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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십일조는 비성경적

화이트보스 2009. 2. 15. 14:55
 

 

십일조 바른이해 : 고동엽

{ http://blog.daum.net/ipssen }

 

[말라기 3장 10절]"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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הביאו את־כל־המעשר אל־בית

 

뻬이트       엘            함마셀          콜     �트        하비우

house-of into          the-tithe          whole-of   ***     bring

  나의집               십일조                온전한             들여


 

האוצר ויהי  טרף בביתי ובחנוני

 

우베하누니           베비티       쎄레프      웨이히      하오찰

 indeed-test-me    in-house-of-me food that-he-may-be the storage  

 나를 시험하여        나의집에    양식    있게할지니     창고에


נא בזאת אמר יהוה צבאות אם־לא

 

로          임     치바오트          야웨         오말       바오트    나                                                          

 not if                 Hosts        Yahweh     he-says      in-this now - 

   만일 그렇지 아니한--만군의-여호와가  -말한다-그것으로                                                                                                                                                                                                                                                                                                                     

אפתח לכם את ארבות  השמים

 

하사마임             오레보트        에트      라켐    에페타

 heavens               floodgates  **      for-you    I-throw-open

 하늘들                      문               너희를 위해      붓다.

והריקתי לכם ברכה עד־בלי־די׃
 

      디      베리     아드   보라카       라켐          와하리코티

 room-enough not until blessing upon-you and-I-pour-out

 풍족히 아니하나 까지 복을  너희위에      내가 부은다

 

'시험'-잘못된해석.   "시험하다" 원어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히브리어

1.נסה'나싸'- 헬라어  peirazo '페이라조-시험하다(test, tempt)

2.בחנ'빠한'- 헬라어 dokimazo'도키마조'-증명하여(prove)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시험은 בחנ'빠한'- "증명하여"이다.

 

십일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공동체 자체를 유지시켜주는 그들의 신앙행

위 표현이다.이 십일조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의 많은 나라 즉 로마,그

리이스,시리아,카르타고 등에서 행해졌다. 십일조는 종교적뿐만 아니라 세속적 통치자가

십일조를 받기도 했다. 아마도 본래 신에게 드렸던 십일조를 신격화된 통치자에게 드리

게 됨으로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삼상 8:15-17)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기 위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의 일을 취하리니 그 종이 될것이라"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왕을 세우면 너희들이 왕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될 것이다."라고 하므로서 십일조가 하나님께가 아니고 왕에게 십일조

를 바쳐야 된다는 왕제도의 폐해의 하나 임을 지적하고 있다.

 

 (창 14:18-20)에서 "십일조"가 성경 처음으로 언급된 곳인데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아 그에게 축복하니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전리품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바치는 장면이다.

 

특히 멜기세덱이 지니고 있는 제사장 직은 그 후에 나타날 완전한 제사장 직에 대해 멜기

세덱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보다도 또 구약 제사 제도를 주관했던 레위인보다도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후에 십분의 일을 반복해서 드렸

다는 언급이 없다.

 

단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형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

하는 행위에 십일조가 맞춰져 있다.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라 당대의

문화 또는 풍습에 따라 드린 행위이며 따라서 분명한 것은 율법의 명시된 십일조는 땅의

소출과 가축에 한정 되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십일조가 될 수 없다.

 

 (창 28:20-22) 은 야곱이 하란으로 피난도중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주시고  훗날

자신을 갑부가 되게 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재물에서 십분의 일을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그후 야곱이 전에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 야곱의 십일조를 바치기를 요구하였다는 것도 전혀 찾을 수 없다.그후 400

년이 지나서야 십일조 제도가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많은 지파들이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없는 레위 지파의 생활을 보호하기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주어지기 시작하

였던것이다.

 

 (레위기 27:30-33) 여기엔 곡식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따로 떼어 놓았는데 바치는 사람이 자기 임의대로 선발하지 못하도록 막대기 밑을 통

과하는 가축의 열 번째를 바치게 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금으로 20%까지

바치도록 하였다.

 

 (민수기 18:21-32) 이스라엘 백성이 낸 십일조의 십일조이다.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다시  돌려드린다는 표로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돌려 드려야 했다.

-농산물에만 한정한다(18:27, 30).

 

 (신명기 12:4-19) 백성들은 모두 중앙장소로 가서 거기서 십일조 음식을 먹어야 했다.-

본문에서도 십일조는 농산물에 한정하고,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어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신명기 14:22-29, 26:12-15) 십일조를 받은 중앙 성소의 책임자들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했다. 3년 차 십일조는 사회보장 공동

체에서 복지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들이

해당되었다. 이런 십일조는 성소로 가져가지 않고 자기 마을에서 소비하였다(14:28).

 

레위기에서는 십일조가 곡식과 가축이었다면 민수기와 신명기에서는 밭에서 생산되는

것에 국한했다.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사는 것을 의미 했다.여기의

대체적인 십일조는 레위인만이 찾지하는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성전이 아닌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각 성읍에 십일조를직접 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였던 것이다.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레위의 제사장들이

독점하는 십일조로 변해갔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배역 행위를 열거하면서 그들이 벧엘에서

제사를 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아모스 4:4)"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그러면서 아모스는 십일조와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생각

기복신앙을 꼬집는다.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려보려무나"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의식 같은것으로 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삼 년마다 행하던 십일조를 삼 일에 한 번씩 하면

서 복을 더 얻으라, 하면서 사람들의 율법주의를 비웃었던 것이다. 즉 구약시대의 제사의식에

참예하는 유대인들은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는 정도였다.

 

본래 구약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성전 제사를 맡은 레위인이나 과, 과부 등과 함께 "나눠

먹는 것이었으므로,반드시 밭의소출과 가축에서만 드려야 하는 것이다(레27:30, 신12:17, 

14:23, 느13:5, 12).성전이 너무 먼 경우에도, 십일조 먹을수있는것들을 일단 돈으로 바꾸어 

성전에 가지고 와서, 다시 음식물로 바꾸어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다(신14:24-26).

 

따라서 십일조 의무는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먹는 것>을 생산해내는 농민과 목축

업자만 가능하고,그외의 직업인 상공업자,세리,어부와 목수, 기능공은 아예 그런 의무가 

없었다.당연히 목수였던 예수님도,  어부였던 제자들도,세리 마태도 십일조 않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한편, 성전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그때는 현금인 돈의 "성전세"였다. 이 

성전세는 십일조와는 온 백성이 납부 의무를 지고 있었으며, 그 액수도 구체적으로 정해

져 있다(출30:12-15).물론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이 성전세 많큼은 예외는 아니었다(마

17:27).다시 말하자면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레위족 제사장이 성전 

제사를 드릴때 유효했던 일종의 <음식물에 의한 사회보장제도>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

이다.  따라서 초대교회때도 시행되지 않다가 당시는 <연보>개념이었고, 연보와 십일조

는 전혀 다른 개념) 후에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다시 시행된 것이다.

 

주목할점은 중세교회에서조차도 4세기 무렵 십일조제도를 도입후 근 1000년간 여전히

토지 소출과 가축에만 십일조를 부과 했다는 점이다.십일조는 명백히 <먹는것>이 대상

이었기 때문에 쉽게 돈까지 포함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3세기 와서 교회의 극심한 타락과 함께 비로소 십일조 대상이 <먹는것>을 포

함한 <모든> 소득으로 확대 되면서 십일조가 엄청난 변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이러

한 잘못된 십일조는 종교적 병폐로 말미암아 결국은 세계의 모든 기독교 국가들의 교회는

이것을 폐지 시키고야 말았다(한국만 제외하고).

 

루터는 십일조를 교회에 내기 보다는 세속적인 통치자들에게 낼 것을 주장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했다. 개혁교회 즉 개신교회들은 십일조를 계속 실시했으나 점차 십일조 배척하는

기운이 농후해져서 프랑스 혁명이후에는(1789) 여러 나라들이 공식적으로 철폐했고 그

나머지 나라들도1848년 이후에는 모두 철폐했다.

 홀랜드 국가는 십일조 및 각종 헌금을 일절 철폐하고 교인들의 갹출로 교회를 운영해 갔고.

스웨덴 - 세금형태(교회세)였으나 2000년에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고

스코틀랜드 - 2000년 폐지.

스페인 - 1841년 폐지.

 

이탈리아 - 세금형태로 0.8% 받아 그것을 위의 비율대로 나누고

핀란드 - 시에 따라 다르지만. 세금형태(교회세)로 1%~2.25% 내고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들에선 각각 폐지

스위스 - 공식적으로 십일조를 걷는 곳은 없고, 일부 주에서 2.3%까지 세금형태로 거두고

아일랜드 - 1869년 폐지.

 

오스트리아 -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교회세)로 자기 수입의 1%만 내고

덴마크 - 시에 따라 차이가 조금 있지만, 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교회세)로 1%만 내고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서 1789∼1790년 폐지되었고, 

영국에서는 1648년과 1688년에 폐지,

미국 - 종교와 정치의 분리원칙하에 결코 교회세와 강제적인 십일조를 걷지 않고.

독일에서는 1807년에 폐지,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는 단순히 십일조가 그러한 폐해를 넘어서, 이들 나라들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분명 십일조가 성경적인 기반위에 있지 않다는 교리적인 합의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들 나라들의 교단과 신학들이 한국교단과 신학보다 그리고 교리에서 뒤떨어져서

이렇게 합의에 도달 했겠느냐는 것이다.[세계 기독교 인구 20억명 가운데 한국 기독교인은

불과 680만명(230분의1--통계청발표).

 

그런데도 유독 한국 교회에서 많큼은 <십일조 왕국>이라 불릴정도로 십일조 제도가

<초교파적으로>정착 되어 있다는게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닐수 없다. 교단과

교단, 교파와 교파 사이엔 교리적으로 조금만 차이가 있어도 피투성이가 될정도로

싸워대도 어찌 된일인지 이 십일조 많큼은 모두가 한 목소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현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성경말씀이 바로 구약의 말라기 3장8절-10절 말씀이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은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과, 그 말씀 전후의 유기적인 

문맥관계를 고려해서 해석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고 특정 귀절들만을 

떼어서  자신의 신앙의행동을 합리화 한다는것은 참으로 아쉽기 그지 없다. 

 이곳의 말3:8-10 대표적 구절의 해석에 있어서 그 전체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 자세한 설명은 느혜미아서 13장을 보면 알수 있다.말라기와 느혜미아는 동시대 인물

이기 때문이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십일조 도둑은 그 백성들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었

다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명령했다. 백성들이 십일조

와 헌물을 가져오면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받아서 성전옆에 있는 성전 창고에 거둬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는서로 공모하여 성전 창고 바로 옆에 자기

개인 창고를 만들어 놓고 십일조 및 백성들이 바친 각종 식량과 예물들을 자기가 만들어

놓은 개인 창고로 빼 돌림으로서 결국 그 성전에는 식량이 바닥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 할 수 없게 되어 십일조 혜택을 받아야 할

레위인은 정작 생계 문제 때문에 성전 일을 버리고 자기들의 생계를 찾아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최초로 제사장에 의한 십일조 도덕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내용이 바로 십일조 도둑 사건이다. 내어야  할 십일조를 떼어 먹어서 도둑이 아니라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훔쳐서 도둑사건이 된 것이다.

<말 3:8, 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따라서 이제는

목회자 사례비를 포함한 교회 인건비, 건물 유지비, 선교비, 불우이웃및구제비 등 재정지출

문제는 이렇게 비성경적으로 십일조를 강조 함으로서 해결 할게 아니라, 목회자들이 구체

적인 재정필요 사항들을 교인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동참 할 수 있도록

<연보> 개념을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된다고 본다.

 

바로 바울 사도가 한 방법같이(고후 9장5절>이다.

<히10장8절> 제사와 예물과 전제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따라 드리는 것이라.  

 

현재 세계적으로 십일조를 시행하는 교파들을 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미국 남부의 오순절,

다음으로는 여호와 증인, 몰몬교(국내에서는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교회), 안식일교, 북미의

 worldwide church of god(WCG) 등이 십일조 열성적인 교파로 속하고 있는데 한번

유심히 살펴 보면 뭔가 공통점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십일조 폐지한 나라들의 교회들도 재정적 어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그러나

아무리 어렵다 하드래도 <십일조가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폐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 이런 나라들에서는 대부분 기부문화, 즉 교회 밖 문화인 parachurch운동이 크게

발달 되어 있어 현실적인 어려움을 대부분 해결한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십일조 문제는 교회의 재정적인 문제등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경적 근거 문제인 것이다>.성경적으로도 근거가 없고(가장 중요한 이유) 세계

기독교 추세와도 역행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아니 확실한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처음

부터 이런 폐지론이 나올 수도 없었고 전 세계 국가들 역시 아직도 십일조를 시행하고

있을것이다.

 

다시 말라기3장으로 돌아가서

(말라기 3:7-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본문은 구약성경에 언급된 십일조와 관련된 마지막

언급으로서 십일조 지지자들이 인용하며 백배,천배,만배복의 근거로까지 제시 한다.


처음에도 "주"를 달았다시피'시험하여'라는 단어도 잘못된 이해이다.   "시험하다" 원어

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히브리어 נסה'나싸' 와 בחנ'빠한' 이다.נסה'나싸'는 헬라어  

peirazo'페이라조'인데 이는 글자 그대로 '시험하다(test, tempt)' 뜻이고 בחנ'빠한'

은 '마음의 상태를 증명하다'라는 뜻으로 헬라어로는 dokimazo'도키마조'(prove)이다.

 

이는 성경의 다른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할 때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 נסה'나싸'단어 이지만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시험은 בחנ'빠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증명해 보라"는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은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며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

라고만 번역함으로써 혼동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신양성경에서 이 같은 예로 사용된 경우는 고후 13:5인데,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이 말씀에서 '페이라조'와 '도미카조'가 모두 사용되고 있으며

뒤에 나오는 '확증하라' 기 바로 '도미카조', 즉 마음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시험할 수

있으되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말라기 3:10의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의 십일조는

많이 바치라는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을뿐더러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10절에서도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도  물론 확증하라는 뜻의 '도미카조'가 사용되었으며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나타나는 빛의 열매입니다. 결국 성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마음과 삶으로 입증하고 확증하라는 뜻의 말씀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흥정하고 시험하라고 부추김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습니다.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습니다.

 

그리고, 말라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던 백성이 이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관계회복과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받지 않으셨지만,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기때문이다(3:3).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바른 헌물과 제물을 드리는 온전한 제사가 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본문이 몇구절 있다.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18:12 그리고 히브리서 7:1-10이 유일한 본문들이다.


(마 23:23; 눅 11:42; 18:12)너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23:23). 그리고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그러나 이것들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23:23). 이 말씀은 십일조 지지자들에 의해서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구약에서와 같이 십일조 

실행을 정확하게 말씀하심은 찾을수 없다.  마태복음 23장에 언급된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어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십일조를 실행했다거나 

가르침이 없을까? 

 

그러면 헬라어 원문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ouai umin, grammateiV kai farisaioi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파리사이오이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화 있을찐저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외식하는 너희가 십일조를

upokritai, oti apodekatoute to

휘포크리타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hypocrites      because    ye tithe            the

드리기 때문이다.         박하와 

hduosmon kai to anhqon  kai to  

      헤두스몬     카이   토     아네돈     카이    토        

         mint      and      the   dill         and  the        

               회향과                            근채의                  

kuminon, kai afh kate ta barutera  tou nomou,

쿠미논          카이   아페    카테     타    바루테라        투         노몬              

cummin     and   ye{haev}left   the heavier things    of the law,--               

버렸도다              더 중요한바것들인                              율법의                   

thn krisin kai ton eleon kai thn pistin tauta  .

텐       크리신    카이    톤   에레오온 카이       텐    피스틴    타우타       

 judgment        and  --  mercy    and --faith but  these things it    .       

  의와                              인과             신은 그러나 이것들도    

 

  de edei   poihsai  kakeina  mh afienai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아페이나이.

behoved to do and     those        not      to leave

행했어야했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었도다.

 

poihsai(포이에-사이):행하다 부정과시제이며 afienai(에피에나이): 버리다-

부정과거 시제이다.afihmi현재형은(에피에-미)이다.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러나 이것들도tauta (타우타) 행하고 저것들도 kakeina(카케이나): 버릴 수

없는저것들'은 십일조를 포함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다양한 제사행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둘다 복수 형이다) 버리지 말찌니라"는 말씀은 그렇게

행하라는 명령문장이 아니라 직설형 미완료 동사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렇게 행했어야

했었다는 당위성만을 말하는 문장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율법을 지킨다고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참으로 율법을

지키려면 물질의 십일조만을 드릴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더욱 중요한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고 다 지켜 행했어야 했었다는 당위성을 말씀 하신 것 뿐이지 그렇게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14:22-23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장로들의 미쉬나를 정확히 지키기

위해 작은 식물이라도 엄격하게 지키려는 생각에서 채소와 박하와 향료의 십일조까지 하려

하였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엄격한 십일조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고 단지 그들이

세부적인 열정 등엔 지나치리많큼  과도했으나 율법의 강령인 사랑, 자비, 정의, 신의 등의

성경이 원래의 지시하는바에서는 벗어나 있었던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너희가 하고 싶다면

그런 사사로운 규칙들을 지키되 하지만 정말 중요 문제시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말라”

는 것이다.


“가장 작은 식물에까지 십일조를 하기를 원한다면 좋은일이지만, 동시에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들 즉 "이웃사랑”절대 빼놓을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 준수에

있어 자유롭고(행 15장),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 2:10)" 가난한 자는 모든 사람들의 도움의 대상자라는 것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 신약은 유대인들에게 요구하던 십일조가 적용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

 

그리고 이 말씀은 십일조를 하지 않은 사람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율법준수를 지나칠

정도의 철저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책망하신 것이다.왜냐하면 그들이

물질에만 집중하고 의와 인과 신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말씀을

이용해서 십일조를 철저히 바쳐야 한다는 구절로 설교하는자들은 예수님의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본문은(마23:23) 신약시대가 아니라 구약시대의 맥락에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아직 완성 되지 않았고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이 유효한 시기이며 그리고 십일

조는 의식법에 속하고,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백성들의 십일조를 필요로 했다.

 

예수님이 구약적 입장에서 말씀 하셨다는 근거는 "때가 찾다"는 선언을 봐 알수 있는

것이다.  시대의 실제적인 전환점은 그분의 죽으심,부활,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서

이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 하셨을 때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는 자신을 율법의 규정에 복종하셨으며(갈 4:4),

그분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은 구약 시대의 문맥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부탁을 하신 것도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십일조와 같은 의식법과 관련된 언급들은 신약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

 

그렇다면 십일조가 신약의 어디에서도 “폐지되었다”것을 못봤는데 라고 할 것 같으면

안식일과 제사 제도에 대해서는 “폐지되었다”는 문구도 보지 못했다는것과 일반이다.

똑같은 원리로 신약 어느 곳에서도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신적이 없고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만 있을뿐이기때문이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로서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4)고는 했으나, 바울 자신은 그것이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요구하지 않았고(고전 9:15, 18), 자비량으로서만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18에서 감독이 복음을 전하면서 수고비를 받아야 할 것을 언급

했지만 구약의 기업이 없던 레위인들이 하던 방식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만 언급하였을

뿐이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를 도우려고  돈을 모으기 위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특히 고린도)에 알리고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도울 것을 호소하였지만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 그대로 따를 것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롬 15:25-27).

 

고린도 교회에게는 이런 식으로 드리는 헌금의 정신을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고 썼다. 이것을 바울은 “참 연보” 즉 넉넉히 주는

선물 이라고 규정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드리는 헌금을 “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 하시리라”고 말함으로써 현대 교회가

일괄적으로 “십분의 일”을 부과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헌금 방법을 실시하였다(고후

8:12).신약성경에는 우리가 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표한다고

가르치는 구절이 없다.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   십자가에서 율법[의식법에 속하는 십일조 등]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구원의 길로서 율법의 기능은 종결되었던 것이다.  

구약의 피제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제사에 비하면 그림자요, 예표였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실체요,그 원형이다.

 

[히7:19]"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니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그래서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는 것이다.그래서 히브리

서는 모세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보았다.따라서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의 기능의 종결에 대하여 바울보다 더 과격하다.

 

[히7:27]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이 모든 것을 다 해결했기 때문이다.그래서

[히7:18] "전 옛 계명이 무익하므로 율법을 폐하셨다.

 

[롬10: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마침이고 완성인데도 옛 언약의

백성들은 제사 제도를(의식법인 십일조등을)계속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 제도를 하나님은

성전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고 자신의 심장을 내 보이셔서 물리적방법으로 폐지 하셨다.

그래도 성전이 있는한 레위제사가 계속될 것이므로 AD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을 들어 예루

살렘 성전을 훼파시키셨다.

 

그 후 성전 재건은 이루지 못했고 또 시온주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세계2차대전후 팔레스틴에

귀환하여 이스라엘을세웠어도 아직도 성전을 세울수 없는 것이다. 성전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

을 완전히 허물어심으로 지금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 낼 길이 없다.

그들의 성씨가 코헨이란 사람을 찾아 제사장을 세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코헨은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코헨이란 성씨를 가진자도

찾을길이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율법을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 하셨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중

의식법인 십일조 등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다시 허물어 버리는 아주 무서운

행위가 되는것이다.

 

출처 : 고동엽의 교회개혁 지평선!
글쓴이 : 교회개혁포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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