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혈처의 아름다움과 주변 산세 잘 조화
<11> 명문가를 일으켜세운 烈女 장성 북이면 閔할머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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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올 곧은 삶의 선택, 자기희생을 감수하며 한 가문의 지킴이가 돼 시댁을 명문가로 번성시킨 열녀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싣고자 한다. 시대적 배경으로 봐서 남자들도 접근하기 어려운 풍수지리학을 직접 연구했거나 그에 관한 깊은 관심과 실천의지로 양택이나 음택을 손수 잡아 한 문중의 중흥의 기틀을 세운 공이 인정돼 지금까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어 볼까 한다.
맨 먼저 음택명당중의 하나로 인정된 곳이 전남 장성군 북이면 달성리에 있는 閔씨 할머니 산소다. 민 할머니의 산소를 일컬어 명정 복부형(伏釜形)의 혈이라고 한다.
그 혈의 생김새가 마치 솥이 엎어져 그 소리가 사방을 울린다고 할 만큼 흡사 복부(伏釜) 모양으로 생긴데서 유래됐다. 민 할머니가 오랜 풍수지리학의 연구끝에 지어낸 저서 ‘荷沼訣’의 서문에 쓰여진 내용중 “우리나라 3대 명당인 명정 복부혈”이라는 문구가 있다. 민 할머니 산소에 들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설령 풍수지리에 문외한 사람이라도 명당중의 명당이라는 생각을 갖게 할 만큼 그 형세나 짜임새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이 명혈에 모셔진 분이 다름 아닌 울산 金씨를 멸문의 위기에서 구출해 오늘날 명문가로 번성시킨 민 할머니다. 이렇듯 여성의 몸으로 이런 대지명혈을 찾아쓰게 한 민 할머니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할 것이다. 민 할머니는 울산 김씨의 중시조인 김 온의 부인이다. 김 온은 양주목사를 지냈으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뜻을 함께해 흥령군의 군호를 하사받는 등 조선건국의 공신이었다. 그러나 조선 태종의 지나친 외척배격에 휩쓸려 결국 화를 입게된다. 荷沼는 민 할머니의 아호인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민 할머니의 저서이자 풍수지리서인 하소결(김병채 발행)의 머리말에 쓰여진 내용을 살펴 보면 그 사연은 더욱 확실해 진다.(필자가 이 책자를 어렵사리 구해 보관 중임)
피난길에 거느리고 온 3형제는 장남 達根, 차남 達原, 3남 達枝였다. 장남은 훗날 경상도 쪽으로 옮겨 살게 됐고, 차남과 3남은 장성에서 삶의 터전을 일군 후 점점 번창해 전북 고창땅으로 그 세가 확장된다.
민 할머니는 조선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풍수지리학 역사상 유일한 여성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그의 아호 하소를 딴 하소결은 정통 풍수지리의 귀중한 문헌자료다. 지금까지 지리학 연구의 소중한 지표로 삼을 정도다. 그런 높은 안목을 지녔기에 피난길에서도 아무데나 정착하지 않고 노령산맥의 갈재에 이르러 산세의 흐름을 살펴 그 기가 장성의 맥동(장성군 황룡면 소재) 복부혈에 응결되었다고 판단해 양택과 음택을 선정했을 것이다.
일단 명정 복부혈인 민 할머니의 묘역에 들어서면 본래의 지형과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성들여 조성한 조경과 후손들이 긍지를 갖고 수련과정을 거치는 울산 김씨 청소년수련관이 반듯이 자리잡고 있다. 적절한 장소에 세워진 비석하며 ‘말탄 자손들이 밀등에 가득하리라’는 민 할머니의 유훈이 새겨진 표지석도 눈길을 끈다. 필자의 추측이지만 아마 민 할머니는 이런 생각으로 이런 유훈을 남기지 않았을까 싶다. ‘본 명당길지를 내가 지키고 있어 그 음덕이 후손에게 미치게 될 터이니, 정녕 울산 김씨 후세들은 큰 인물이 배출돼 국가의 동량이 되리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 민 할머니 산소는 동산처럼 둥그스렇게 생겨 덩실하게 솟아 결혈된 그 만두의 상단에 안치돼 있다. 혈처의 뛰어나고 아름다움과 주변의 산세가 한데 어우러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 이곳이 명당이구’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다시 말해 주룡(혈을 형성시켜 주는 요건이 갖춰진 산봉과 그 용맥)의 생동적인 내룡의 형세와 혈까지 이어지는 용의 행도에 또 한번 감탄하게 된다. 이 명당대지의 발복에 의해 민할머니의 ‘말을 탄 자손이 밀등에 가득하리라’는 예언처럼 울산 김씨 문중에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인물이 많이 배출됐다. 물론 그 모든 인물이 북부혈의 음덕으로 배출되기에는 그 발복년수가 수백년에 달해 다소 멀기는 하지만, 산서에 이르는 것 처럼, ‘산이 산을 불러’서 명당으로 인해 울산김씨 후손들이 또 더 큰 명당을 얻어 썼을 것이니, 그 인맥이 여기에서 그칠 것인가. 김 온으로 부터 5세손이고 그의 둘째 아들 달원으로 부터 4세손인 하서 김인후(1510~1560)선생은 조선조 학문의 거봉으로 추앙받고 있다. 인촌 김성수(1891~1995)씨는 동아일보 창간, 고려대학교 설립에 이어 부통령까지 지냈다. 이밖에도 울산 김씨로 근현세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은 수 없이 많다. 이렇듯 한 열녀가 한 가문의 번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 후세에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하겠다. 필자는 열번도 넘게 민 할머니의 산소에 찾아가 옷깃을 여미어 경의를 표 바 있다. 오늘날 보통사람중 민 할머니의 그 큰 유업을 생각하기라도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돌아올 때마다 상석(上席)에 계신 민 할머니 자리에서 방장산 방향으로 살며시 내려가는 손괘맥(동남에서 서북쪽으로 뻗는 맥)의 회미룡(回尾龍)을 밟아 보면서, 어줍잖게 풀리지 않는 혼자만의 궁금증으로 아쉬운 발길을 돌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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