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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들어가실래요? 백두대간 속 백미 구간

화이트보스 2009. 4. 2. 09:44

함께 들어가실래요? 백두대간 속 백미 구간 [중앙일보]


우리나라 산은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법이 없다. 반만 년 역사를 거치며 산은 사람과 함께 웃었고 사람과 함께 울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려 산으로 들어갔고, 죄를 지어도 산으로 도망쳤다. 풍류를 읊을 때도 산 안에 있어야 했고, 도적질도 산 속에서 저질렀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겠다고 외세는 애먼 산줄기에 쇠말뚝을 박았고, 동란이 났을 때 지리산 골짜기는 사람이 흘린 핏물을 내려보냈다. 우리네 산엔 사람의 역사가 있다.

우리나라 땅은 지구에서 가장 늙은 축에 속한다. 사람이 엄두도 못 낼 만큼 험한 산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이름난 산 대부분은 높은 산이 아니다. 깊은 산이다. 우리 조상은 산에 오른다고 쓰지 않았다. 산에 든다고 적었다. 이 ‘들 입(入)’자에 우리네 산의 역사와 철학이 들어 있다.

우리나라 땅의 7할은 산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나머지 3할에서 살았던 건 아니다. 우리는 산에 기대어 살았다. 산줄기따라 길을 냈고,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길 옆에서 농사를 지었다. 산에서 나는 물과 풀과 나무와 광물로 우리는 연명하고 육신을 보전했다. 산 앞에서 우리는 어미 젖 찾는 갓난아기였다.

십 년쯤 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는 산을 찾았다. 지금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젠 너무 많은 사람이 산 안에 있어 되레 산을 걱정하는 참이다. 하루가 다르게 행락지가 되어 가는 오늘 산의 모습에서 자꾸 경박해지는 우리네 삶을 읽는다.

백두대간에 들겠다고 결심한 건 우리네 삶을 더 들여다보고 싶어서다. 백두산에서 비롯해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1400㎞ 줄기는 우리 강산의 근본이자 중추다. 그 백두대간에 한 달에 한 번씩 들 작정이다. 혼자 가는 산길은 외로워 길벗도 구했다. 이렇게 백두대간 안에서 올 한 해 살아낼 생각이다. 여기엔 어떠한 허세도 없다. 산과 몸을 비비고 싶을 따름이다.

백두대간에 든다. 백두대간을 품는다. 아니, 그 무량한 품에 안긴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week& 새 연재
백두대간 속 백미 구간


week&이 한 달에 한 번 백두대간에 오른다. 백두대간의 장대한 산길 중에서 백미(白眉)가 되는 길만 골라 오른다. 이름하여 ‘백미대간’ 산행이다. 백미대간은 원로 산악인 이종승(65) 승우여행사 대표가 선정한 백두대간 산행 코스다. 이 대표는 여섯 차례 백두대간 종주 경력을 자랑한다. 그는 백두대간이란 개념이 알려지기 전인 1987년부터 백두대간에 들었다. 산악인 사이에서 백두대간 종주가 ‘태백산맥~소백산맥 대종주’라 불렸던 시절이다.

1400㎞ 백두대간 줄기 중에서 남쪽 땅은 684㎞에 이른다.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산길만 그렇다는 얘기다. 진입로와 하산 길을 합치면 백두대간 종주 길은 1200㎞를 훌쩍 넘는다. 산악인들은 이 코스를 40~60개로 쪼개 종주에 도전한다. 코스를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코스 개수도 달라진다. 백두대간 종주가 유행이던 때 산악인들은 달포 안에 종주를 마쳤다. 하루 평균 15㎞ 산행을 강행군한 셈이다. 산림청은 모두 42개의 코스로 정해 놓았다.

이 대표는 백두대간 코스 중에서 24개를 엄선했다.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백두대간 보호구역을 제외한다. 둘째, 계절별 명승지를 골라낸다. 셋째, 특별한 장비 없는 일반인도 산행이 가능해야 한다.

산림청은 2005년 백두대간 인근의 26만3427ha 지역을 백두대간 보호구역으로 확정해 발표했다. 보호구역은 6개 도, 32개 시·군에 걸쳐 있으며 모두 7306개 지역이다. 구역 안에 발을 디디는 행동 자체가 불법행위다. 벌금 50만원을 물어야 한다. 우리나라 자연생태계의 태자리와 같은 백두대간이 밀려드는 인파에 훼손되고 있어서다. 그리하여 백두대간 종주는 이제 법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개념이다. 주요 구간만 다녀오는 이른바 ‘포인트 산행’만 가능하다. week&은 이 백두대간 산행에 유명 인사를 초청했다. 우리네 산의 면목을 보여주고 싶었다. 산을 잘 모르는 인사는 더 환영이다. 그들이 성공하면, 누구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어서다. 이번 기획은 일단 10회를 목표로 삼았다. 그 이후는 산에서 열 번 내려온 다음 생각할 참이다. 자, 이제 기나긴 대장정을 시작한다.





문장대에 피었네 … 제비꽃·서리꽃·웃음꽃

① 음악가 남궁연과 속리산 코스 백미대간 4월의 코스는 속리산이다. 4월에 속리산을 오르는 이유는 국립공원 대부분이 4월 내내 입산이 통제되기 때문이다. 산불을 염려한 조치다. 그러나 속리산은, 정확히 말해 천황봉~입석대~신선대~문장대 앞까지 이어지는 3.9㎞ 구간은 백두대간 보호구역은 물론이고 입산 통제구역하고도 상관이 없다. 연중 개방된다. 이 속리산 능선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이다.

속리산은 어제의 산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1970년대만 해도 속리산은 설악산·경주와 함께 국내 3대 신혼여행지였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70년 발표한 한국 팔경에도 속리산은 버젓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속리산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불편한 진입로 탓이 컸다. 다행히도 2007년 청원~상주 고속도로가 완공돼 훨씬 가까워졌다. 속리산 입구의 상인들은 왕년의 영화를 내심 기대하고 있다.

4월의 길벗은 음악인 남궁연(41)씨다. 산이라면 젬병인 서울 토박이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엄살을 떠는 모습에서 꼭 데려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산이라면 일단 고개부터 젓는다면 어떻게든 동행할 작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궁연이란 인물은 제격이었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산행 전야

산행 전날 저녁 속리산 입구 해조모텔. 대를 이어 속리산 앞에서 식당과 여관을 함께하는 곳이다. 주인에게 물었더니 50년도 넘게 같은 곳에서 영업 중이란다. 일본식 가옥구조를 닮은 낡은 여관 건물이 왠지 정감이 갔다.

식당에 일행이 모여 앉았다. 일행은 산행을 이끌 이종승 대표, 남궁연씨, 취재팀 등이다. 산채정식에 솔잎동동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이 대표가 왕년의 무용담을 늘어놨다. 간첩으로 오해받아 경찰 조사를 두 번 받았는데 그중 한 번은 신고한 이가 하숙집 할머니였다는 대목에서 일제히 폭소가 터졌다. 뭔가 생각나는 일이 있는지 남궁연씨가 말을 이었다.

“저도 부모님 속깨나 썩였죠. 80년대 중반 교복 자율화가 됐을 때 학생 신분을 속이고 춤추러 다녔어요. 아버지 차 훔쳐 타고 다녔지요. 그러다 아버지에게 걸렸는데, 글쎄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를 하신 거예요. 며칠 경찰서에서 살다 나왔지요.”

저녁 식사는 늦은 밤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기상시각이 오전 5시였다. 숙소로 향하는 남궁연씨에게 “긴장되느냐” 물었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음악 하는 사람은 주로 밤새 작업을 하거든요. 제 평균 취침 시간이 아침 10시예요. 새벽에 못 일어날까봐 수면제까지 준비해 왔습니다.”

속리, 속세를 떠나다

이튿날 오전 6시. 속리산 입구에 들어섰다.

“속리산(俗離山)의 뜻은 세속과 이별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부터 속세와의 연을 끊는 겁니다.”

이 대표의 설명을 듣고, 법주사를 지나는 오솔길을 따라 걷자 세심정(洗心井)이 나타났다. 마음을 씻는 우물이라. 세조가 이 계곡까지 들어와 목욕을 하고 갔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여기서 계곡을 따라 오르는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남궁연씨와 나란히 걸었다. 아직은 경사가 완만해 대화가 어렵지 않았다. 사위가 희붐해지고 있었다.

-국가브랜드위원회에서 일하신다고요?

“네, 거기 민간위원이 34명인데 유일한 고졸이지요.”

- 고졸이오?

“대학을 때려치웠어요. 그 얘긴 나중에 하지요.”

-국가브랜드위원회라면 국가 이미지를 높이자고 만든 위원회이겠지요?

“그렇죠.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메이드 인 코리아’란 마크를 숨기고 싶어한다는 현실이 반영된 거죠.”

-이미지란 게 높이자고 해서 높여지는 건가요? 한 번 각인된 이미지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잖아요? 여기 속리산도 마찬가지잖아요. 옛날엔 이미지가 좋았지만 지금은 ‘누가 지금 속리산에 가?’ 그러잖아요.

“그래도 잘못된 건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 테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말할 때 우리나라만 ‘흑인 대통령’이란 수식어를 붙여요. 대통령이면 그냥 대통령이죠. 미국에서도 ‘아프리카 아메리칸’이라고 하는데 우리만 그렇게 안 부르죠. 우리에게 흑인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박혀 있는 거죠. 그런 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남궁연씨는 생각이 깊었다. 대중가요를 하는 연예인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산행에서 연예인이란 이미지를 고칠 수 있다면 이것도 보람이겠다 싶었다.

4월의 상고대

경사가 급해졌다. 선두에 선 이 대표가 일행을 자주 세웠다. 숨 고르는 일행을 보며 이 대표가 손가락으로 길섶에 핀 야생화를 가리켰다. 노란 제비꽃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따다닥 나무 쪼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따구리였다. “야, 이거 잘하면 하늘다람쥐도 보는 거 아니야?” 조용철 사진기자의 희망 섞인 감탄이었다. 하늘다람쥐는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의 막을 이용해 공중을 날아다니는 야생동물이다. 최근엔 발견됐다는 보고가 거의 없는 희귀종이다. 그 하늘다람쥐의 서식지가 바로 속리산 일대다.

이른 아침 산 속은 추웠다. 비쩍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였고, 계곡 주위 바위 아래엔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능선 아래에서 밤새 내려앉은 상고대가 보였다. 상고대는 눈꽃과 함께 겨울 산을 대표하는 풍경이다. 상고대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승화해 차가워진 물체에 붙어 있는 상태를 이르는데, 나뭇가지에 서리가 낀 것이 대부분이라 나무서리라고도 한다.

“해 올라오면 상고대가 녹을지 모르니 얼른 올라갑시다.” 이 대표가 서두른다.

“저기 꼭대기까지 올라간다고요?” 남궁연씨의 눈이 별안간 커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산에 왔으면 능선까진 올라야지. 여긴 아직 백두대간이 아니야. 조금만 가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세상엔 믿어선 안 될 몇 가지 말이 있다. 그중 하나가 산에서 듣는 다음의 구절이다. “조금만 가면 된다”. 모든 산에는 소위 ‘깔딱고개’가 있다. 속리산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바윗돌을 얼기설기 세워놓은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남궁연씨 입에서 연방 신음이 새어 나왔다. 철제 계단을 기어오르자 시원한 능선이 눈앞에 펼쳐졌다. 넓적 바위에 앉으니 사방이 내려다보였다. 상고대 핀 능선 아래 수목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이 대표가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앉아 있는 바위가 경업대입니다. 속리산에서 7년 수행을 한 임경업 장군이 이 바위 위에 자주 올랐답니다. 저 뒤편에 막대처럼 서 있는 바위는 입석대입니다. 임경업 장군이 누워있던 돌을 저렇게 세웠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너른 바위 위에서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 미처 뽑아내지 못한 쇠말뚝이었다. 일제는 백두대간 능선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 산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 남짓. 마침내 백두대간 능선 위에 섰다.

비우는 삶

능선 위의 바람은 모질었다. 신선대 휴게소에 걸린 온도계는 영하 4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땀이 식자 남궁연씨가 추위를 호소했다. 준비해 간 팩 소주를 건넸다. 전날 술을 한 잔도 못한다고 했던 남궁연씨가 주저 없이 소주를 받아 마셨다.

능선을 따라 문장대까지 나아갔다. 문장대는 세조가 글을 읽었다는 전설이 얽힌 곳으로, 속리산에서 가장 유명한 봉우리다. 봉우리 위는 50명은 족히 앉아도 될 만큼 널찍했다. 백두대간 능선은 문장대 바로 앞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른쪽으로 꺾어진 백두대간은 밤치를 지나 늘티로 이어진다. 이 길은 불법코스다. 문장대 위에서 길이 끊긴 백두대간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문장대에서 산을 내려왔다. 하산은 한결 수월했다. 마침 수련회 나온 고등학생들이 남궁연씨를 알아보고 촬영을 부탁했다. 남궁연씨는 힘든 기색 한 번 안 보이고 카메라 앞에서 웃어 보였다. 남궁연씨는 “재미있네요. 우리는 내려가는데 쟤들은 올라오네요”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무언가 깨달은 듯한 말투였다. 산행이 끝날 무렵 미처 마치지 못했던 대화를 다시 시도했다.

“고졸 얘기를 나중에 해주신다고 했는데….”

“제가 김흥호 목사님을 무척 존경해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신학대 진학을 준비하던 때였어요. 그때 목사님이 『벽암록(碧巖錄)』의 구절을 인용해 말씀을 해주셨어요. ‘나무가 앙상한 몸을 드러내면 가을 바람만 가득하다(體露金風).’ 버리고 비워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지요. 그때 저는 세상을 저주하고 살았어요. ‘싸우다’의 반대말은 ‘용서하다’가 아니었어요. 그건 ‘회개하다’였어요. 나 자신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 뒤로 음악을 더 열심히 할 수 있었고, 세상사는 힘도 얻었어요.”

“오늘 산행을 정리하는 말씀이네요. 산에 드는 일이야말로 버리는 일이니까요.”

오후 1시쯤 산행이 끝났다. 쉬엄쉬엄 다닌 산행이지만 꼬박 7시간이 걸린 셈이다.

“낙오하지 않고 산행을 마쳐 제 자신이 대견합니다. 산 좋아하는 집사람과 다음 주에 꼭 다시 오겠습니다. 이번엔 산 밑에서 잠자지 않고 아내와 함께 올라가겠습니다.”



한반도의 등줄기 백두대간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설악산·태백산·소백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산줄기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핵심은 백두산이다. 이 땅의 모든 산은 백두산에서 뻗어져 나왔다는 한민족 고유의 인식을 담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신경준이 쓴 『산경표(山經表)』가 백두대간에 관한 첫 기록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시대에도 백두대간과 같은 개념으로 한반도 산세를 생각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산을 낱개의 봉우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흐름을 타고 이어지는 맥세(脈勢)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풍수사상하고도 관련이 깊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는 개념도 여기서 생겨났다.

태백산맥·소맥산맥 따위의 산맥 체계는 일제가 한반도의 지하자원을 채굴하기 위한 방편으로 개발한 개념이다. 따라서 산의 형세보다 산속의 땅을 중요하게 여긴다. 지도에선 산맥으로 이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산세가 끊어진 곳이 있는 이유다. 지리학적으로 말해 백두대간은 지형적 개념이고, 산맥 체계는 지질학적 개념이다.

한반도 지형에서 백두대간은 중추와 같다. 동서를 구분하며 북으로부터 남으로 뻗어져 내려온다. 이 등뼈에서 1개의 정간(正幹)과 13개의 정맥(正脈)이 가지를 친다. 이로써 한반도의 산 대부분은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된다. 두만강·압록강·한강·낙동강 등 한반도 10대 강도 백두대간을 그 발원으로 삼는다. 백두대간은 이 땅의 물길을 내어주는 젖줄이자 영토를 구획하는 울타리다.

백두대간 종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90년대 초반이다. 일부 산악인이 산행 코스를 개척했고, 90년대 문화운동의 차원에서 대학생들의 백두대간 종주가 유행을 탔다. 이후로 너도나도 백두대간에 오르다 보니 무분별한 생태계 훼손이 자행됐다. 정부는 2002년 백두대간 보호구역 설치에 관한 검토를 시작해 2005년 보호구역을 확정 발표했다. 보호구역에 관한 상세 정보는 산림청 홈페이지(www.forest.go.kr)에서 얻을 수 있다.



이달의 산행 TIP 착 붙는 등산화 챙기세요

누구나 봄을 기다려왔겠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봄은 무엇보다 반가운 손님이다. 하지만 신난다고 무작정 봄 산행에 나서면 낭패보기 십상이다. 겨우내 얼어붙은 눈이 녹는 시기인 해빙기(解氷期) 산행에선 몇 가지 안전수칙을 꼭 지켜야 한다.

기본으로 챙겨야 할 건 등산화다. 4월은 겨우내 얼어 있던 산행로가 녹는 계절이다. 등산로 표면이 매우 미끄럽다. 이럴 땐 아웃솔에 요철이 부착돼 접지력 강화에 특화된 등산화를 착용하는 것이 좋다. 수시로 비가 내리는 계절 특성상 항상 우의(雨衣)를 배낭에 넣어 가는 것도 요령이다.

4월 해는 아직 짧다. 일몰 시간이 오후 6시 전후로 이른 편이다. 산행이 조금 늦춰지다 보면 금세 해가 떨어진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랜턴을 항상 휴대해야 한다. 잘못하면 길을 잃을 수 있다. 산행에 편리한 헤드랜턴을 고를 때는 조도가 밝은 1W(와트) 이상의 LED 제품인지와 우천시에도 사용 가능한 방수 제품인지 확인한 뒤 선택하는 게 좋다.

산속 날씨는 아직도 쌀쌀하다. 겨울 복장도 준비해 놓아야 한다. 바람막이 점퍼를 비롯해 장갑 등 방한용품을 챙겨가야 하는 이유다.



남궁연은=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드러머이자 프로듀서로, 패닉·신해철·싸이·이은미 등의 앨범에 참여했고 여러 편의 영화음악과 드라마음악을 제작했다.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와 실용음악과에서 강의를 한다. 2007년 서울 디지털포럼 디렉터로 참여했고, 현재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러니까 남궁연은 대중음악가라기보다 대중문화 운동가인 셈이다. 남궁연이 들려준 헤어스타일의 내력은 뜻밖이었다. 남궁연은 어머니가 돌아가자 머리를 깎았다. 어머니에 대한 속죄의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