홍곡단풍형의 명혈과는 가까이 있다)
황희 정승 조부묘터 이야기는 세상사 모든 것은 주인이 따로 있는데 그 주인이 덕을 쌓고, 사람을 감동시키면 명사를 만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 그 인연으로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후손의 번창을 기약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남는다 하겠다.
'풍수기행 > 풍수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묘지 아래의 물은 분명한 상극, 사후세계의 안식 저해 (0) | 2009.01.14 |
---|---|
수맥과 풍수 (0) | 2009.01.14 |
순창 황희 정승의 조부墓 (0) | 2009.01.14 |
봉황이 알 품은 지세, 武人의 기운 발원 (0) | 2009.01.14 |
전문가를 위한 별도 설명 (0) | 2009.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