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넘게 서울의 랜드마크… 이정도면 문화유산"
장군이 왼손잡이일 리는 없지요 왼손에 칼을 쥐고 있다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쟁 때의 상황입니다 동상의 콘셉트는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입니다
조각가 故 김세중씨 아내 김남조 시인
"철거 얘기 나올 때마다 불편… 시민들이 동상 지켜준 셈 칼ㆍ갑옷 고증 거쳤고 길이는 비례 고려한 예술작 표현"
- ▲ 광호문 이순신 장군 동상의 얼굴은 지상에서 높이가 18m를 넘는 데다 차도로 둘러싸여 있어 정작 시민들이 보기 힘들다.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 도록에 장군의 확대된 얼굴 사진이 있다. 마치 남쪽의 일본을 향해 다시는 침략할 마음을 먹지 말라고 눈을 부라리는 듯하다. 사진 밑은 폭설에 덮인 동상. 생전에도 동상이 돼서도 풍설(風雪)을 겪는 장군의 운명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 한마디로 세종로에 세종이 아닌 장군의 동상이 들어서게 됐다. 동상 건립은 애국선열조상(彫像)위원회와 서울신문이 주관했다. 동상에는 노산 이은상(李殷相), 월탄 박종화(朴鍾和), 팔봉 김기진(金基鎭) 같은 원로의 의견이 반영됐다. 갑옷은 복식전문가 석주선(石宙善)의 고증을 받았다.
동상 제작은 서울대 미술대 교수 김세중(金世中·1928~1986)이 맡았다. 그는 종교조각 분야의 거장(巨匠)이었다. 김세중의 손길은 지금 절두산과 혜화동 성당의 조각에 남아 있다. 장충동 유관순 열사 동상, 파고다공원 3·1운동 기념부조도 그의 작품이다.
재단법인 김세중 기념사업회로 바뀐 서울 용산구 효창동 5-390 김세중의 집이 장군을 되살리는 작업실이었다. 김세중 작품집에는 장군의 동상과 함께 포즈를 취한 생전의 작가 모습이 남아 있다. 좌대를 포함해 높이 18.5m, 무게 8t인 장군의 동상은 작가의 집 천장을 뚫고 우뚝 솟아 있다.
김세중의 이순신 동상은 전국에 200개가 넘는 장군 동상 가운데 절품(絶品)으로 평가된다. 그 걸작 때문에 그의 집안은 풍파를 겪었다. 도로 폭이 계획보다 더 넓어지면서 먼저 제작한 동상이 왜소하게 보이자 새로 만들까 말까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고민하던 작가는 결단을 내렸다. "처음 것을 부수고 다시 만든다"는 것이었다. 예술가의 결단은 가족에겐 큰 빚으로 돌아왔다. 김세중의 아내인 원로 시인 김남조(金南祚·82)를 비롯한 4남매는 그때의 불안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생전의 장군은 왕(王)과 왜적(倭敵)에게 미움을 받았다. 이제는 장군의 동상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동상이 세워진 지 10년도 안 된 1971년부터 지금까지 말의 '비수(匕首)'가 날아들고 있다. 불세출의 애국자(愛國者)에 대한 질시는 4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2002년부터 광화문광장을 만든다는 이야기 뒤에는 장군 동상을 철거하자는 말이 후렴처럼 따라다녔다. 서울시는 최근 장군의 동상 뒤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그런데도 "정도전 동상까지 세우자"는 입방아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김세중의 아내인 시인 김남조는 40년 세월을 침묵하다 28일 기자에게 심정을 밝혔다. 이에 앞서 서울미대를 나온 아들 김범(金範·46)과 그의 아내이자 시아버지의 제자 유현미(柳賢美·45)도 입을 열었다. 3인을 통해 이순신 장군 동상의 진실을 추적한다.
―당시 동상 건립 붐이 일었지요.
"정치인들이 선열(先烈)을 되살리는 데 앞장서자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박 대통령이, 세종대왕상 건립 비용은 김종필(金鍾泌)씨가 자비로 댄다는 식이었습니다. 나중에 애국선열조상위원회가 발족했지요."
―돈만 댄 겁니까, 관심도 보였습니까.
"박종화·김기진·이은상·김종필씨가 위원회 멤버였습니다. 그 분들이 동상을 만들 때 2차례 작업실을 찾았고 동상이 완성됐을 때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직접 살피고 돌아갔습니다."
―당대의 권력자들이 관심을 보였는데도 동상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게 놀랍군요.
"처음 만든 것은 정부가 크기를 지정한 것입니다. 그 후 세종로가 예정보다 더 넓어졌습니다. 처음 것을 가져다 놔도 무방한데 김세중 교수(김 시인은 남편을 이렇게 불렀다)는 조각가로서의 욕심이 컸던 것 같아요. 공간 확장에 따라 동상 크기를 40% 더 크게 했습니다."
―재정난을 어떻게 이겨냈나요.
"동상은 1m를 키우면 그 비용만큼 빚을 집니다. 제가 박근혜(朴槿惠) 전 한나라당 대표가 천주교에 입교할 때 대모(代母)였어요. 박 전 대표가 고교생 때입니다. 고(故) 육 여사 귀에 저희 사정이 들어갔어요. 그 분이 '나라 일을 하다 개인이 손해를 봐서야 되겠느냐'고 했대요. 나중에 이후락(李厚洛)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연락해왔습니다. '손해 본 실비(實費)만 이야기하라'고요."
―효창동 집이 동상을 만들 만큼 컸나요?
"동상은 찰흙으로 본을 뜬 뒤 석고로 틀을 잡고 그 틀 안에 청동을 부어 완성합니다. 효창동 작업실 천정이 동상의 높이보다 낮아 마지막으로 동상의 투구 윗부분을 완성시킬 때는 반투명 플라스틱 슬레이트로 된 천장을 벗겨내고 작업했습니다. 지금 같은 도르래 달린 사다리가 없어 휘청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동상 가슴께까지 올라가 작업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장군의 동상이 당시로는 대단한 규모였지요.
"청동 주물 만드는 법을 몰라 탄피(彈皮)를 주워 분석해보기도 했지요. 김 교수뿐 아니라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엄태정·윤석원씨도 저희 집에 자주 드나들었어요. 동상은 통금(通禁)시간을 이용해 광화문으로 옮겼어요. 그만한 크기의 동상을 옮길 국내 최대의 기중기가 군 부대에 딱 한 대 있었는데 그걸 이용했습니다."
―장군 동상이 칼을 오른손에 쥐고 있다는 걸 두고 오래 전부터 논란이 있었지요.
"장군이 왼손잡이일 리는 없지요. 왼손에 칼을 쥐고 있다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쟁 때의 상황입니다. 동상의 콘셉트는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으로 뭔가를 쥐고 있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나요?
"(이하 김범·유현미) 조각에서 수호자(守護者)들은 오른손에 뭔가를 들고 있습니다. 책을 든다든지 횃불을 들고 있지요.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실존모델인 영국 글래스고의 윌리엄 월레스 동상이나 대천사(大天使) 미카엘이 모두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지만 칼자루를 거꾸로 들거나 지팡이처럼 땅에 짚고 있습니다. 동상에서는 오른손이 그 인물의 의지를 대변합니다."
―동상의 얼굴이 이순신 장군을 닮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저는 김세중 선생과 비슷해 보이는데요.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다빈치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고 하지만 작가와 닮았다는 말은 가족 입장에서 할 수는 없는 겁니다. 나라의 큰 인물과 비교할 수 없지요."
―동상의 얼굴이 너무 무섭게 생겼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동상의 얼굴은 무인(武人)의 얼굴, 근엄한 장군의 얼굴, 수호자의 얼굴 이런 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든든한 아버지지만 일본인들은 잘못하면 혼내줄 것 같은 무서운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진영(眞影)이 사실은 없지요.
"장군의 풍모에 대한 기록이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징비록'에 있습니다. '순신의 사람 된 품이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아담하여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 가슴에 담력이 있어 몸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갔으니 본래부터 수행해온 소치라 하겠다'는 부분입니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된 월전(月田) 장우성 화백의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게 1973년입니다."
―장군이 들고 있는 칼이 일본도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현충사의 칼은 일본도가 맞습니다. 197.5㎝나 되는 긴 칼에 대해서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에 끌려갔던 도장(刀匠) 태구련(태귀련 혹은 태귀운이라는 설도 있다), 이무생이 장군에 잡혔어요. 장군은 '첩자가 아니냐'고 문초한 뒤 칼 두 자루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일본에서 일본도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일본도는 당시로서는 최신예 검(劍)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상의 칼은 현충사 칼을 모델로 했지만 실제 비율보다 축소한 것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명장이 일본 칼을 들고 서 있는 건 조금….
"칼이 한국의 검이냐 일본도냐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칼 자루에 '석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의 색이 변하는도다. 한바탕 휘둘러 쓸어 없애니 강산이 피로 물드는구나(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라고 적혀 있습니다. 일본을 물리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요."
―칼의 크기는 실제보다 작고 갑옷은 너무 길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중국 갑옷 같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칼이나 갑옷의 길이는 비례를 고려한 예술적 표현이라고 봐야지요. 갑옷의 모양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순신 장군 영정을 참조했고 복식 전문가인 석주선씨의 고증도 얻은 것입니다."
―동상의 시선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김남조) 지금의 광화문 동화면세백화점 건물이 옛 국제극장이었지요. '이순신 장군이 극장 프로가 뭔가 본다'는 우스개가 있었습니다. 동상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국민들과 눈을 맞추려는 의도지요."
―전국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100개다, 200개가 넘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를 조사해본 적은 없지만 대부분의 학교마다 하나씩은 있는데 왜 유독 김세중 선생 작품이 구설수에 오를까요.
"이순신 장군의 삶 자체가 살아 있을 때부터 모험적인 삶이었지요. 서영훈 선생·조향록 목사·권이혁 전 서울대총장·이옥란 박사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원로들의 모임이 있어요. 그 분들도 제게 동상을 둘러싼 소문들을 물은 적이 있어요. 자세히 이야기하니 '이제부터 우리는 바르게 답하겠다'고 하더군요."
- ▲ 김세중의 아들 김범과 며느리 유현미가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서 있다. 위 작은 사진은 아내 김남조 시인.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나는 황국 신민으로소이다'라는 책에서 기원했다는 말도 있다. 친일파를 고발한 이 책에 '이순신 동상을 만든 작가가 친일파'라는 부분이 있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이순신 동상=광화문 동상=김세중 작품'이라고 잘못된 연상을 한 것이다. 작가의 아들과 며느리와 나눈 대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 육사를 나와 동상도 친일 성격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기분이 듭니까.
"박 대통령을 싫어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친일하려는 사람이 왜 일본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동상을 세웠겠습니까. 저는 최근에 기부를 하다 구설수에 오른 문근영씨 사건과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합니다. 문씨의 선행(善行)을 그의 가족사와 엮어 몰아가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조각을 만들 때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 사람이 있겠어요?"
―친일작가 중에 이순신 동상을 만든 사람이 실제로 있습니까?
"그 책에 등장한 분은 다른 지역의 이순신 동상을 만든 분입니다. 우리 가족은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어요. 출판사와 저자에게 항의해 관련된 부분이 모두 수정됐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읽은 사람들의 기억까지 바꿀 수는 없지요."
―그런 일들을 당할 때 기분은 어떤가요.
"그 친일작가의 친척을 직업상 알게 됐는데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기 친척 작품이라고 해요. 김세중 도록을 보여줬는데도 긴가민가 하는 표정이더군요."
―김세중 선생을 깎아내리는 데 미술계 인사도 포함돼 있지는 않았나요.
"한 조각가가 김세중의 동상이 내려질 때를 대비해 대체품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속이 많이 상했을 텐데 부모님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김세중 선생이 대학시절 대단한 반일(反日)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김남조 시인의 집안도 그랬다지요?
"아버지가 대학 시절, 영화감독 김수용 선생과 함께 독립군을 소재로 한 연극을 많이 했어요. 각본도 쓰고 연기도 하고. 아버지는 일본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어머니 김 시인 쪽 이야기는….
"조부(祖父)께서 한일합방 반대 운동을 하다 옥사(獄死)해서 멸문(滅門)될 뻔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절대 안 합니다. '시인은 아름답고 좋은 것만 생각하고 괴로운 기억은 덮어버리려 한다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조각일수록 구설에 오르는 경우가 많지요.
"로뎅의 '칼레의 시민상'이나 '발자크상'도 건립 당시 난리가 났었지요. 왜 몸을 접고 있느냐, 망토를 들고 있느냐, 왜 표정을 찡그리고 있느냐는 시비가 일었어요. 어떤 형태를 만들든지 결과적으로 그 모습이 조형적이면 되는데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가족으로서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균형 잡히고 아름답고 의지가 잘 표현된 작품입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자유롭고 안전한 느낌, 집안을 지켜주는 아버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면 일본사람들이 볼 때는 옆집 아버지인데 잘못하면 막 때리거나 자기들을 가만히 놔둘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비쳐질 것 같아요."
―한때 한 통신회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희화화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희는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를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했어요. 그 광고를 보고 '저 정도면 막아야겠다' 싶어 저작권 등록을 했습니다. 그 광고 때문에 아이들이 통신회사 상품 이름을 따 '메가패스 장군'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어요.
―저작권 등록료는 어디다 씁니까.
"많이 받지는 않습니다만 지금까지 들어온 금액은 독도(獨島)수호 운동을 하는 반크라는 단체에 기부했어요. 그 단체 홈페이지를 보니 이순신 장군 프로젝트라는 게 있는 걸 알았습니다. 대구의 정신대 할머니 돕는 모임에도 기부한 적이 있고요."
주가를 날리는 인기작가 김영하(金英夏)의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 말미에 '보물선'이라는 단편이 있다. 살짝 맛이 간 '형식'이라는 주인공이 충무공 동상 건립부터가 친일파의 음모라고 믿고 태극기로 이순신 장군 동상의 얼굴을 덮고 시위를 벌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보물선닷컴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주가 조작을 하다 망한 형식은 소설 뒷부분에서 형식은 결국 광산에서 훔친 다이너마이트로 충무공 동상을 폭파시켜버리고 만다. 형식의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 가운데 그가 여전히 지리산 일대를 돌며 일제가 박아놓았다는 쇠말뚝을 뽑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소설에 '이순신 얼굴이 실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얼굴이다'라는 부분이 등장했지요.
"솔직히 굉장히 불편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어렸을 때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많이 시달렸는데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소설에 등장했으니까요. 그래도 문학 쪽 사람인데 그래도 같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김 시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저희가 그 이야기를 알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세대 차이는 나지만 같은 문학인이기도 하고요. 김영하씨의 다른 소설을 사서 다 읽어봤어요. 원래 파격적인 소재를 많이 발굴해 쓰는 작가더군요. 그런 발상도 문학적 상상력의 일종인데 우리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는 거지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진 지 이제 정확히 40년을 넘겼습니다. 이 정도면 문화유산이 아닌가요.
"세종로니까 세종대왕 동상, 충무로니까 이순신 장군 동상 하는 식(式)이면 곤란하다고 봅니다. 길에 맞춰서 동상을 세우는 건 말이 안 되지요. 서울시나 정부에서 알아서 하는 것이지만 동상에 대해 너무 목적의식이 없고 소신이 없고 전문적이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정도 되면 사실 문화 유산입니다. 40년 넘게 서울의 랜드마크가 됐고 외국에서도 한국의 이미지를 그릴 때 이순신장군 동상이 많이 나옵니다. 그 좋은 이미지를 단숨에 없애서는 곤란한 것 아닐까요?"
―동상 철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기분이 언짢겠지요.
"(이하 김남조)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인 2002년에 광화문광장 이야기가 나오면서 동상 철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때 처음 10행짜리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얼마 지나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장군의 동상은 그대로 두기로 했으니 걱정 말라'고 전해주더군요."
―왜 그때마다 유족으로서 의견을 표하지 않았나요.
"가족은 작가의 그늘에 숨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시민들이 장군의 동상을 지켜준 셈이 됐지요. 인터넷에 글을 많이들 올렸어요. 철거하겠다는 안(案)에 많은 시민들이 반대했지요."
―그래도 철거한다면요.
"이순신 장군 동상은 망가질 겁니다. 동상은 그대로겠지만 거북선이 있는 좌대는 해체 후 조립할 수 없는 공법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당시 조각 수준이 그만큼 미숙했어요. 철거하면 모작(模作)을 세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도 당시를 기억하는 걸 보니 부부 사이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당시 숙명여대 교수였고 김세중 교수는 서울대에 나갔어요. 서로 바빠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었어요. 둘 다 예술가였지만 실상은 노동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도 동상을 가끔 봅니까?
"최근에 광택이 나도록 깨끗이 청소한 걸 보니 기분이 좋더군요."
―괜찮으면 광화문에 나와 김세중 교수 작품과 함께 데이트 한번 하시지요.
"문학지에 내야 할 시의 마감시간을 지키지 못했는데, 문 부장도 사진보다 기사 쓰는 데 열중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래도….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국가적으로 큰 어른(이순신 장군)을 가족(남편 김세중 교수)과 연결시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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