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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우정’으로 중병 이겨낸 고교동기생들

화이트보스 2009. 1. 21. 15:46

강철 우정’으로 중병 이겨낸 고교동기생들

“만나기만 하면 스트레스 몽땅 사라져 … 인생의 참 의미를 배워”

1964년 휘문고 졸업생 중 암·중풍·신부전증 걸린 9명…

한상범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제의로 결성

서로 격려하다 보면 학창시절 열정과 패기 되살아나…

건강한 동기생까지 합류해 연 2회 ‘신나는 외출’

“현재를 살아라!”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미래를 지레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금, 현재를 온전히 내 시간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더군다나 산도 들어 옮길 것만 같던 기개와 자신감으로 충만했고, 그래서 화려했으며 치열했던 과거를 가진 사내가 삶의 한복판에서 덜컥 ‘중병’이라는 암초에 걸려 죽음이 순식간에 코앞의 현실로 닥친다면, ‘현재’의 삶에서 여백을 가지며 살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그 힘겨운 현재의 고비를 담담하게 웃으며 ‘함께’ 넘는 이들이 있다. 이름만으로는 언뜻 그 모임의 성격을 가늠하기 어려운 ‘BS클럽’이 바로 그들이다.

환갑을 넘긴 휘문고 56회 동기생(1961년 입학)들로 이뤄진 BS클럽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풍 이상의 질병을 가진 이른바 ‘중병환자’여야 자격이 주어진다. 정회원 8명과 준회원인 집행위원장 1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이 만난 지는 올해로 47년째. 이 모임을 이끌고 있는 대한항공 부사장을 지낸 한상범(61·현 대한항공 고문) 회장은 3년여 전 임파선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4개월 동안 받은 투병 경력을 갖고 있다.


▲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BS클럽 회원들이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목이 부어서 병원에 갔더니 생각지도 못한 암 진단을 내리더라고요. 심적 고통은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모릅니다. 그때부터 집과 병원만 오가며 외롭게 투병하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죠.”

2004년 봄에 결성된 BS클럽은 ‘병든 신체를 가진 사람들 모임’의 영문 이니셜이다. 처음에는 ‘BELOVED SERVANT(사랑받는 종)’의 약자였는데, 모두들 “고상하게 지을 필요 없다. 우리 모두 병든 신체를 가졌으니 ‘병신(病身)’의 약자로 하자”는 데 동의했다.

“BS클럽 회장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UN 사무총장 되는 것보다 힘들어요. 왜냐하면 최소한 암에 걸려야 하거든.” 유머와 활력이 넘치는 그에게서 도무지 암환자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오죽하면 별명까지 암을 이겨냈다는 뜻을 담은 ‘암스트롱’일까.

BS클럽 회원인 김재홍(61), 이원영(63)씨도 못지않은 ‘암스트롱’이다. 2002년 알코올성 간암 진단을 받은 김재홍씨는 1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그야말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만 5년 동안 살고 있다. 물론 사업(항공화물업)은 접었고, 3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입원해 간동맥색전술(허벅지와 몸통을 잇는 동맥 부분에 국소마취를 하고 관을 통해 항암제와 젤라틴을 투입해 간동맥을 막아버려 암을 질식시켜 없애는 치료)을 받아야 한다. 암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산소공급 혈관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간에 있는 암 덩어리도 견디기 힘들지만, 사람도 20여일을 반시체 상태로 누워 있어야 할 만큼 후유증이 대단하다.

“딱 죽을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기 위해 그러는 거니까 어쩌겠어요. 참아야지요. 정작 가장 두려운 건 의사가 더 이상 이 시술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일 거예요. 그땐 꼼짝없이 하늘나라에 가야 하니까.” 지옥과도 같은 고통의 터널을 이를 악물고 헤집고 나오고 나면, 그때부터 석 달 동안의 즐거운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 술을 무던히도 좋아했고, 나이트클럽에서 바이어와 술을 마시다 고꾸라져 그대로 실려 간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은 김씨지만 BS 친구와 만나는 날은 술도 담배도 조금씩 맛본다.

“재홍이 이 친구는 워낙 술을 좋아해 많이 마셨으니까 간이 안 좋은 건 당연하다 쳐도, 나는 아니었거든요. 진짜 술도 즐기지 않았고 일과 가족 외에는 관심도 없었어요. 한마디로 착실하게 살았는데 덜커덕 인생의 걸림돌이 생긴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일하던 이원영씨에게 간암 선고가 내려진 건 1년 전인 2006년 3월이었다. 사전 자각증상도 없었는데, 정기검진을 받다가 암이 발견됐다. 처음엔 그저 억울하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왔고, 그 탄력으로 노년의 문턱도 끄떡없이 넘을 것 같았는데,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암’은 이씨에게 배신감을 안겼다. 건강만큼은 자신 있었고, 적어도 열심히 산 사람한테는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자존심도 상했고 화도 났다.

그래서 처음 석 달 동안 가족에게 발병 사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 혼자 서러움과 두려움을 끌어안고 끙끙거리다 항암치료를 받기 직전에 겨우 알렸다. 그런데 가족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어쩌면 그렇게 속일 수 있냐”는 타박이었다.

이씨 역시 간동맥색전술과 고주파 시술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다행히도 암수치가 정상으로 떨어진 상태다. “작년에 그렇게 투병하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놀 줄 모르고 취미 하나 없이 일만 하면서 살았던 삶이 자랑거리도, 잘 살아온 인생도 아니라는 것을. 주위도 돌아보며 살아야 했는데 철저하게 나, 내 가족만 생각하며 살았던 거예요. 죽음의 공포에 맞닥뜨리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한상범 회장은 BS 모임을 갖게 된 것도 자신이 암환자가 아니었으면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라고 한다. “암 선고를 받으면 다 똑같은 단계를 거칩니다. ‘이건 오진이야’ 하고 부정하다가 ‘왜 하필 나야?’ 하며 분노가 생기죠. 그러다 죽을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삶을 한 차례 정리하다 보면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요. 어찌 보면 암이 인생의 참 의미를 선물하는 셈이죠.”


▲ 2006년 4월 수덕사 야유회. BS클럽을 후원하는 동창들도 함께 갔다. 사실 환갑에 이른 사내들이 병과 씨름하다 보면 집과 병원 외에는 마땅히 만날 사람도 없고, 만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절망감과 패배감이 더 깊어지고 병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갈 때 가더라도 살아있을 때만큼은 즐겁고 편하고 정겹게 살아야 하지 않겠냐 싶어 하나 둘씩 집 밖으로 끌어냈는데, 모아놓고 나니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나 싶을 만큼 그렇게 서로 의지가 될 수 없다. 하긴 허물없는 고교동창인데다 같은 처지라 재고 뺄 것이 없다. 아픈 이의 모임이 맞나 싶게 서로 흉보고 킬킬거리고 장난을 치는가 하면, 여기저기에서 담배까지 피워 문다. 그래도 괜찮겠냐는 물음에 돌아오는 답은 간단하다.

“모임에 나오면 담배도 술도 약이 돼요. 서로 옛날 이야기하면서 웃고, 스트레스 없이 즐거우니까 그런 것 같아요.” 담배, 술이 독약이나 다름없는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허창린(62??繹=뵈?대표)씨의 말이다. 학창시절 아이스하키 선수였고,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그는 오래전 협심증 진단을 받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다가 결국 심근경색으로 2년 전 쓰러져 죽음 직전에 수술을 받고 살아났다.

“7시간 수술을 받고 48시간 만에 정신이 돌아왔는데 처음엔 내가 산 건가, 아니면 여기가 말로만 듣던 저승인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가 차츰 살았다는 확신이 들면서부터 옛날하고 다르게 살아야겠다 싶었습니다.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일하다 보면 열 받는 일도 많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때도 많거든요. 그런데 의식적으로 사는 태도를 바꾸게 되데요. 너그러워지고 용서하게 되고. 참 희한하죠? 산다는 것이.”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으로 간단치 않아서 이거다 싶어 달려가다 보면 막다른 골목이고, 된통 깨지고 지쳐 주저앉을 즈음에 슬쩍 길을 열어주곤 한다. 10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꼬박 1년을 누워 지내야 했던 이호종(62ㆍ남양주 장애인복지회장)씨는 그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수없이 비참했고, 수없이 죽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방법이 그에겐 없었다.

“약을 구하려고 해도 나갈 수가 있나, 목을 매달고 싶어도 일어날 수가 있나. 머릿속에선 죽어야지 생각해도 몸이 따라줘야 말이지. 이놈의 병이 죽지도 못하게 하는구나 싶은 게 참 한심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 죽을 힘을 다해 운동을 시작해 하루에 다섯 시간씩 동네를 걸어다녔다. 그리고 이제는 걷는 것이 약간만 불편할 정도로까지 몸이 호전됐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환자 같지 않다.

하긴 그건 BS 회원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원래 밝고 낙천적인 성격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함께 모여 있어서 그런 것인지. 그들의 답변은 ‘둘 다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도 죽음 가까이에 있는 몸 안의 병을 상대로 싸우다 보면, 기가 꺾이고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다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 본래의 낙천성을 되찾아주는 것이 바로 이 BS클럽이라는 얘기다.

그나마 유일하게 병색이 느껴지는 이는 1주일에 3번씩 신장 혈액 투석을 해야 하는 이상훈(62)씨다. 하지만 그 역시도 모임에 오면 아프기 전의 열정과 패기가 눈빛으로 살아난다. 친구들이 모두 인정할 만큼 호남아였던 이씨는 무역을 하며 세계를 돌아다녔고, 발병 당시엔 몽골에 있었다. 감기 증세인 줄 알고 찾아간 울란바토르의 한국 병원에서 앞뒤 돌아보지 말고 빨리 귀국해서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을 들은 후에도 보드카를 한 병씩 마셨다.

“귀국해서 병원에 갔더니 도대체 어떻게 견뎠냐면서 사형선고를 내립디다.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고서도 투석은 안 하겠다고 버텼죠. 근데 혈압이 뚝뚝 떨어지니까 견딜 재간이 없더라고요. 최고 혈압이 79까지 내려갔어요.” 결국 복막에 관을 삽입하는 수술을 했고, 2년 전 다시 혈액투석으로 바꿨다. 큰 고비를 맞고 보니, 그도 세상이 달리 보인다고 했다. 호기를 부리던 옛날엔 껍데기만 보고 판단했는데, 이제는 진실을 가까이 볼 줄 아는 혜안이 생겼다는 것이다. 바로 한상범 회장이 말한 병이 안겨준 ‘선물’을 그 역시 받은 것 같았다.

인생의 깊이를 깨달을 즈음, BS 회원이 한결같이 느끼는 것은 아내의 존재감이다. 혈기 넘치고 바쁘게 살던 과거엔 아내는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존재일 뿐이라고 느꼈던 무심하고 투박했던 남편들. 그러나 통나무 넘어가듯 쓰러진 후 찾아온 두려움과 슬픔, 외로움의 시간을 공들여 채워준 것은 아내들이었다.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저마다 목소리가 커진다.

“우리 BS클럽 회원의 아내들은 날개 없는 천사예요. 부인이 없었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지금쯤 모두 서울역에 노숙자 신세로 나가 있을 걸요.”

“우환이 도둑이라고 집에 우환이 생기면 가장 고생하는 건 집사람입니다. 아프니까 짜증내기도 하는데 그걸 다 받아줍니다. 누워있는 1년 동안, 아내가 대소변을 다 받아냈어요. 집사람의 간호와 격려가 없었으면 이 자리에 나와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이호종씨는 젊은 시절 그리 살가운 남편이 아니었는데, 병석에 누운 자신을 눈 한 번 흘기지 않고 간병해준 아내를 보면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했다.


▲ 지난 1월 안나푸르나봉 앞에 선 한상범 회장(왼쪽). 그 옆은 이장호 감독. 슬픔과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들 한다. 병은 숨기기보다 알려야 한다. 그래야 극복하는 방법이 생기고, 함께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법이다. BS클럽 회원은 휘문고 56회 동창회의 소모임일 뿐이지만 이들이 1년에 두 차례, 봄?÷?위로여행을 갈 때면 전체 동기들이 들썩거린다.

원래는 비용 일체를 한 회장이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했는데, 동기들이 같이 하고 싶다며 십시일반 후원금을 내놓았다. 30여년간 당뇨를 앓고 있지만 아직 정식 BS 회원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며 불평 아닌 불평을 하는 집행위원장 홍왕선(62??뉴타자학원 대표)씨는 그 동안 위로 여행을 준비하면서 놀라운 동기들의 힘을 체험했다.

“어차피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 둘씩 BS 회원이 될 테고 그래서 어쩌면, 어느 날엔가는 동기 모두 BS가 될 터인데, 회원이냐 아니냐를 가를 필요가 뭐 있냐는 거예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그냥 동기이고 친구라고만 생각했는데, BS클럽에 대해 마음 쓰는 걸 보면서 솔직히 감동했습니다.”

현재 휘문고 56회 동창회 회원은 230명쯤 된다. 이들은 정기적인 BS클럽 위로잔치를 열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고 20~30명 정도가 후원금을 낸다. 2006년에는 BS클럽 회원과 건강한 동기 50여명이 함께 버스를 대절해서 봄(충남 수덕사), 가을(경북 문경새재) 야유회를 다녀왔다. 올해는 4월에 갈 예정이다.

환자들이 있어 차로 2시간 거리에 온천이 있고, 먹을거리가 풍부한 장소를 고르다 보니 먼 곳으로 갈 수도 없고, 자고 올 수도 없지만 함께 간다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학창시절 소풍가는 것처럼 설레고 즐거웠다며 입을 모은다. 혹시 건강한 친구를 보면 자신의 몸이 온전치 못한 것이 비교돼 우울해지지는 않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는 자존심 다 버렸어요. 그리고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자란 친구인데 무슨 허물이 있겠어요. 다 대머리 되고 백발 됐는데 가리고 말고 할 것도 없죠. 그런데 부부동반 모임은 일부러 하지 않아요. 부인이 자기 남편하고 비교하면 속상할까봐 배려하는 거죠. 대신 부인에게 가져갈 선물은 좋은 걸로 준비합니다.”

병을 극복했다는 것의 의미는 ‘완치’일 수도 있지만, 그 두려움과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지난한 탈출과정에서 따뜻하게 손잡아주는 이는 분명 아내와 가족이지만,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할 이들이 있으면 그 시간은 훨씬 빨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BS클럽 사람들은 암과 함께 살아도, 이틀에 한 번 투석을 해도 틀림없이 ‘병’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진 몇 장을 찍자는 말에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을 외치는 이들, 한 회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병신들, 출세했네!”

최경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