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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태산을 답파하다 2

화이트보스 2009. 3. 7. 18:18

중국 태산을 답파하다 2

태산은 중국 수천여 년의 역사가 녹아 있는 인문과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한(漢)족 정신문화의 축소판이라 부를 수 있다. 태산은 있는 그대로 하나의 천연 역사물이며, 예술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암벽에는 여러 시대에 걸친 제자(題字), 경문, 시구 등이 여러 서체로 새겨져 있다.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태산에 올라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통해 수천 년 전 이곳에 올랐던 역사적 인물들과 시공을 초월한 대화를 나누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을 것 같다.


▲ 병풍 같이 우뚝 솟은 암벽 봉우리들이 길게 펼쳐져 있다.
태산은 많은 역사와 신화, 전설 등이 얽혀 있어 사람들의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독특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이로 인해 산의 경치에 영성이 더해지고, 지리문화적으로도 사람들의 의식에 각인된다. 당나라 시인 유우석은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유명해진다”라고 했다.

태산의 바위란 바위에는 수많은 세월 동안 중국 역대의 제왕, 정치인, 시인들이 남긴 글로 가득 메워져 거의 빈 자리가 없다. 현재 태산 일대에 새겨진 석각은 1,800여 곳이라 한다. 그 가운데 비석이 800여 개, 마애석각이 1,000여 개 정도 된다. 일부에서는 2,200여 개라는 주장도 있다. 거대한 ‘마애석각 박물관’인 셈이다. 역설적으로 보면 이만한 환경파괴도 없을 듯싶지만 이런 환경파괴는 오래되면 문화유산이다. 태산은 자연경관과 더불어 이러한 문화유산으로 세계자연문화유산구역으로 지정됐다.

중국에서 공식 발간된 책에는 태산 정상의 석각만 258곳으로 기록돼 있다. 석각 대부분은 역대 제왕이 봉선의식을 행할 때의 제문, 사묘(寺廟)의 창건과 중수기, 태산을 칭송하는 시문들이다. 중국의 제왕들은 하늘과 인간사는 상호 관련이 있다는 천인상관설을 믿었다. 군주는 태산에 올라 천명을 내려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보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역대 제왕이 열광적으로 추구한 ‘봉선(封禪)’이다.

▲ 1. 공자가 태산에 오른 기념으로 새긴 석각. 2. 공자가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했다는 흔적의 비석. 3. 태산의 위엄을 칭송한 석각.
황제 중에 제일 먼저 태산에 오른 역사적 인물로는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 시황제다. 정상 옥황정 바로 밑에 있는 무자비(無字碑)가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오른 후 세웠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일부 중국 학자들은 한 무제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면서 그 평가를 후대에 받겠다는 의미로 글자를 남기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진시황이 태산에 남긴 글은 대묘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총 220여 글자 중 해독 가능한 글은 불과 10여 자밖에 안 된다. 전체 맥락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태산 정상 석각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글자는 앞 글자에 삐침이 없는 ‘혬二’란 비문이다. 이는 청 말기 유정규라는 문인이 태산의 자연경관을 한 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풍월무변(風月無變)을 적으면서 풍월이란 한자에 변을 없애 버린 비문이다. 풍월에서 변을 없애니 삐침 없는 ‘혬二’이 된 것이다. 태산의 2,000여 개 석각 중 가장 함축미가 뛰어난 글로 평가받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가 끝이 없다는 뜻이다.

2,000여 석각 문화유산으로 남아

정상 옥황정 바로 밑에 공등암(孔登岩)이란 석각이 있다. 공자가 태산 정상을 오른 것을 기념한 표지석이다. 공자는 태산에 오른 후 공자등태산이소천하(孔子登泰山而小天下)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다’는 말을 했다. 공자가 아직 뜻을 펼치지 못할 때 태산에 올라 권력을 가진 제왕들을 은근히 비하했다는 이야기다.

맹자의 흔적도 보인다. 옥황정 바로 아래 암암(巖巖)이라고 새겨져 있다. 태산암암이란 뜻으로 바위같이 굳센 기질, 의연함을 나타내며 호연지기와 상통한다. 이는 맹자의 의기를 기려 새겼다고 한다.

▲ 북두를 향해 있다고 해서 붙여진 공북석. / 대관봉이란 절벽에 당 현종이 남긴‘기태산명’ 마애석각. / 이곳에서 남쪽으로 보면 노나라가 보인다는 첨노대.
정상 바로 아래 커다란 절벽에 당 현종이 남긴 ‘천하대관 기태산명 마애비(天下大觀 紀泰山銘 摩崖碑)가 있다. 대관봉이란 이름을 가진 절벽에 있다. 세로 13m, 가로 5.3m의 바위에 총 966자의 글씨가 예서로 새겨져 있다. 모두 금박을 칠해 휘황찬란하다. 내용은 선인들의 비문이 태산의 위엄을 찬양하고 있으며, 당 시대의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 현종이 봉선한 옥첩 내용의 기록이다. 이전까지 하늘에 고했던 옥첩은 모두 비밀에 부쳐졌지만 현종이 첫 공개했다.

바로 그 옆에 ‘천하가 다 보인다’는 천하대관(天下大觀)이라는 석각이 보인다. 산등절정아위봉(山登絶頂我爲峰)이라는 석각도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 오르니 나도 봉우리가 된다’는 뜻이다. 정상에 선 느낌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다. 또 절정(絶頂), 앙지(仰止) 등의 비석이 보인다. 앙지는 경외하지 않을 수 없는 태산 꼭대기라는 뜻으로 쓰였다.

태산에 새겨진 글 중에서 눈길을 끄는 글씨는 청 강희제 시대에 쓴 것으로 전해지는 ‘과연(果然)’이라는 석각이다. 이 한 마디도 어떤 글보다 적합한 표현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 건륭제는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조양동만장비(朝陽洞萬丈碑)다. 높이 20여m, 넓이 9m에 달하는 거대한 비문에 새겼다. 그는 여섯 차례 태산에 오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산 암벽에 140여 수의 시와 130개의 석각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 F코스는 가장 육산에 가까운 모습을 드러낸다.
십팔반이 시작되기 직전에 모택동이 수풍류인물환간금조(數風流人物環看今朝)라고 쓴 글이 보인다. ‘이제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무산계급뿐이다’는 뜻이다. 진시황도, 한무제도, 당태종도, 징기스칸도, 영웅으로 불리던 그 어떤 인물도 다 지나갔고, 현재 영웅이라고 할만한 인물은 무산계급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는 등태산간조국산하지장려(登泰山看祖國山河之壯麗)를 새겼다. ‘태산에 올라 조국의 강산을 내려다 본다’며 중국 공산당 혁명의 성공을 만족하는 듯한 심경을 표시해 놓았다.

일천문에서 남천문까지의 계단을 천제(天梯), 즉 하늘사다리라고 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열심히 노력해서 올라가라’는 뜻인 노력등고(努力登高)가 있다. 일천문에는 등고필자(登高必自)가 보인다. 이 글은 중용에서 등고필자비, 행원필자이(登高必自碑, 行遠必者邇)에 나오는 얘기다.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서 출발해야 하고, 멀리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평범하면서도 심오한 철학이 담긴 말이다. 명나라 때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 등 많은 역사적 인물들 흔적 남겨

남천문 부근 바위벽엔 ‘부앙무괴작(俯仰無愧   )’이 있다. 태산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 사람을 굽어 수치스러운 일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는 뜻이다. 남천문 바로 옆엔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라는 뜻의 여등천(如登天)이 새겨져 있다.

종선여등(從善如登) 석각도 눈에 들어왔다. ‘올라갈 것이냐 말 것이냐, 고민하지 말고 계속 오르라’는 의미다. 원래 이 말은 중국 속담인 ‘종선여등(從善如登), 종악여붕(從惡如崩)에서 나온 것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선을 좇는 것과 같고, 내려가는 것은 악을
좇는 것과 같다는 말에서 나왔다.


▲ 옥황정 바로 밑 도교사원과 기암절벽들.
이와 같이 태산 홍문 등산길은 고대 제왕들이 다니던 길로서 일명 어도라고도 부른다. 당의 고종과 현종, 송의 진종 세 황제는 봉선 등으로 태산을 오르내리면서 비를 세운 것이 모두 16개에 달한다. 문인들은 이 등산로를 따라 오르며 수많은 글을 남겨 ‘고시의 길’ 또는 ‘서법의 길’이라고도 부른다.

어도, 고시의 길 등으로 불리는 이 등산길을 하산길로 잡고 중국 태산트레킹 황동호 사장이 개척한 F코스로 올라가기로 했다. 황 사장이 가이드 겸 산행대장 겸해서 단 둘이 출발했다. 중국엔 등산문화가 없어 산에서 등산객을 만날 일이 없다. 태산 정상까지 둘이서 가야 한다. 간혹 방목하는 염소나 소를 확인하기 위해 오르내리는 방목꾼을 만나면 다행이다.

▲ 지나쳐 온 등산로가 첩첩 봉우리로 쌓여 있다. 제일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용각산이다.
들머리인 태악구에 도착하니 아침 9시15분. 여전히 안개가 잔뜩 끼어 있다. 태산에 화창한 날은 연간 며칠 안 된다고 했다. 조촐하고 단출하게 산행을 시작했다. 좌우로 늘어선 밤나무가 반기는 듯했다. 재배종 같아 보였다.

10분여 오르니 넓은 암벽 계곡이 깊게 펼쳐졌다. 호우라도 내리면 휩쓸 것만 같았다. 악산이기 때문에 물을 오래 머금지 못한다. 계곡에도 물이 있는 날이 드물다. 물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쳐다보며 가기도 했다.

계곡 오른쪽 길옆으로 빠졌다. 출발한 지 1시간여만이다. 안개는 조금 걷히는 듯싶더니 또 밀려왔다. 시야가 영 흐리다. 사진이 문제였지만 걷기엔 무리 없었다. 산길로 접어들었다. 제법 등산로 같이 잘 닦여 있었다. 방목꾼들이 다니던 길이다. 다시 30여 분쯤 올라가니 집이 한 채 나타났다. 큰 집이다. 그런데 내부를 보니 사람은 전혀 살지 않은 폐가 같아 보였다. 황 사장은 “방목꾼들이 사는 집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한 번씩 묶고 가는 상태로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안개 낀 늦가을 호젓한 태산 등산로를 계속 나아갔다. 삼거리가 나왔다. 왼쪽으로 가면 오늘 갈 등산로인 F코스이고, 오른쪽은 다음에 갈 B코스라고 했다. B코스 우두봉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우두봉은 바위봉우리 모양이 소 머리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둘만의 호젓한 산행이 계속 이어진다. 이런저런 사는 얘기가 오고 갔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 황 사장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이 재미있다. 산은 모든 얘기를 내색 않고 다 품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더욱이 여기는 그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태산이다. 다 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태산엔 다람쥐가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두 번째 올라왔는데도 도토리가 떨어진 채 그대로 방치돼 있다. 다람쥐가 없으면 먹이사슬이 끊어져 동물들도 살지 못할 텐데….
황 사장은 태산에서 뱀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기가 센 산이라 그런지, 먹이가 없어 그런지 모를 일이다. 그는 산에 다니다 간혹 이름도 모르는 동물을 본다고 덧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형체는 그대로이나 내장은 밖으로 나와 죽은 족제비 비슷한 동물이 길 중앙에 누워 있었다. 사람 행위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동물 소행 같지도 않았다. 잠시 살펴보고 지나쳤다.

태산은 악산이다. 역시 또 암벽이 나왔다. 아슬아슬하게 지나갔지만 전초전에 불과했다. 수십 분 지나니 뜻밖에 밀림 같은 육산이 펼쳐졌다. 칡과 이름 모르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뒤엉켜 널브러져 있었다. ‘태산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코스와 다른 장면이었다. 황 사장도 F코스가 가장 육산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등산객 없어 개척하고도 등산로 찾기 어려워

오후 1시쯤 숲을 벗어나 조그만 오솔길이 있는 돌계단을 만났다. 오르기 좋게 간격도 좁지 않고, 높이도 적당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봉우리를 서너 개 지나고 다시 계단길 오르막길이다. 무난한 코스지만 오르는 길은 언제나 힘들다. 오후 1시20분 드디어 계단 끝이다. 왼쪽은 용각산 정상 암벽이 90도 직각으로 서 있고, 오른쪽은 우리가 가야 할 옥황정이 우뚝 솟아 있다. 용각산은 용의 머리와 뿔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기 전에 지금은 그야말로 ‘태산 식후경’ 할 시간이다. 뱃속에서는 벌써 신호를 보냈다. 라면과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다. 라면은 우리나라 사람이 어느 산엘 가든지 가져가는 기호품 음식이다. 거의 세계인의 음식이 된 상태다.

다시 출발이다. 억새가 깃든 호젓한 등산로다. 황 사장이 개척했다고는 하지만 다니는 등산객이 없어 황 사장 자신도 가끔 헤맨다. 사람이 다니지 않으니 그가 낸 길조차 나무에 묻힌 것이다.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찾기 힘든 코스다.

드디어 전형적인 암벽 코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거의 90도 되는 암벽을 틈이 있으면 잡고 발만 끼우고 올라갔다. 옆으로 쳐다보면 아찔하다. 오금이 저려 쳐다볼 수도 없다. 무조건 잡았다. 약 50m 겨우 올라가니 이젠 칼바위 능선이다. D코스에서 겪었던 상황보다는 덜했지만 북한산 칼바위 정도는 됐다.

태산 옥황정 정상을 바라보며 나아갔다. 옥황정 바로 밑 케이블카 옆으로 지나갈 예정이다. 칼바위 능선 좌우로는 역시 낭떠러지다. 쳐다보기도 싫다. 붙잡을 것만 있으면 꼭 잡았다. 케이블카 옆 등산로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제부터 가는 길은 오르막길이지만 평지 수준이다. 여태 온 길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쉽다. 정상에 오르니 구름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는 모습이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산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정상에서 다시 계단으로 하산했다. 오후 4시15분 케이블카와 버스종점이자 출발점에 이르렀다. 아침 9시15분에 출발한 지 꼭 7시간만이다.

두 번째 오른 태산이지만 전혀 지겹지 않다. 역시 산은 산이다. 더욱이 이 산은 그 유명한 태산이 아니던가. 다음 호에서는 문학 속에 나타난 태산을 알아보고, 등산로는 황 사장이 개척한 B코스에 대해 소개한다.

주변 명소

대묘·공자 유적지·수호지 무대 등 볼거리 많아

태산 주변에 가볼 만한 명소가 많다. 가장 유명한 장소가 대묘다. 역대 중국 황제들이 태산에서 옥황상제께 봉선의식을 올리기 전 먼저 태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북경의 고궁, 공자가 살던 곡부의 대성전과 함께 중국 3대 건축의 하나다. 송나라 때 건축했다고 전해지는 본전인 천황전 내부엔 가로 62m, 세로 3.3m의 거대한 벽화가 있으며, 경내에는 약 2,000년 전 한무제가 심었다는 측백나무가 있다. 바로 앞에 한무제가 심었다고 ‘한백’이라는 비석을 세워 관광객들에게 알리고 있다. 입장료는 20위안이다.


▲ 대묘에 있는 한백. / 곡부에 있는 공자묘. / 샘솟는 포돌천.

태산에서 버스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곡부엔 공자가 살던 집, 묘, 사당 등이 잘 보존돼 있다. 이곳엔 또 공자의 후손들인 공씨의 무덤이 수천 기가 보존돼 있다. 문화혁명 때 비석 등이 일부 파손됐으나 원형은 그대로다. 입장료는 3곳 모두 보는 데 150위안.

당나라 때 사찰인 영암사는 태산에서 버스로 40분 거리에 있다. 1,6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 불교와 비슷하다. 가장 눈여겨 볼만한 곳은 천불전의 채색나한 조각상이다. 400나한상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생생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마치 서로, 또는 관광객과 대화하는 듯하다. 입장료는 60위안.


지하 2m에서 분출되는 샘물이 일품인 포돌천이 있다. 태산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다. 역대 황제들이 이 샘물을 남방 순시 때 식수로 보급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청조의 강희제 등이 방문 흔적이 남아 있다. 입장료 45위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이름만 대면 아는 양산박이 있다. 수호지의 실제 무대다.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태산에서 1시간40분 거리. 입장료 80위안.

태산 등산로를 개척한 중국태산트레킹 황동호 사장에게 문의(0505-679-1526 또는 0504-898-7440)하면 가르쳐 준다. 한국에서 무료 전화다.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http://cafe.daum.net/lovetaishan)에도 잘 소개돼 있다.


/ 글·사진 박정원 차장 jungwo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