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집터와 묘터 이롭게…
<13> 명문가를 일으켜세운 烈女 絶孫위기의 남원楊씨 구한 李씨부인(하)
주위 산들, 어머니가 자녀 품듯이 감싸안고 뻗어내린 산맥, 혈의 근처에 이르러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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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 유산록(명당터의 목록을 적어 전하는 결록)에도 ‘적성(赤城)의 동북쪽 이십리에 금구예미, 평지혈락(平地穴落) 하였구나. 사방이 비습하여 물이 날까 하겠지만 혈을 찾아 쓰게 되면 세사황토(細沙黃土) 나겠구나. 차후에 사람들이 눈을 뜨고 이런 혈을 얻어 쓰면 용지삼년(用之三年)에 속발하여 만년 명부(名富)하리라. 이 산 주인 살펴보니 사람마다 주인이라. 이 말이 허언인지는 지내보면 알리로다….’
이 혈을 찾기 위해 전국의 지관들이 다녀갔지만 한결같이 진혈처를 찾지 못하고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고 한다.
구미리는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예사로운 땅이 아님은 선현들의 결록이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명혈대지를 맺으려면 무엇보다 그 후산과 그 것으로 이어지는 來龍脈을 먼저 살피는 것이 순서다. 그 것은 마치 발전소로부터 전선이 잘 이어지고 튼튼했을때 전등에 불이 밝혀지고 전기에너지를 받은 전자제품이 제대로 작동되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
땅에 흐르는 지기도 그 본원에서 이어지고, 그 이어지는 지맥도 제대로 법칙성에 맞아야 혈을 형성시킨다.
구미리까지 이어오는 來龍脈만 봐도 이 마을터는 참된 용과 혈의 적중함이 명당대지의 요건을 잘 갖춘 땅임을 가늠할 수 있다.
금남호남정맥은 장수 장안산과 임실 팔공산을 거쳐 진안 마이산으로 간다. 그런데 팔공산에서 남으로 뻗은 맥이 임실 성수산과 관촌면을 지나 봉화산과 응봉, 무제봉, 배재, 지초봉, 새목재, 원통산을 거쳐 내려오다 섬진강 상류 적성강을 만나 멈춘산이 바로 구미리의 주산 무량산이다.
무량산은 기세가 강한 석산으로 진안과 장수 경계인 팔공산으로 부터 관촌과 임실을 거쳐 순창군 동계에 이르기까지 수백리를 行龍해 오면서 아직도 강한 기운이 남아 도는 듯 산 정상이 험한 바위로 돼 있다.
이 강한 기를 털기 위함인지 무량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천심(穿心·마치 산을 뚫고 나타난 산맥과 같음) 용맥은 여러번의 기복과 박환(거친 산맥이 점점 부드러워지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맥의 꺾임(交度)을 통해 산맥을 타고 내려온 땅의 기운은 어느 한곳에서 맴돌아 서리게 하는 요건을 마무리하는 곳에, 대밭을 뒤에 두고 이씨 부인이 처음 정착해서 지금까지 지켜 내려온 남원 楊씨 종가가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 기세있게 내려온 산줄기가 지기를 서기로 바꾸어서 한 자리에 계속 맴돌게 하는 용맥의 정확한 흐름을 이른바 교규통맥이라 하는데 아무리 빼어난 산봉우리에서 힘차고 변화있게 뻗어내린 산맥일지라도 혈의 근처에 이르러 마무리를 제대로 못하면 결국 진혈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풍수지리학의 핵심중의 핵심인 용진혈적(龍眞穴的)의 이치인 것이다. 마을 건너편에서 무량산으로 부터 구미리까지 내려온 맥을 바라보면 풍수지리학이 실체가 불분명한 비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너무나 정확한 지기를 주체로 하는 과학임을 새삼 발견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량산(주산)과 그 천심맥이 살기등등한 석산 및 석맥으로 돼 있으므로 그 살기를 털어내고 순기만을 집터로 내려보내기 위해 산맥의 흐름에 직각을 형성하는 박환절룡처가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각을 이루거나 벌의 허리처럼 잘룩한 결인처가 있으면 강한 살기를 털어내고 순하고 이로운 지기만을 여과해 집터나 묘터로 이어지게 함으로써 이른바 집터가 강하거나 묘터가 강해 입을 수 있는 험살을 제거해 준다.
이처럼 마을터를 이루는 근본이라 할 수 있는 후룡이 대혈을 형성할 수 있는 요건을 만든데다 주위의 산들이 마을을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품에 안듯이 잘 감싸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챙기는 좌측의 청룡과 우측의 백호는 말할것 없이 마을 전면의 산들이 마을을 배반하지 않고 잘 어우러 안아주듯 휘감고 돌아가 물이 빠져 나가는 곳(수구)이 잘 닫혀 있다. 또 객수이긴 하지만 마을터의 국세를 멀리서 휘감아 돌아가는 적성강이 마을에 감도는 지기와 온기를 보호해 주는 拱背水의 역할을 잘해주고 있다.
#그림1중앙#
그리고 마을 앞 사이의 들판도 평면으로 잘 퍼져서 짜여 있어 흠이 없다.
또 마을터의 국내에서 흘러내린 모든 물줄기가 청룡, 백호안으로 흘러서 마을 앞으로 좌선수(좌측에서 우측으로 흘러가는 물줄기)의 횡수성을 이루니, 주룡의 우선룡과 어우러져서 그 또한 격에 맞다.
더구나 물이 한곳에 모아져서 그 흐름의 모습을 감추는 곳이 생가의 좌향(坐向)과 잘 조화를 이루었으니 그 형세나 이법이 잘 조화된 명혈의 여건을 갖추고도 남는다 하겠다.
다만 금구예미형의 명혈이 있다고 전해오는 구미리터가 거북이와는 상관없이 목마른 사슴이 물을 얻어 먹게 되는 이른바 갈록음수형(渴鹿飮水形)이라고 명명된데는 의아스러움을 떨칠 수 없다.
주위에 녹산(鹿山)이라 할만 한 산형을 가진 산도 없거니와 땅 이름에 사슴과 연관된 곳이 없으니, 이는 금구예미형을 찾지 못한데다, 그 혈이 음택인지 양택인지도 변별이 안되는 산록의 암시인 까닭에 굳이 금구예미형과 갈록음수형을 분리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이씨 부인이 천신만고끝에 현몽과 자기암시의 예지로 찾아 정착한 그 종가의 양택터가 구미리의 확실한 대지명혈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성 싶다.
가급적 좋은터에서 풍전등화격으로 끊어지려는 한 가문을 반듯하게 계승 발전시키려는 의지에서 그 길지를 만나게 됐으니, 거기가 곧 무량산이 만든 용진혈적의 진혈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종가 뒷쪽의 대나무밭에 족히 10여톤이 넘을 만큼 큰 직육면체의 검고 윤색이 도는 바위가 박혀 있다는 점이다. 이 암반은 주산이 석산이니, 그 혈처 역시 주산의 기가 거기에 이어져 있음을 증명해주는 소위 혈증으로는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이는 혈처에 감도는 지기를 감소시키는 변수가 되지 않을까 필자 혼자 해석해 보곤 한다.
그리고 이 바위를 굳이 녹갈암이라 이름 붙이고 종가의 왼쪽에 대모정(大母井)이라는 우물이 있는 탓에, 사슴이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 했다고 하니, 이는 너무 과정되거나 일부러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이 암석을 거북바위로도 해석하고 대모정과 관련시켜서 금구입수 또는 금구예미형이라고 명명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물형론(物形論)은 어디까지나 흥미를 갖게하고 때로는 그 혈처의 위치를 암시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혈의 형국에 따른 물형에 의해 묘터나 집터를 찾는 것은 시행착오나 오점의 요인이 될 소지가 많은 매우 위험한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물형론에 입각해서 구미리의 진혈을 찾는다 해도 주산의 옛 이름도 구악산, 즉 거북이 산이고 마을 이름도 구미리 인데다 구미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거북모양의 바위가 길가에 목과 몸이 분리된채 서 있고, 이에 얽힌 전설 또한 거북과 관련 깊은 혈이 이곳에 있음을 예감할 수 있다.
이 곳의 전설을 소개하자면 마을사람들과 취암사 승려들 사이에 심한 싸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로 거북이의 꼬리부분을 마을과 절쪽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 싸웠는데, 세에 밀린 승려들이 거북이의 목을 잘라 버렸다. 이후 절은 망해 폐사됐고 구미리는 번창했다고 한다. 구미리에 들어서면 깊은 산중인데도 전혀 산중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마을의 명당터 기운에서도 그러하지만, 그 옛날 큰 뜻을 바탕으로 고난을 무릅쓰고 이 곳에 정착해 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이씨 부인의 정성과 의지가 되살아나 훈훈하게 감싸고 있어 찾는이에게 감응된 까닭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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