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1도개 2당촌 3박실 4강곡 順”

화이트보스 2009. 1. 22. 12:12

[풍수기행]“1도개 2당촌 3박실 4강곡 順”

<77>우리고장의 인물과 풍수(12) -보성지역 음·양택 명당(상)


 




보성지역의 양택명당을 살펴보기 위해 순천을 거쳐 벌교에 들어섰다.

벌교를 지나면서 벌교읍 옛 부사군의 진산인 부용산을 바라보며 문득 풍수기행과는 거리가 먼 이른바 ‘땅에 새겨진 문화유산’을 떠올렸다.

부용산에 서리어 세세연연 전해져오고 있는 현대판 ‘제망매가’ 즉, 부용산의 은은한 멜로디가 귓전을 울리면서 그 노래에 깊이 배어 있는 애절함을 느끼게 했다.

‘부용산 오리에 진디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벌교출신 박기동 시인이 1947년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결핵으로 죽은 누이의 주검을 뭍고 와 쓴 시에 당시 목포 항도여중에서 함께 근무하던 안성현이 1948년 곡을 붙인 이 노래를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떠 있는 뗏목다리’, 이른바 벌교는 물위에 떠 있는 연꽃의 부용산과 상호 연관된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러니 떠 있는 뗏목다리 벌교(부사)와 부용산이 좋은 짝이 되고 여기에 부용산 노래의 애절한 가락이 소설 ‘태맥산맥’속 민족의 비극을 담고 있는 듯, 마치 하나의 운명처럼 연결 돼 보인다면 필자의 비약적인 연상일까.

이러한 일련의 문화적 유산과 지명에 얽힌 사연을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또 다른 이야기 거리가 나올수 있을 것만 같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언뜻 뒤돌아 보니 부용산이 산 모퉁이로 그 모습을 숨기고 만다.

보성지역에는 유명하다는 집터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그 서열마저 매겨져 전해오고 있다. 즉, 1도개, 2당촌, 3박실, 4강곡이 그 것이다.

다시말해 보성지역에서 으뜸가는 양택길지는 미력면에 소재한 도개마을이고 그 다음이 복내면 비봉산하의 당촌이며 세번째는 득량면의 박실(박곡), 네번째가 강곡마을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이상에 열거된 네곳 마을을 모두 답산하고 또 그 마을의 텃기운으로 배출된 인물을 살펴보고 나서 ‘그 양택의 서열을 정하게 된 연유나 준거가 어디에 있었는가’가 몹시 궁금했다. 또 필자 나름대로의 관측과 기준에 따라 그 궁금증을 풀어보고 싶었다.

우선 그 마을터를 이루기 위해 내룡한 용맥의 본원을 따라가면서 주룡의 대소경중을 따져 보고 터를 형성하는 용맥의 교도가 지기를 공급해 마무리되는 상태를 분석했다.

그리고 풍수지리의 4과에 속하는 물의 형세도 함께 비교해 봤다.

마을터를 만들기 위해 내룡한 보성지역의 중심 간룡은 분명 무등산을 발조로 해서 계당산을 거쳐 봉화산, 군치산을 타고 넘어 장흥군에 소재한 제암산으로 부터 그 충만한 땅기운을 이어온 사자산에 연결돼 이어져온 일림산에서 한껏 지기를 응결시킨 후 기복, 위이, 낙맥, 결인, 과협의 윤서를 밟아 그 용맥의 주요 분지점에서 큰 줄기의 한 가닥 내룡맥이 홀연 낙맥 우선해 살며시 내려와 마을터에 땅기운을 서리어 결작시킨 마을이 박실이다.

또 다시 큰 산맥이 동쪽으로 나아가다 방장산에 못미쳐 파정치를 만들기 전에 큰 성신을 개방시킨 다음 거기서 뚫고 나오듯 발달한 천심룡이 낙맥한 연후에 목포, 순천도로에서 결인하고는 이내 비룡한 산줄기가 영송과협을 형성하며 마치 살아 움직이며 용틀임치는 용마와 같이 바다를 향해 나아가다 127.5m의 주산을 우뚝 세우고 마무리의 낙맥, 결인, 비룡을 거친 후 천마사의 현무정을 앉히고는 싸 안듯이 포근히 결작시킨 마을터가 강곡마을이다.

<산도>에서 보듯이 도개마을을 짓기위한 용맥은 계당산에서 간룡을 타고 봉화산으로 나아가던 분지점에서 갈라져 내룡한 한 자락의 용맥이 517.9m의 성신을 일으켜 세우고 이내 위이, 기복, 과협의 질서를 지키며 명봉재를 거친 다음 도개마을 뒷 성신을 수봉으로 앉히고 마무리 된다.

그리고 당촌마을로 내룡한 용맥은 두봉산에서 계당산쪽으로 그 간룡이 내려서는 분지점에서 빠져나온 용맥을 우뚝 세우고는 용맥의 행도에 마침표를 찍고, 사뿐이 내려서는 분기점에서 빠져 나온 용맥이 장재봉을 세워놓고 우선하며 기복을 거듭하다가 337.9m의 비봉산을 우뚝 세우고는 용맥의 행도에 마침표를 찍고 내려앉은 곳이 당촌마을이다.

용맥의 본원이나 그 강세를 봐서는 박실과 강곡이 더 강하고 생기에 찬 지기를 받는다고 해서 크게 오류된 관점이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다만 수세가 잘 구비된 점이 도개마을과 당촌마을의 우세한 보국이라 할수 있다. 난형난제의 양택길지 네 곳 중에서 배출된 인물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박실터와 강곡마을을 소개하고 도개마을과 당촌은 더 정확하고 근거 있는 인물목록이 수집되는 대로 다음기회에 다시 쓰기로 한다.

정보수집의 한계성에 부딪혀 네 곳 모두 간산기를 쓰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박실의 양택길지 간산에 큰 도움을 준 필자의 교직 선배이자 학식과 덕망이 두터워 사회로 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양동기 전 교장에게 이 지면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박실터는 장흥의 사자산으로 부터 발달해 힘차게 행룡해와 보성지역의 근간을 이루는 산맥에서 크게 낙맥, 결인한 뒤에 별도의 성신을 일으켜 준봉 깃대봉과 덕암산, 국사봉을 차례로 세운 후 우선룡으로 낙맥, 입수하면서 생기에 찬 내룡맥이 마치 날던 기러기가 평지로 내려 앉듯이 마을터로 내려서 자리를 잡는다. 물론 깃대봉으로 분지시킨 간룡은 동쪽으로 내달아 또 다른 산봉을 거쳐 파청치를 지나 540m의 방장산을 세우고 이내 높고 낮은 성신을 세우며 과협의 과정을 통해 북방으로 나아가 보성지역의 제일봉인 존제산을 우뚝 세우고는 그 행룡의 진행을 멈추지 않고 조계산으로 이어져서 한가닥은 북진해 석곡의 아미산을 세운다. 다른 한 가닥은 동남으로 진행하며 송치재를 지나 광양땅의 백운산으로 통한다.

존제산에 못미쳐 분지된 또 한 자락의 용맥은 동남쪽으로 머리를 틀어 고흥땅의 발조가 되는 봉두산으로 이어 달린다.

다시 박실마을터의 진산 깃대봉으로 말머리를 돌려 보자.

깃대봉은 350m가 넘는 드높은 준봉으로서 박실터를 양택명당으로 있게 한 조산이다. 사진에서 보듯, 그 빼어난 기상은 탐랑성으로 솟아 대지명당을 결작시키려는 진산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깃대봉에서 낙맥, 결인, 비룡의 행룡을 거쳐 또 하나의 준봉 덕암산을 수려하게 세우고 덕암산에서 또 다시 주룡의 윤서를 밟아 박실터의 주산이자 현무봉이 되는 국사봉을 세워 앉힌다. 이른바 목성체이다.

국사봉에서 양 날개처럼 개장한 다음 마을의 우백호 자락은 구슬을 꿰어 이어지듯 취기처를 만들며 연주룡맥을 형성하면서 크게 우선해 그 유명한 음택명혈 ‘장군대좌형’을 결작하고는 여기를 남겨 마을을 포옹하며, 왼편으로 뻗어내린 또 하나의 개장맥은 여러가닥의 청룡사를 만들어 마을을 옹위한다.

옥에 티라고나 할까. 청룡사가 튼실하게 발달해 마을을 옹위하지 못한 점이 눈에 띄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박실터는 이렇게 형성됐다.

용진혈적의 양택명당으로 손꼽힐만 하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풍수지리의 오묘한 이치는 박실터에서도 어김없이 입증되고 있다. 양동기 선생이 애써 수집해 필자에게 넘겨준 박실마을의 인물편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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