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섬진강물 머문다는 섬거땅 연유에 신비 더해”

화이트보스 2009. 1. 15. 15:09

[풍수기행]“섬진강물 머문다는 섬거땅 연유에 신비 더해”

<22> 선대의 혜안이 예지한 땅- 수어댐 공사로 하루아침에 마을이 사라진 飛村(상)


 


수어저수지가 조성된 뒤의 비촌 모습. <가>지점에 보이는 마을에는 이 곳 농토를 대토삼아 높은 곳으로 이주한 소수의 주민이 살고 있다. <나> 지점은 섬진강에서 통수돼 온 물이 하얀 물보라를 보이고 있다.


飛村(비촌)은 선대의 예언대로 인접한 마을까지 물에 잠기면서 이름 그대로 하루아침에 마을이 없어지고 말았다. 깊고 넓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날멀(날아갈 마을의 속칭)과 어치골은 지난 1974년 수어댐 공사가 착공되면서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떠나고 대신에 수어저수지가 들어서 거대한 호수가 생겨났다. 수어저수지는 처음엔 여천공단(현 여수산단)의 공업용수로 공급되다가 지금은 광양제철소의 공업용수로 전용되고 있다.

100여호가 넘는 마을이 없어지고 살던 사람들 중 극소수가 윗쪽 언덕으로 이전하고<사진 참고> 모두가 연고지를 떠나 실향민이 됐다.

선대의 예언성 지명대로 마을이 온데 간데 없이 날아가 버려 결국 이름 그대로 飛村이 되고만 셈.

원래 비평리(비평과 평촌을 통칭)를 날멀(날아갈 마을의 속칭)로 불리어 왔으나 이 마을은 창원 황씨의 집성촌이기도 했다.

항일 독립투사 황병학의 장형이며 구한말 의병활동을 했던 황병중(1871년생)은 덕망있는 유림학자로 비촌마을에 운수장이라는 고암서실을 짓고 은거하면서 후학양성에 앞장섰다.

옛날 이곳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백학동 공새바위에는 병화불입지지(兵火不入之地), 즉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땅임을 암시하기도 했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인물의 고장이라고 해서 기념비가 세워진 것이다. 원님까지 말에서 내려 예의를 표할만큼 비평리는 인물의 고장이었다. 자유당 시절에도 국회의원 황숙현, 진흥원장 황호, 부산시청 내무과장 홍호현, 감사원 민원심의관 황호부, 교육계 황창운 등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빼어난 인재들이 배출됐다.

이렇듯 명문 고장을 지켜왔던 후예들이 하루아침에 선조의 숨결이 깃든 정든 땅을 뒤로 하고 이곳 저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공교롭게도 이곳 역시 하포땅과 함께 필자와는 매우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수어댐을 막기 전, 비평리와 경계를 이루면서 인접해 있는 섬거땅(蟾居·두꺼비가 산다는 것으로 직역됨) 각산 아래 한 모퉁이에 필자의 조모산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홍선출해형 명당을 찾아 골약땅 하포의 뱃등에 증조부모 산소를 이장했던 것 처럼 이곳 섬거땅 각산 아래 어딘가에 ‘갈우음수형’(渴牛飮水形), 직 목마른 소가 물을 마시는 형국의 음택명당이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할머니 산소를 옮겨왔던 것이다.

물론 수어댐 건설과 함께 조모산은 다시 본향으로 옮겼다.

#그림1중앙#

이번 소재를 얻기 위해 모처럼 찾아간 섬거땅과 인접한 수어저수지를 보면서 어린시절 선친을 따라 이곳까지 성묘를 다녔던 기억과 함께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다. 수백년 뒤의 변화와 발전상을 미리 내다보고 이 곳 수어저수지 물속 깊은 곳에 삶의 본향이 잠기게 될 촌락의 이름을 비촌이라 이름지었던 선대의 혜안과 예지력은 어디에 주안점을 뒀을까. 또 없어져 버린 마을 대신 넘실거리는 수어저수지의 물이 섬진강을 낀 이웃 다압면으로부터 통수돼 온 물로 채워져 마르지 않을 것을 내다보면서 수어저수지와 바로 인접한 지명을 ‘섬진강 물이 산다’는 섬거라고 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어느 불교학자의 말처럼, 두가지 방면에서 접근해 찾아낼수 밖에 없을 성 싶다.

두 가지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다.

이판이란 눈에 보이지 않은 데이터(?)를 가지고 사태를 파악하는 방법이고, 사판이란 눈에 보이는 데이터를 가지고 파악하는 방법이다.

사판은 드러난 현상에 대한 분석이라면 이판은 이면에 잠재돼 있는 부분에 대한 분석이라고나 할까.

전자가 합리적 파악이라면 후자인 이판은 다분히 신비적인 파악이라 할수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판과 사판 양쪽을 모두 봐야 한다는 게 고승들의 입장이다.

한쪽만 봐서는 미급이다. 이판과 사판을 모두 통과해야 실수가 적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판 사판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이걸로 보나 저걸로 보나 답은 하나로 나왔으니, 행동으로 옮길 수 밖에 없다’가 이판 사판인 것이다.

#그림2중앙#

불교의 화엄철학에서는 이 경지를 이사무애(理事無碍)라고 한다.

사판적 분석이야 세상사에 밝은 사람들이 많을 터이니 제쳐두고, 주로 이판의 입장에서 비촌과 섬거의 예언성 지명 연유를 캐 내기로 한다.

이판의 각론으로 들어가면 삼재(三才)와 만난다.

삼재란 천문, 지리, 인사를 포함한다. 대만 총통의 국사를 지낸 남희근(1918~)선생은 그의 저서 역경 계전별강에서 삼재를 명리(命理) 지리(地理) 의리(醫理)로 요약하고 있다.

이중 의리는 70년대 초반 대학 한의학과의 제도권에 들어와 학문적 위치로 자리잡았지만 명리와 지리는 여전히 제도권 밖에서 학문적 자리매김없이 그저 잡술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가 굳이 미흡한 지리적 안목이지만, 예언성 지명 등 풍수지리에 깃들어 있는 선대의 예지력에 따라, 그에 스민 깊은 연유를 살피려는 까닭은 사실과 현상 등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드러나 발생되거나 입증되고 있는 것을 아직 과학이 따라잡지 못해 그 검증이 확증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해서 마냥 미신이나 잡술정도로 치부해 버리면 이 분야의 학문적 연구는 소멸되고 말 것이라는 노파심에서 비롯됐다.

아니 언젠가는 임응승 신부의 말처럼 과학이 이 분야를 입증시켜 그 학문적 바탕이 인간의 삶을 더 기름지게 가꾸는 지혜로움으로 창출될 것이라는 믿음에 기조를 두고 있다. 이야기가 옆길로 벗어난 듯 하지만 따지고 보면 비촌과 섬거의 지명이 선현의 예언대로 실현됐음을 설명하자니 다소 부연된 사설이 길어졌을 뿐이다. 결국 이판의 속성인 신비성에 근접되는 지리적 안목에서 그 신비성을 풀어야겠지만 그에 관한 설명을 곁들인 것이다.

풍수이론을 어떤 시각에서 보면 ‘신명의 세계라고 하는 신비한 영역을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차원으로 유형화한 평균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통의 학문적 이론을 파고들면 어느덧 과학의 경지에 들어서고 있음을 깨우치게 된다.

이제 비촌과 섬거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선현들은 어떤 연유로 ‘날멀과 어치골’이 수어저수지로 물이 가득 채워지고 마을이 없어지고, 그 댐이 섬진강의 물로 채워져 섬거의 땅이 될 것임을 미리 내다보고 그런 예언성 지명을 남기게 됐는지를 따져 봐야 겠다.

신비의 베일을 벗겨가다 보니, 여기에도 쇠섬과 홍선출해와 같이 풍수지리적으로 천하대지의 명혈에 그 연원이 있음을 발견했다.

다음회는 하편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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