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박실·강골마을 수많은 인재 배출한 양택명당”

화이트보스 2009. 1. 22. 13:45

[풍수기행]“박실·강골마을 수많은 인재 배출한 양택명당”


 






보성지역 양택명당 중 강골은 조선시대 문무과에 등제한 인물이 모두 5명이고 음직(蔭職)에 나아간 사람도 2명에 달한다.

음직이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부모나 조부의 공으로 벼슬길에 오른 것을 뜻한다.

과거에 등과된 사람은 무과에 4명, 문과에 1명이다. 이는 양택이나 음택명당이 우선작국인 경우, 무부(武富)가 성하다는 풍수지리의 이치와 무관하지 않다.

박실마을에서 현대에 배출된 인물은 조사된 자료만으로 37명에 이른다. 이를 영역별로 분석하면 고시합격자 6명(행시 2명, 사시 4명), 교수 10명, 의사 13명, 관계진출 13명이다.

왕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물이 배출되고 있는 점에 비춰 박실은 양택명당으로 손꼽힐 만한 승지가 분명하다.

조선시대 명종조 영해부사를 지낸 양산항과 만경의 현령을 지낸 양철진은 음직이었다.

인조, 영조, 숙종조에 걸쳐 무과에 급제해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오른 양우급, 군자감정을 지낸 양경남, 부사를 지낸후 사후에 병조판서에 오른 양익표, 북부참군(한양경내수비대장)을 역임한 양두환 등은 모두 무인이다.

그리고 문과에 급제한 후 담양부사를 지낸 조정우가 유일하게 문인으로 기록된다.

현대에 이르러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한 인물이 무려 37명에 달한다. 1급공무원으로 재무부 이사관으로 재직한 양보승은 여수, 마산, 김포세관장을 역임했다. 양동관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역임했으며 역시 사시에 합격한 후 현재 연수중인 양지현은 앞으로 여성법관으로서 역량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역시 여성관료로 환경부에 재직중인 양한나는 행시 출신이다. 이들은 제주 양씨 문중이다.

그리고 진원박씨 문중에서도 사법고시에 합격해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박형관을 비롯 사시합격 후 연수중인 박형만, 외무고시에 합격해 미국, 이란대사관에 근무한 박윤주, 경찰대 출신의 전남지방경철청 경무과장으로 재직중인 박승주, 전남도교육연구원장과 교육위원을 역임한 박정주도 이 마을 출신이다.

이밖에 서울대 교수직에 오른 양동휘, 양동찬, 양동범과 전남대 교수 박형욱 등 12명이 교수로 활동하거나 퇴직했다.

부자간 의사인 박형근, 박규현을 비롯해 양근영, 양금열 등 8명이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공인회계사인 양동표 등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인물사를 종합해보면 박실 마을은 제주양씨와 진원박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서 인물이 끊임없이 배출된 것은 풍수지리의 이치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걸은 지령’에 근거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제 강골을 소개할 차례다.

강골을 방문하면서 광주이씨인 이태용선생의 안내를 받았다.

<산도>에서 보듯 갈골의 양택지는 작혈의 윤서(체계적인 순서)를 잘 형성하고 있다.

박실터를 만들기 위해 분지된 간룡에서 방장산(535.9m)으로 행룡해 나아가는 용맥이 파청치에 못 미쳐 350m가 넘는 성신을 세우고 그 개정처에서 홀연 낙맥한 생기맥이 순천-목포간 고속화도로에서 결인처를 만든가 하면 거기서 줄곧 비룡한 용맥이 덕산제를 끼고는 송곡리와 예당리의 경계를 이루면서 위이, 기복, 과협을 거듭하다 우선으로 회룡해 127.5m의 성신을 세운다.

이 산봉이 강골터를 짓기 위한 주산이자 이 부근의 진산에 속한다.

주산에서 크게 낙맥 결인하기를 두번, 조산에서 공급된 지기를 마무리해 마을터로 인입시키는 현무봉이 천마사의 형세를 띠며 단정히 자리잡고는 봉의 날개처럼 양쪽으로 개장해 내청룡과 내백호사를 만들어 마을터를 감싸 안는다.

전해지는 양택길지의 물형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날던 봉황이 둥지에 들어 알을 품는 비봉포란형과 흡사하고 힘차게 달려오던 천마가 물을 만나 갈증을 씻고 심기일전하는 갈마음수형 같기도 했다.

물형이야 어떻듯 간에 대지명당을 만들기 위해 내룡한 주룡으로써 그 행룡의 과정이 명당결작의 순차성을 잘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먼저 마을터의 근원이 되는 조산의 시발이 분명하고 낙맥 생기가 확실하며 행룡해온 과협이 뚜렷하고 내룡맥이 광·협을 이루면서 음양이 반복되며 결인처가 세곡해 제살과 청기를 여과하는데 이상이 없다. 또 마무리의 취기를 이루는 마을 뒷편의 봉(현무봉)만이 곱고 충실하며 그 과정을 거쳐온 땅기운을 오롯이 마을터에 서리게 하는 입수 용맥이 제대로 법칙성을 갖추는 등 주룡의 8개 윤서를 잘 갖췄다.

특히 마을 앞을 감돌아 흐르는 냇물은 마을터에 감도는 서기에 찬 땅의 기운을 한점도 설기시키지 않으려는 듯 장금장치를 하고 있으니, 비록 내룡맥이 장원해서 발복이 더디게 올지라도 양택길지로서 손색이 없다 하겠다.

주룡의 주요 강령이 되는 동정의 요건도 갖췄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처럼 생기 넘치게 용트림치면서 내룡한 맥은 다이나믹하지만 정작 내룡맥에 실려온 땅기운을 서리게 하는 마을터는 고요하기 이를데 없다는 얘기다.

일제시대 득량만 방조제를 막아 드넓은 들녁이 마을앞에 펼쳐지기전에는 마을앞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려 강골(江谷)이라 이름 붙에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마을전체 34호의 가구중 세대주가 타성인 경우가 8개세대에 불과한 광주이씨 세거촌이지만 강골마을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11세기 중엽 전주이씨가 터를 잡아 정착해 오다 그뒤 죽산안씨를 거쳐 16세기말에 광주이씨 일족의 이세정(1461-1528)이 호남관찰사를 지내고 셋째아들 이유번이 지방의 유력가문의 안씨에게 장가들어 강골마을 일대의 재산을 물려 받으면서 광주이씨 집성촌이 시작됐다고 한다.

광주이씨의 최초 입향 후 현재까지 4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의 맥을 이어온데다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명당의 양택길지요건을 갖춰서 그런지 몰라도 배출된 인물 또한 계승되고 있다.

이태용 선생에 따르면 중요민속자료 157호로 지정된 이금재 가옥과 159호로 지정된 이용욱 가옥, 중요민속자료 160호로 지정된 이식래 가옥 등으로 미뤄보면 만석지기의 재력가가 배출되고 왕조시대 명문가로 자리잡은 유적을 엿볼수가 있다.

조선 현종때 이재 이진만 선생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해 현재 중요민속자료 162호로 지정받은 ‘열화정’은 이진만 선생의 손자 이방희가 당대 석학 이건창과 학문을 논했던 곳으로 한말의 의병으로 유명한 이관회, 이양래, 이웅래 등을 배출했다.

현대들어 한국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이중재 4선 국회의원과 그의 장남 이종구는 국회의원으로 활약중이다. 차남 이종욱은 외국어대 학장을 역임하고 그의 아들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연수중이라고 한다.

이중재 전 의원의 3남 이종오는 사시에 합격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역시 서울대 법대에 재학중이다.

최근 대법원장에 오른 이용훈도 강골 태생이다. 이용도 의학박사는 서울대병원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으며 그외 정계, 경제계에서도 고루 활약하는 인물이 상당수에 이른다.

이런 인물 배출은 강골터의 명당 기운을 타고 났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교육계의 인사중 안용백 전 전남교육감, 안준 전 광주시교육감, 안순일 광주시교육감도 보성출신이다.

다음은 보성지역 음택명당을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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