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청룡이 강을 건너는 형상의 명혈

화이트보스 2009. 1. 14. 17:13

[풍수기행]청룡이 강을 건너는 형상의 명혈

<10> 爲先의 일념으로 얻은 음택명당 -교육자 박 모씨의 사례


 






벌써 5년전쯤의 일이다. 필자와 동향이자 교직 후배인 박종곤 선생(현재는 산수초등학교장으로 근무중이지만 당시는 교감이었음)과 고향땅 구례로 향하고 있었다.

곡성군 압록을 지나 구례땅이 보이기 시작한 어느 지점에 이르러 필자가 박 선생에게 구례군 일우의 산을 가리키며 “저 동해(東海)마을 앞산 높은 곳에 옛부터 명혈이 전해오고 있느니, 한번쯤 확인한 후 산을 구해 보라”고 권했다.

이어 “저런 산중 마을의 이름에 바다해자가 붙게된 데는 그만한 연유가 있을 터이니, 배가 바다로 나아가는 모양의 명당인 行舟形이나, 청룡이 강을 건너는 모양의 명혈인 靑龍渡江形 등 물과 관계 있는 음택명당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은가”하고 부연설명까지 해줬다.



당시 필자가 박 선생에게 이런 설명을 해준 연유가 있었다. 그 때로 부터 거슬러 2년6개월쯤 전, 박 선생의 집안에서 숙원사업으로 여겼던 부모 산소를 조부모 산소가 있던 곳으로 이장했으나, 난데없이 또 다른 곳으로 옮겨여야 할 난감하고도 급박한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림1중앙#

박 선생은 평소에도 사부곡을 부를 만큼 효성이 지극했으나 부친이 돌아가신지 15년이 지나도록 동산(洞山)의 공동묘지에 모신 것을 몹시 가슴 아파하던 중 필자의 권유에 따라 풍수지학 연구 모임인 효풍학회에 참여하면서 풍수지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박 선생이 당시 풍수지리학을 취미와 여가선용의 측면에서 무게를 둔 듯 했으나 사실은 자신의 부친을 길지로 이장하려는 의지가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박 선생은 필자에게 선영 이장일을 부탁하고 나섰다.

장지는 풍수에 관심과 믿음이 남달랐던 박 선생의 조부가 쌀 80가마를 주고 샀던 조부모 산소 옆으로 부친의 묘소를 이장한 것이다.

말하자면 선영하로 부모 산소를 이장한 셈이다. 용맥의 언덕옆에 쓰여진 조부모 산소를 언덕 위 정혈(定穴)로 옮겼음은 물론 그의 부모 역시 그 맥의 아래쪽으로 20여m 떨어진 곳으로 이장했다.

당시 효풍학회 회원 모두가 이장한 묘지를 돌아보고 큰 길지에 속한다는 평가를 내렸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일을 서두른점은 참 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 하면 조부의 묘를 파보니 체백에 나무뿌리가 잔뜩 휘감아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았던 까닭이다. 박 선생은 흉터에서 고생한 선조의 혼백을 윤색이 나고 고슬고슬한 길지로 옮겨놓은 보람과 뿌듯함으로 잔디와 나무를 가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느닷없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박 선생이 옮긴 선영 묘역 바로 옆에 있던 한 문중에서 자신들의 땅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해 버렸다. 오직 후학 양성에 힘써온 박 선생의 입장에선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조상을 잘모시자는 일념에서 추진한 일이지만 경계측량 등 법적인 문제에 손쓸 여지가 없었던 게 화근이었다.

서둘러 확인한 결과 인접한 문중땅 10여평을 잠식했다.이 땅을 매입하려고 통사정을 했으나 여의치 못한 나머지 부득이 선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만 했다.

이런 연유로 또 다시 적당한 묘터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차에 박 선생과 필자가 우연히 구례땅을 가던중이었다.

그 동해마을 앞의 높은 산을 구해보라는 필자의 말에 박 선생의 귀가 번쩍 뜨였다고 한다. 박 선생은 그 해 여름방학 동안 동해마을 예의 그 앞산에 올라가 현장 확인에 들어갔다. 산 정상 부근에 누군가 개간을 해서 당두충과 잣나무, 밤나무등을 심어놨는데 그럴싸한 곳이 눈에 띄어 곧바로 필자에게 전화를 해 왔다. 필자는 당시 순창 아미산밑에 국회의원을 배출했다는 음택지를 돌아보고 오던중 박 선생의 전화를 받고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박 선생이 봐 둔 땅에서 다시 용맥을 따라 내려 오던 중, 명당의 요건을 두루 갖춘 곳을 발견했다. 밤나무밑에 알아보기 어렵게 자리잡고 있었다.

더욱이 산아래 섬진강의 대강(大江)이 案山과 朝出을 껴안고 돌아가는 것과 어우러져, 이름하여 청룡도강형이 분명했던 것이다.

산도에서 보듯이 둥주리봉을 주산으로 삼고 기복과 위이(구불구불), 결인(結咽), 박환을 거쳐 혈이 있는 곳까지 잘 이어져 마무리된 것이, 볼수록 수혈(秀穴)로 돋보였다.

필자는 박 선생에게 권했다. 농장의 주인을 찾아가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혈장 주변 땅 500평을 구해보라고. 뒤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그 농장은 6.25 피난민의 후손인 김씨 노인(당시 72세)이 26년 세월동안 젊음을 바쳐 가꾸어온 피와 땀이 베인 땅이었다고 한다. 박 선생의 끈질긴 설득끝에 생각보다 싼 값에 1만8천평을 사들였다.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 마침내 박 선생은 조상의 묘를 동해마을 앞산으로 이장했다. 말썽이 됐던 구묘터가 있던 그 혈도 분명 풍수지리학적으로 길지였던 점은 확실하다.

그것은 이장하던 날 바로 입증된 탓이다. 구묘터로 이장할때 보기 흉한 검은색을 띠었던 조부의 체백이 다시 이장하기 위해 파보니 황골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책에서나 전해오던 이야기를 사실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아무리 나빠진 체백도 길지로 이장하면 다시 윤기가 흐르고 황색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박 선생 조상의 사례에서 확인한 것이다. 산서(山書)에는 산이 산을 부른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명당이 명당을 부른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박 교장의 선영을 모셨던 그 구묘터가 분명히 명당이었고, 그 명당이 더 큰 명당(동해 마을의 앞산으로 이장한 것)을 쓰게한 것이다.

수많은 애로사항을 극복하고 또다시 동해마을 앞산의 청룡도강형으로 조상의 묘를 옮길 당시 박 선생은 교감이었지만 이후 교장으로 승진했다.

박 교장의 부인 역시 이후 교감으로 승진한 후 얼마전 교장 승진 연수를 마치고 내년쯤 교장으로 승진한다. 또 박 교장의 장남도 그렇게 어렵다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현재는 부모와 함께 공직자의 길을 걷고 있다. 성묘 다니기 편한 곳에 조상을 모시고, 벌초마저 손쉽게 남의 손에 맡겨 버린 요즘 세태에 견주어 볼때 박 교장의 이런 끝없는 위선(爲先·선영을 음택명당에 모시는 일) 노력은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하겠다. 그래서 소개한 것이며 그의 효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 기사 목록으로 ]     [ 프린트 서비스 ]      [ 메일로 보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