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격수의 세계/미사일보다 더 무서운 ‘인간무기’

<10> 갈리폴리 전투의 저격수들

화이트보스 2009. 1. 26. 20:09

<10> 갈리폴리 전투의 저격수들
마우저 소총으로 무장한 터키군은 공포의 대상

제1차 세계대전 때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터키령 다다넬스 해협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1915년 4월 25일,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실시했는데, 작전 통제의 미숙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프랑스와 영국군은 해협을 확보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 터키군과 맞서 피나는 소모전을 치러야 했다.

터키군은 비록 동맹국인 독일보다 전반적으로 훈련이 부족했지만, 날카로운 사격과 저격술에 있어서는 예술의 경지를 보여줬다. 마우저 소총으로 무장한 터키군은 갈리폴리 반도 높은 곳에서 연합군에게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좋은 이점을 갖고 있었다. 상륙하자마자 연합군은 계속해서 심각한 저격을 당했다.

영국 해군의 병사였던 작가 허버트는 터키군 저격수가 주는 공포에 대해 ‘거센 파도가 덮쳐 오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 우리가 참호 위로 머리를 드는 순간, 보이지 않는 저격수로부터 총알이 날아오고 있다. 그곳에서 첫 주 동안 우리는 매일 12명의 전우를 잃었다.”

갈리폴리에 투입된 부대는 서부전선의 영국군이 경험한 뼈아픈 교훈을 배우게 됐다. 즉 전장에서 부주의는 죽음을 부른다는 것이다.영국군 제5기병대의 병사 아이드리스는 무서운 터키군 저격수의 파괴력에 대해 일기를 썼다. 그리고 동료가 어떻게 저격수의 치명적인 사격을 받게 됐는지 회상했다.

“5월 26일, 17명의 오스트리아 병사가 저격수에게 당했고, 5월 28일 아침에는 15명이 더 저격당했다. 우리가 물을 뜨러 가기 위해 개울을 막 건너는 순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갑자기 동료가 수통을 떨어뜨리며 나뒹굴었다. 내 발밑에 쓰러지면서 그는 한 순간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 머리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터키군의 놀라운 저격술은 영국군 부대의 높은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군도 적극적인 대저격전으로 맞서 터키군을 무력화시키고 소탕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리고 대포와 기관총, 탄약의 부족 때문에 잘 조준된 소총의 위력이야말로 어느 전장보다 갈리폴리에서 더욱 중요하게 인식됐다.

저격수들은 때때로 총을 쏘는 것 외에 다른 임무도 수행했다. 영국군 퓨질리어 연대 소속의 브렌넌 병장은 갈리폴리에서 제7기병대 취사병이었다. 병사들의 아침 식사를 만들고 난 후, 그는 앞치마를 벗고 항상 전방진지로 향했다.

터키군 저격진지의 정찰을 전문으로 하는 그는 방어벽 위로 머리를 내미는 터키군이 있다면 좋은 표적으로 삼았다. 브렌넌의 기분은 그날 사격 성공 여부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했으며, 물론 그날의 메뉴도 마찬가지였다. 동료 저격수들은 그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어떤 날은 브렌넌이 화나고 실망한 듯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죄 없는 식기를 걷어차며 ‘30발 쏴서 하나도 못 잡았어’라고 고함쳤다. 그러나 어떤 날은 마치 혼자의 힘으로 연합군의 전쟁을 이기게 한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는 ‘터키놈 3명을 죽였다’고 소리치며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고 우리는 덕분에 좋은 음식을 제공받았다.”

가장 특이한 갈리폴리의 저격수는 제5기병대의 퀸즐랜드 출신 빌리 씽이었다. 전쟁 전부터 그는 이미 명사수였고, 브리즈번과 랜드윅 사격대회의 단골 수상자였다. 씽은 특히 인내심이 중요한 저격술의 특징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으며 표적이 나타나면 바로 사격을 하기 보다 언제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를 정확히 계산했다. 그는 스스로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갈리폴리에서 적 사살 150명의 전과를 올렸다. 저격전은 분명히 표적을 맞추는 게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