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6,25전쟁 자료

[스크랩] "6.25사변일 58주년을 맞아서"

화이트보스 2009. 1. 16. 22:2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6.25사변일 58돌을 맞아 호국영령과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는 의미있는 날 되세요*

            - 시인 서예가 한 상 진 옮김 - 한마음인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 모윤숙 [1909~1990]- < 나는 광주 칠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머리엔 끼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 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 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나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어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다.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아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 6.25사변일 58돌을 맞이하여! * - 글 영상 / 시인 서예가 한마음 (펌) -


"순국 전우의 명복을 빕니다"





 



      -----------------
      *좋은 교육자료(펌)

        "자녀들 교육을 위한 6.25의 생생한 자료"

                  - 생활시인 "한마음" 자료 제공(펌) -


        6.25 전쟁을 생생하게 알 수 있고

        어린이 대상의 사진이 많으며

        사진 해설 내용이 교육용으로 적합하다고 느껴

        재 전송하오니 손자, 손녀 등, 자녀 교육용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2007.6.14 김 형 원)



        사진들은 알바니아 태생으로 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한국전쟁을 취재한 미국의 저명한 사진가 디미트리 보리아(1902~1990)가 駐日 美극동사령부 사진반에서 일할 때
        한반도 각지를 돌며 촬영한 것이다.




        전쟁은 체면이나 양심, 도덕률.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 현실로 존재한다.

        유치원에 다녀야 할 나이의 어린이가 깡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낯선 얼굴들에게 손바닥을 벌려야 했다.




        나무뿌리라도 먹어야 산다.
        그리고 잡초보다 모질 게 살아남아야 했다.

        아이를 업은 소녀의 손에 쥐어진 나무뿌리는
        이 가족의 한 끼 식사일까, 아니면 땔감일까 ?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형제가 골목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전란통에 용케도 살아남은 이 소년 소녀들은
        시민혁명과 쿠데타, 군사독재와 경제기적의 한복판을 질풍노도처럼 관통하여
        "의지의 한국인"을 세계에 알리는 주역이 되었다.




        부모님은 피난통에 돌아가시고, 살던 집은 폭격으로 다 부서져 폐허가 된 터에
        어린 소년이 버려진 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고난의 1950 년대를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이 민족의 처절한 단면이다.




        찬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헛간이라도 좋았다.

        행색은 초라해도 카메라를 강하게 의식하는 이 초롱초롱한 눈매의 자매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




        개털모자에 항공모함같은 헝겊 군화, 곳곳을 기운 이 복장이
        195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대부분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추위만 이길 수 있다면 누더기가 다 된 솜바지라도 좋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2층 건물 곳곳에 피난민이 바글대고 있다.

        고함 한번 치면 풀썩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건물 모습이
        위기에 처한 조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엄동설한 추위를 피하기 위한 땔감도 넉넉지 못했던 시대에
        두 소년이 끌고 가는 수레에는 한 식구의 온기를 담보하는 행복이 실려있는 듯하다.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마음씨 좋은 미군 아저씨를 만나면
        미국으로 입양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연을 들고 포즈를 취한 소년들.
        전쟁의 傷痕(상흔)을 잠시 잊은 듯 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한 아이가 탈진 했는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마치 요즘 북한 장마당의 꽃제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미군 병사가 한 소년을 목욕 시키고 있다.
        소년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잔뜩 겁을 먹었는지 얼굴 표정이 굳어 있다.




        노인이 문 긴 담배대를 고개를 외로 꺽고 바라보는 소년과,
        소년이 손에 쥔 깡통 속을 바라보는 노인.

        전쟁은 노인의 빈 담배대와 소년의 빈 깡통 속에 있었다.




        봇짐을 등에 진 할아버지와 망태기를 손에 든 손녀.




        피난을 가는 일가족의 전형적인 모습.

        이렇게 지게에 가재도구를 싣고
        수백리 길을 걸어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길가에 앉아 참외 등을 팔고 있는 아낙들.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래야 날품팔이가 고작이었던 시절.
        한 지게꾼이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길가에서 잠들어 있다.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어린이.
        담요 한 장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더낼 수 있을까 ?




        포로수용소 내에서 친공 포로들이 제작해 걸어 놓은 선동 포스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똥통을 운반하고 있는 공산군 포로들.




        인민군 포로들의 숙소. 난민 캠프를 연상케 한다.




        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이 한가롭게 목욕을 하고 있다.
        피가 튀고 뼈가 조각 나는 포연 자욱한 전장은 이들에겐 일장춘몽이었을까 ?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취사장.흡사 무슨 공장을 연상케 한다.
        수만 명의 포로를 먹이는 것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무장 경비병에 둘러싸인 채 뭔가 지시사항을 듣고 있는 인민군 포로들.




        여유를 되찿은 인민군 여자 포로가 미소를 짖고 있다




        아직도 살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인민군 포로.
        탁발승처럼 모포를 가슴에 두른 것이 인상적이다.




        수용소 연병장에 모여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포로들.




        거제도 포로수용소 경비병이 인민군 포로들로부터 입수한
        철조망을 뜯어 만든 사제 무기와 도끼,칼 등을 들고 있다.




        가슴에 태극기와 양 팔뚝에 멸공,애국 이라는 글씨를 새긴 반공 포로.

        밤마다 親共(친공)포로와 反共(반공)포로들의 살육전에
        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태극기를 들고 공산당 격퇴를 환영하는 마을 주민들.




        삶과 죽음이 무시로 교차하는 전쟁에서

        운이 좋은 사람들은 살아나고,
        운이 다한 사람들은 한 점 흙으로 돌아갔다



                  - 시인 서예가 "한마음" 지료 제공(펌) -



         



        "자녀들 교육을 위한 생생한 자료"

            - 생활시인 "한마음" 지료 제공(펌) -


        6.25 전쟁을 생생하게 알 수 있고

        어린이 대상의 사진이 많으며

        사진 해설 내용이 교육용으로 적합하다고 느껴

        재 전송하오니 손자, 손녀 등, 자녀 교육용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2007.6.14 김 형 원)



        사진들은 알바니아 태생으로 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한국전쟁을 취재한 미국의 저명한 사진가 디미트리 보리아(1902~1990)가 駐日 美극동사령부 사진반에서 일할 때
        한반도 각지를 돌며 촬영한 것이다.




        전쟁은 체면이나 양심, 도덕률.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 현실로 존재한다.

        유치원에 다녀야 할 나이의 어린이가 깡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낯선 얼굴들에게 손바닥을 벌려야 했다.




        나무뿌리라도 먹어야 산다.
        그리고 잡초보다 모질 게 살아남아야 했다.

        아이를 업은 소녀의 손에 쥐어진 나무뿌리는
        이 가족의 한 끼 식사일까, 아니면 땔감일까 ?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형제가 골목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전란통에 용케도 살아남은 이 소년 소녀들은
        시민혁명과 쿠데타, 군사독재와 경제기적의 한복판을 질풍노도처럼 관통하여
        "의지의 한국인"을 세계에 알리는 주역이 되었다.




        부모님은 피난통에 돌아가시고, 살던 집은 폭격으로 다 부서져 폐허가 된 터에
        어린 소년이 버려진 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고난의 1950 년대를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이 민족의 처절한 단면이다.




        찬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헛간이라도 좋았다.

        행색은 초라해도 카메라를 강하게 의식하는 이 초롱초롱한 눈매의 자매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




        개털모자에 항공모함같은 헝겊 군화, 곳곳을 기운 이 복장이
        195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대부분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추위만 이길 수 있다면 누더기가 다 된 솜바지라도 좋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2층 건물 곳곳에 피난민이 바글대고 있다.

        고함 한번 치면 풀썩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건물 모습이
        위기에 처한 조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엄동설한 추위를 피하기 위한 땔감도 넉넉지 못했던 시대에
        두 소년이 끌고 가는 수레에는 한 식구의 온기를 담보하는 행복이 실려있는 듯하다.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마음씨 좋은 미군 아저씨를 만나면
        미국으로 입양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연을 들고 포즈를 취한 소년들.
        전쟁의 傷痕(상흔)을 잠시 잊은 듯 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한 아이가 탈진 했는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마치 요즘 북한 장마당의 꽃제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미군 병사가 한 소년을 목욕 시키고 있다.
        소년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잔뜩 겁을 먹었는지 얼굴 표정이 굳어 있다.




        노인이 문 긴 담배대를 고개를 외로 꺽고 바라보는 소년과,
        소년이 손에 쥔 깡통 속을 바라보는 노인.

        전쟁은 노인의 빈 담배대와 소년의 빈 깡통 속에 있었다.




        봇짐을 등에 진 할아버지와 망태기를 손에 든 손녀.




        피난을 가는 일가족의 전형적인 모습.

        이렇게 지게에 가재도구를 싣고
        수백리 길을 걸어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길가에 앉아 참외 등을 팔고 있는 아낙들.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래야 날품팔이가 고작이었던 시절.
        한 지게꾼이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길가에서 잠들어 있다.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어린이.
        담요 한 장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더낼 수 있을까 ?




        포로수용소 내에서 친공 포로들이 제작해 걸어 놓은 선동 포스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똥통을 운반하고 있는 공산군 포로들.




        인민군 포로들의 숙소. 난민 캠프를 연상케 한다.




        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이 한가롭게 목욕을 하고 있다.
        피가 튀고 뼈가 조각 나는 포연 자욱한 전장은 이들에겐 일장춘몽이었을까 ?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취사장.흡사 무슨 공장을 연상케 한다.
        수만 명의 포로를 먹이는 것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무장 경비병에 둘러싸인 채 뭔가 지시사항을 듣고 있는 인민군 포로들.




        여유를 되찿은 인민군 여자 포로가 미소를 짖고 있다




        아직도 살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인민군 포로.
        탁발승처럼 모포를 가슴에 두른 것이 인상적이다.




        수용소 연병장에 모여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포로들.




        거제도 포로수용소 경비병이 인민군 포로들로부터 입수한
        철조망을 뜯어 만든 사제 무기와 도끼,칼 등을 들고 있다.




        가슴에 태극기와 양 팔뚝에 멸공,애국 이라는 글씨를 새긴 반공 포로.

        밤마다 親共(친공)포로와 反共(반공)포로들의 살육전에
        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태극기를 들고 공산당 격퇴를 환영하는 마을 주민들.




        삶과 죽음이 무시로 교차하는 전쟁에서

        운이 좋은 사람들은 살아나고,
        운이 다한 사람들은 한 점 흙으로 돌아갔다 (옮긴 글)





         



        출처 : 한마음
        글쓴이 : 한마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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