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꿈속의 기러기 날아간 곳에 새터전 일구고 명가로 우뚝
[풍수기행]<12> 명문가를 일으켜세운 烈女 絶孫위기의 남원楊씨 구한 李씨부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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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양씨는 고려때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를 지낸 양경문(楊敬文)을 시조로 하는데, 그의 관직만 전해지고 자세한 생존연대 등이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고려 공민왕 4년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 대제학에 올라 그 가문을 번창시킨 양이시(楊以時)를 실질적인 시조로 삼고 있다고 한다.
양이시의 본관인 남원에는 양이시의 이전부터 여러대에 걸쳐 남원에 세거해 온 순수한 토착성씨라는 것을 남원 양씨는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 본래 개성출신인 이씨 부인은 고려 우왕 3년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 직제학이자 양이시의 외아들인 양수생(楊首生)과 결혼한다. 父子가 급제한 집안으로 출가해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고 부귀영화를 누릴것으로 예상됐던 그 녀에게 오히려 시련과 고난의 세월이 다가왔다. 신혼의 단 꿈이 채 가시기전 남편과 사별하고, 몇달사이로 시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행히 이씨 부인의 뱃속에는 남원 양씨의 대를 이어갈 일점 혈육이 자라고 있었다. 남편의 장례가 끝나자 마자 개가법이 상례화된 당시의 예에 따라 이씨 부인의 친정에서는 개가를 권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녀는 이를 물리쳤다.
이씨 부인은 몇달 뒤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는 서찰 한 통을 남기고 어린 유복자 양사보(楊思輔)를 품에 안고 개성에서 남원까지 천리길을 걸어, 남편이 살았던 남원의 옛 시가를 향해 내려왔다. 천신만고 끝에 남원에 내려온 이씨 부인은 막 자리를 잡자 마자 또다시 남원에 머물지 못하고 정처없이 피난길에 올라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당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이 토벌작전에서 쫓기고 쫓긴 나머지 남원으로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씨 부인은 어린 아들을 품에 안은채 안전하게 키울 요량으로 남원과 순창의 접경에 있는 대강면 24번 국도(현재)가 지나는 비홍재의 인근지역으로 피난오게 된다. 그 피난처가 높은 지대였던 탓일까. 거기서 바라보이는 전북 순창군 동계면에 아름답고 높이 솟아 있는 무량산(無量山)의 산세에 눈길이 미친 이씨 부인은 그 무량산 아래 아늑한 곳에 논밭을 일구고 살면 두 식구의 안전은 물론 생계도 걱정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림1중앙#
특히 오매불망 일념으로 한가지 뜻에 몰두한 탓이었을까. 하루는 피로에 지쳐 깜빡 깊은 잠에 빠졌는데, 마치 현몽이라도 내리 듯 꿈속에서 비홍재에 올라 나무로 만든 기러기 세마리를 날려 보냈다. 그러자 한 마리는 지금의 순창군 동계면 관전리로 날아갔고, 또 한마리는 동계면 구미리로, 나머지 한마리는 적성면 농소리로 날아갔다.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실제 나무 기러기를 비홍재에서 날렸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현실성이 떨어져 꿈에서 행한 것에 비중을 뒀음)
그녀는 기러기가 날아간 세 곳중 평소에 그려왔던 무량산 아래의 동계면 구미리로 이사채비를 서둘렀다. 그런 사연이 있은 뒤 부터 즉, 이씨 부인이 살터를 찾기 위해 기러기를 날렸다고 해서 이 재를 비홍재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삿짐이라 해 봐야 족보가 적혀있는 가승보와 시아버지와 남편의 문과 합격증인 양홍패(兩紅牌)가 전부인 그 녀는 어린 아들을 업고 구미마을로 내려갔다.
이때 이씨 부인이 가지고 있던 가승보와 홍패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구미마을 종가댁 바로 옆에 있는 제각에서 보존중이다. 이 가운데 홍패는 1981년 문공부에서 보물 제 725호로 지정했다. 구미리로 내려간 그녀는 기러기가 떨어진 집으로 들어 갔다. 그 집의 방 한칸이라도 얻어쓸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 집을 지키고 있던 노인은 “자기가 진짜 주인이 아니라 집주인이 올때까지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며 “바로 부인과 아드님이 이집 주인입니다”하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곳에 정착한 그 녀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아들 양사보의 글 공부시키는데도 온갖 정성을 쏟았다. 양사보는 성장해서 사마시에 합격했고 음사로 벼슬길에 나가 함평 현감을 지내는 등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양사보의 후손 중 8명의 문과 급제자와 10명의 무과 급제자, 30명의 진사, 생원이 대를 이어 나오니, 절손 위기에 있던 남원 양씨는 탄탄한 가문으로 그 명성을 드높였다. 한 여인의 헌신적인 자기희생이 한 가문을 되살린 것이다. 그 보다는 풍수지리의 안목이 없어도 지성으로 간구하고 집념으로 구하면서 뜻을 세우고 좋은 땅을 찾아내 후대의 번성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열성이 있으면 명당 길지를 구할 수 있다는 훌륭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요즘 집터나 선영의 묘지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먼저 생각한 것이 발복에 있다는 것을 보면서 이씨 부인의 넓고 원대한 뜻에 따라 살터를 구하고 자기의 묘터를 정한 과정은 정말 후세의 귀감이자 교훈으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좋은터를 찾아 삶의 터전을 삼고 길지에 선영을 모시는 일에 있어,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 지기가 서린 땅에서 가족이 평온하게 살고, 서기어린 땅에서 선영이 편히 쉬면서 영면을 기하게 하려는데 구산(求山)의 목적을 둬야 한다.
이씨 부인의 정성에 힙입어 4대가 연속 문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려, 남원 양씨의 명망이 일세에 떨쳤을 뿐 아니라 조선조 세조는 1467년 이씨 부인에게 정려(旌閭)를 내려 후손들에게 그 정절을 기리도록 했다.
훗날 이씨 부인의 산소는 기러기 한 마리가 떨어진 순창군 적성면 농소리에 썼는데, 시아버지 양이시의 묘단을 위에 세우고 그 아래 남편 양수생 묘단과 함께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이씨 부인이 구미리에 터를 잡고 정착한 이후 23대, 약 600여년동안 대대로 종손이 종가를 지키고 있다.
그러면 구미리는 어떤 곳인가. 구미리 양택길지를 만든 마을뒤의 주산은 무량산(586.4m)이다. 풍수지리학에서 인물이 많이 배출케 한다는 목성체의 주산 무량산은 풍수지리학적 관점을 떠나서 누가 봐도 빼어나게 솟아 올라 세워진 수봉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마을 명당터로 만든 이른바 진산이라 할 수 있는 무량산은 옛 이름이 구악산, 즉 거북산이었다. 그래서 그 마을터에는 거북과 관련된 금구예미형(金龜曳尾形), 즉, 영험스런 거북이가 꼬리를 끌면서 진흙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인 명당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구미리(龜尾里)라고 했다 한다. 다음회에 구체적으로 설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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