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검은 돈'으로 출두하고 체포되고 구속되는 인사들이 너무 많아, 개인적으로 인연 있는 이들도 섞여있었다. 그래서 감흥(感興)이 다르다. 그와의 '편한' 시절을 떠올리면, 왜 저 사람이 카메라 세례를 받는 '뉴스 메이커'가 됐는지 실로 궁금해지는 것이다.
어떤 이는 대학생 때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장장 7년 넘게 수감생활을 했다. "지방대 출신이라 다른 동지들보다 몇 년 더 살았다"며 그 '훈장'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인물이다. 출감 후 재야운동을 하다가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출마해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그의 '민주화' 순정에 반한 후배들은 적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도는 그를 대신해 부인이 횟집을 열어 겨우 먹고 살았다.
뜻은 아름다웠으나, 현실에서 영락없는 '백수 건달'이었던 그가 지난 정권 출범과 함께 활짝 피어난 것이다. 그는 "사람 사는 세상 한번 만들어보자"고 들떠있었다. 선술집이 아니라 룸살롱에서 그를 봤다. 그 뒤로 그는 순결한 이상(理想)을 얼마나 이뤘을까.
정권이 끝나니 그는 감옥에 들어갔다. 젊은 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잡혀간 그가 지금은 '검은 돈을 먹은 정치인'으로 찍혔다. 그렇게 투쟁하고 정치판 바닥을 헤맨 오랜 세월을 겨우 짧은 영화(榮華)와 바꿔버린 것일까.
또 지금 감방 안에 있을 어떤 이는 '가정적인' 공무원 출신이었다. 소주 몇 잔에 금방 불콰해진 얼굴로 "밥값 내기로 고스톱을 딱 30분만 칩시다"며 바람잡기도 했다. 그 시절엔 그랬다. 공무원 봉급이라 액수는 만원권 지폐 서너 장으로 쩨쩨하게 다퉜던 걸로 기억한다. 작은 일상에 희희낙락할 줄 알았지 정치적 욕망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무슨 바람이 지나갔을까. 그는 선거에 출마했고, 얼마 전 수억 원의 검은 돈을 받은 혐의로 체포됐다. 만약 정치 바람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또 다른 어떤 이는 부호(富豪)집안 정치인이다. 돈으로만 말하면 전혀 아쉬울 게 없다. 최고 권력 자리도 돈으로 살 수 있으면 가산을 털어 장만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단돈' 천만원을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로 밤새 검찰 조사를 받는 망신을 당했다. 99를 갖고 있어도 늘 1이 부족한 것일까.
봄날에 소환되고, 출두하고, 조사받고, 구속되는 인물들의 사연(事緣)은 저마다 구구절절 한편의 연극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결론이 너무 통속적이다. 나이와 지위의 고하(高下)를 떠나, 하나같이 마이크를 들이대면 봇물 터지듯 "난 억울하다"를 쏟아낸다.
어떤 이는 "지난 정권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먼지 털리듯 털렸다"고 당당하게 억울해하고, 어떤 이는 "그때 처음 만나 밥만 먹었을 뿐"이라고 밥 먹은 것을 억울해하고, 또 어떤 이는 수표 액수까지 들이대도 "받은 적이 없다"며 믿어달라고 억울해한다. 물론 우리 누구도 검찰이 늘 공정했다고만 보지 않는다.
하지만 설령 '정치 보복'이고, 대가성이 없었고, 남들이 다 받는 돈을 안 받으면 혼자 바보가 될까봐 받았고, '상대적으로 적게 먹은' 자기가 재수없이 걸렸다 하더라도, 그렇게 앙앙불락 "억울하다"고만 외칠 수 있을까. 법의 처벌 앞에 섰다 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대가 없는' 푼돈도 받을 능력이 못 돼,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아가는 서민들도 좀 '위안'을 받고 싶은 것이다. 가끔은 이들 중 누군가가 "나 자신이 정말 부끄럽다"며 고개를 떨구는 장면을 기대했지만 아직 이뤄진 적이 없다.
"형벌과 제도로만 백성을 다스리는 걸로는 부족하다. 잠시 고치는 시늉만 할 뿐 진정 바뀌지 않는다"고 낡은 논어(論語)에 나온다. 백성들이 그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돌아보고 부끄러워할 줄 알게 만들어야 진정 그 사회가 성숙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윗자리에는 덕 있는 사람이 앉아 물이 흘러내려가듯 아랫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그건 옛날식 풍경이고, 지금 꽃 피는 봄날은 다르다. 검찰과 인연을 맺고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윗자리'에 앉아 많은 혜택을 누리며 우리 사회를 이끌어왔다. 그런 이들이 자신을 돌아보기는커녕 "난 억울하다"며 앞장서 염치없이 떠들어댄다. 마치 어느 누가 "부끄럽다"고 대신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위에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밑에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국민들은 세금을 내면서도 "과연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우기 어렵게 됐다. 온통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남들은 없고 나만 사는 세상에 내 무엇인들 뻔뻔스럽게 못할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