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수리봉 아래있는 내안리, 걸출한 인물 배출”

화이트보스 2009. 1. 22. 11:59

[풍수기행]“수리봉 아래있는 내안리, 걸출한 인물 배출”

<75>우리고장의 인물과 풍수(10) -장흥지역 음·양택 명당


 








장흥지역은 3읍 7면으로 니눠져 있다. 이번 간산은 부산면 내동마을의 양택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내안리로 행정구역이 획정된 이곳은 안곡, 내동, 방축 등 3개 마을로 이뤄졌다.

장흥은 500m가 넘는 준봉이 10여개 달한데다 그 기상 또한 매우 출중해서 음양택의 수많은 명혈이 분포돼 있다.

특히 탐진간 동쪽의 높고 낮은 산봉과 산맥의 발조가 되는 해발 778m의 제암산을 비롯, 탐진강 좌우에 걸쳐 무등산으로 부터 행룡해 온 용맥을 장흥 전역으로 펼칠 수 있도록 주요 분지점을 이루는 해발 515m의 가지산은 장흥 관내의 발원을 이루는 명산인데다 동편으로 뻗어내린 그 대지룡맥은 제암산과 사자산을 거쳐 보성군의 일림산으로 이어져 마침내 고흥 및 순천, 광양까지 연결되는 건널목이 되기도 한다.

억불산으로 전해진 제암산의 정기는 결국 천관산과 부용산을 따라가다 강진의 남쪽에 수봉으로 솟아 오른 천태산을 세우고 그 주위의 드넓은 지역을 커버한다. 이렇듯 성신(산봉)이 빼어나고, 그 주룡맥이 강세룡인 장흥땅에는 그 성신을 진산으로 삼고 있는 곳마다 양택길지는 물론 음택명당을 포섭하고 있어 옛부터 풍수연구가들의 발길이 잦았던 고장이다,

그런데 그 많은 양택길지중 부산면 내안리의 인물과 그 산세를 살피는 것은, 왕조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인물이 배출 돼 명성이 널리 알려진 곳이기 때문에 그 곳에 포커스를 마춰 한정시켰을 뿐이다.

필자는 다른 지역에서도 늘 그랬듯이 간산의 대상으로 지정한 터를 짓기위한 냐룡맥은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그 주룡맥이 과연 양택터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요건을 갖췄으며 또 그 형상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봤다.

장흥지역의 산세를 말할때 마다 들먹이는 산봉이, 강진군의 병영면과 장흥군의 부산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웅장하게 솟아있는 수인산(562.4m)이다.

그러나 필자가 호남정맥의 줄기를 따라 샅샅이 조사한 결과 그 관점은 잘못된 것임을 밝혀 낼 수 있었다.

<산도>에서 보듯 무등산에서 출신된 간룡과 대지룡은 안양산, 동복의 묘치재를 지나 구암을 거쳐 서밧재를 타고 올라 천운산, 두봉산, 보성의 계당산으로 이어진 다음, 보성으로 나아가는 지룡맥이 봉화산과 벽옥산인 듯이 보이지만 보성강을 건너지 못하고, 이내 그 여정을 마치니 정녕 보성간의 본류를 돌아서 행룡할 수 밖에 없음을 쉽게 파악 할수가 있다. 그러자니 계당산의 준령을 이어받은 성신은 고비산과 봉미산이며 깃대봉에 못미쳐 한 줄기 산맥이 북상하며 머리를 틀어 행룡하니 그 맥이 곧 화순 춘양면과 청풍면의 경계에 수봉을 솟아 그 이름대로 아름답게 앉아 있는 화학산이다. 다시 깃대봉에서 남행하다 삼계봉을 세우고 515m의 가지산을 일으켜 세운다.

거기서 서쪽으로 낙맥해 요즘 공사를 완료한 지천터널 위를 지나 크게 낙맥한 뒤에 도수과협을 형성하며 험준한 기억산과 장발재, 바람재를 과협으로 통과한 후 부산면 일대와 특히 내안리 땅에 생기찬 지기를 공급하는 411.8m의 수리봉을 우뚝 세운다.

거기서 낙맥, 결인, 비룡해 내안리 터를 이루는 한축의 주룡을 형성해 내동마을과 방축마을로 행룡하다가 살며시 내려 앉아 서기를 감돌게 하는 혈처를 만든다.

그리고 수리봉하에서 서편으로 줄기차게 기복, 이위의 행룡을 거듭하다가 한 가닥은 북서쪽으로 진행해 562.4m의 수인산을 앉히고, 이내 병영과 옴천면의 면계를 형성하며 옥녀봉과 높고 낮은 주필봉을 타고 흐르던 용맥이 풀치재를 타고 올라 월출산으로 솟구치고, 풀치재에 채 못미쳐 동북방으로 나아가다 활성산을 세우게 된다.

수인산으로 나아가는 한 주필봉에서 서남방으로 머리를 틀어 행룡하던 또 다른 용맥은 서너번의 기봉을 이루다가 그 중 두개의 준봉이 동방으로 주룡을 형성하며 그에 걸맞는 윤서를 밟아 내리다 그 마무리 지점에 만두를 형성시켜 지기를 응결시킨 다음 우선의 작혈로 양택지를 만드니 거기가 내안리의 한 마을인 안곡이다.

그러나까 인물고장의 부산면과 내안리 일대는 수리봉을 진산으로 삼고 있음이 이번 간산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 셈이다.

내안리 마을터를 이루기 위해 행룡해온 용세의 형상을 보면 그 형세부터 이곳에는 인물이 줄곧 배출될 수 밖에 없는 지세를 안고 있음을 느낄수가 있다. 특히 산세가 석봉, 석맥 인데다 그 기봉의 형상이 마치 하늘을 향해 기치 창검을 겨냥하 듯 강하다.

또 그 입혈 결작의 용의 행도가 우선룡이고 보니, 걸출한 인물들이 무관쪽에 쏠려서 배출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검찰, 경찰, 장성 등 숱한 인물이 4~5년 사이에 줄을 이어 배출 돼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내동과 안동, 방축의 3개마을은 원래 산(山)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안골이라 칭하다 내동으로 불리게 됐다.

내안리는 고려말기 장씨가 성촌했다는 구전설화가 전해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조선초기 평강현감을 지낸 영광김씨 경의가 세조 옹립에 불복해 그의 아들 찬, 필과 함께 이곳에 터를 잡고 거주해 현재도 영광김씨의 세거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뒷산 수리봉에서 수인산으로 거룡하는 용맥에는 부암(夫岩), 말탄岩, 가마비위 등 석봉이 많은데다 이중 부암은 마치 남근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바위가 멀리 남쪽에 보이는 억불산에 있는 며느리 바위와 서로 마주보고 있어 부산리(夫山里)로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안리 내동으로 불리고 있다. 옛 부산면의 소재지가 이곳에 있었기에 부산면의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내안리가 양택길지의 요건을 갖춘데다 그 성촌(成村)의 유래가 유서깊어서 일까. 옛 왕조시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물의 맥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영광 김씨 입향조인 김경의 아들 김필이 세종때 문과에 급제한 것을 비롯 대과 급제자 3명, 소과에 38명이 등과했다. 특히 솔대를 세워 급제표시를 했던 ‘솔대 거리’가 지금도 마을 앞 5거리에 문화유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라성 같은 현대의 인물도 많이 배출됐다.

안곡마을 출신이며 경찰총장을 거쳐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고 있는 김세옥씨, 김정길 경감, 김옥전 총경을 비롯 사시합격후 법조계로 진출한 김창남씨와 김전근씨 등이 이 곳 출신이다. 육군장성 출신인 김재구씨와 김홍섭 육군중령 등 무관으로 입신한 인물과 부산면 2~3대와 7대 면장인 김수봉씨, 김재숙씨도 내안리 출신이다. 그리고 김원환 교장 등 교육계의 인물도 배출됐고, 김서식 사무관을 비롯 행정부서에도 많은 인물이 나와 승승장구하고 있다.

수리봉의 진산 기운을 받은 부산면 일대의 인물도 많은 편이다.

왕조시대 문무과에 등과한 인물이 30여명에 이르고 현대의 인물도 지역사회와 국가 발전에 기여하면서 현재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초대 도의원인 위윤환을 비롯 교수로 재직중인 사람도 11명이며 박사학위에 오른 인물도 5명이다.

장흥군수 등 고위관계에 진출한 인물도 20명이며 군관에 진출한 인물도 10명, 의학계로 진출한 인물도 다수에 이른다.

풍수지리학에서 ‘그 지역의 인물을 헤아려 알고 싶으면 그 뒷 성신과 용맥을 먼저 실피라’고 했다. 근조산인 가지산이 지척에 서 있고 그 진산인 수리봉과 주산 및 현무봉이 특립특출의 수봉이니 이렇듯 수많은 인물이 배출된 것이라고 믿는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풍수지리학의 깊은 뜻을 다시한번 음미하게 된다는 얘기다.

지난달 22일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풍수지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2명의 큰 공으로 이제 풍수지리학이 제도권 학문으로 들어선 후, 이 영역의 학문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크게 넓어진 까닭에 이런 간산기를 쓰는 필자 역시 큰 보람을 느낀다. 이제 장흥지역의 음택명당을 찾아 나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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