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임진왜란

임진왜란의 과정

화이트보스 2009. 1. 25. 10:45

임진왜란의 과정
임진왜란 전의 국내외 사정

국내의 사정

오랜 평화와 성리학의 발전
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
국방 정책 소홀 - 이이의 십만양병설 무시
양반 계급 - 세력 싸움으로 국론 분열

국외의 사정

조세 제도 문란으로 민심 혼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100여년 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우리나라와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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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에 대한 국내 불평 세력의 관심을 돌려내고 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기화를 엿보고 있다가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게 길을 비켜 달라고 요구하였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쳐들어왔다.

임진왜란의 경과

정명가도(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주장)를 빙자하던 일본은 1592년, 육군 15만, 수군 9천 명으로 부산에 상륙하며 조선 침략을 개시하였다.
부산에서는 부산진에서 정발, 동래성에서 동래부사 송상현이 끝까지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부산진과 동래성을 점령한 왜적은 세 길로 북상하였다.

충주에서 신립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저항했으나 패하고 전사하였으며, 일본군은 20여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였다.
선조 임금은 의주로 피난 가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관군이 육지에서 패한 원인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하여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키고, 새로운 무기인 조총을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활과 창뿐인 무기에 무방비로 있다가 뒤늦게 왜군 침공에 대비하였지만 대비가 소홀하여 패전이 잇달았고 이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백성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란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서를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등 궁궐과 관아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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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활약이 임진왜란에 준 영향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조선 건국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로 되어 있었다. 경상 좌수영과 우수영은 왜적이 침입하자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못한 채 패하였다.

전라 좌수영의 수군 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 우수영으로부터 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당포, 당황포, 한산도, 부산 등지에서 계속 큰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의 해전은 진주성 싸움, 행주산성 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이라 일컫는다.
<한산도 대첩>
이러한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군은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고 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완전히 분쇄하고, 우리는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함은 물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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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결과
7년 만에 일본을 물리침(1598년)
노량 대첩을 끝으로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임진왜란의 승전 요인과 의의

잠재적 역량 :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은 우리 민족의 잠재적 역량이었다. 관군은 무력했으나 전 국민적 차원에서의 국방 능력은 우리가 우세하였다. 신분의 귀천이나 노소를 막론하고 문화적 우월감에 차 있어서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자발적인 전투 의식은 의병 활동으로 나타났다.

전술과 무기 개발 : 전쟁 초기에는 왜군의 조총에 밀렸으나 차츰 대포(비격진천뢰, 화차, 천자총통)나 거북선 같은 함선 제조 기술은 왜군을 능가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 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이 편찬되었다.

승전 의의 :
몽고와 항쟁 이후 가장 큰 국난을 극복하고, 민족의 생존과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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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생긴 피해와 변화된 점
피해

국토가 황폐화되고 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다.
많은 문화재가 불에 타고 파괴되었으며, 피해가 매우 심하였다.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졌고, 사회 질서가 붕괴되어 사회가 혼란해졌다.

변화된 점

전 국민이 국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실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

한산도 대첩 : 이순신장군(1592년)
진주 대첩 : 김시민장군(1592년)
행주 대첩 : 권율장군(15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