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덕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HANARO)에서 연구원들이 중성자를 이 용해 신소재나 부품의 원자 단위 결함을 찾아내는 연구를 하고 있다. 가운데 높이 13m의 원통형 기기가 원자로이며 이곳에서 생성된 중성자가 지상에 있는 연구장비들로 나온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4>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핵분열에서 나오는 중성자 이용 항암제·고전력용 반도체 등 생산
설계에서 건설까지 우리 기술 첫 국산 원전 수출 프로젝트 추진
대덕 한국원자력연구원 내 하나로 연구동. 이중(二重)의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건물 3층 높이의 거대한 원자로가 모습을 나타낸다. 원자로 아래엔 사방으로 연결된 실험장치마다 실험복을 입은 사람들이 연구에 한창이다. 첨단 산업의 '연금술 공장'으로 불리는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HANARO)'다. 이 원자로에선 전기 대신 항암제와 첨단 반도체 칩 원료가 쏟아져 나온다. 올해 국내 첫 원전 수출의 꿈도 이곳에서 익어가고 있다.
◆항암제와 반도체 만드는 만능입자 중성자
"물속에 기다란 봉이 보이죠. 원전 연료인 우라늄 봉입니다. 여기서 첨단 산업 재료를 만들 입자가 나옵니다."
원자로 안은 유해한 방사선을 완전 차단하는 증류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임인철 하나로운영부장이 말한 입자란 '중성자(中性子)'. 우라늄 핵이 쪼개지면 전기를 띠지 않은 입자인 중성자가 튀어나온다. 중성자는 다시 우라늄을 쪼개 핵분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한다. 원자력 발전소에선 이때 나오는 에너지로 물을 끓이고 터빈을 돌려 전력을 생산한다. 하지만 열출력 30㎿인 하나로에선 전기가 나오지 않는다. 중성자가 핵분열 대신 다른 곳에 이용되기 때문이다.
- ▲ 연구원들이 방사선 차폐시설에 있는 방사 성 동위원소를 납 유리창을 통해 보면서 로 봇 팔로 조작하고 있다. 하나로 원자로에 선 의료용₩비파괴검사용 방사성 동위원소 들이 만들어진다. 이준헌 객원기자
하나로에선 일본 업체의 주문을 받아 하이브리드 자동차나 고속열차에 쓰이는 고(高)전력용 반도체도 생산하고 있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 실리콘에 중성자를 반응시키면 반도체로 변하는데, 일반 반도체 제조공정보다 훨씬 균일한 구조를 만들 수 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처럼 강한 전류가 흐르는 곳에는 구조가 균일한 반도체가 아니면 감당하기 어렵다.
중성자는 전기를 띠지 않기 때문에 다른 입자와 반응하지 않고 물질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 덕분에 원자 하나하나의 모습과 움직임을 보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 하나로는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던 F16 전투기 부품의 미세한 결함을 밝혀냈다. 포스코·현대자동차·LG화학·두산중공업 등 국내 대기업들도 이곳에서 신소재와 첨단부품을 분석해 제품 개발을 앞당겼다. 임인철 박사는 "포스코에서 지금껏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던 작은 금속 봉의 결함을 찾아내는 연구를 진행 중"이라며 "그 원인을 규명하면 제철소의 전력사용을 10% 줄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중성자 분석의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고고학 유물의 원산지 규명도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토기에 중성자를 쏘면 같은 종류의 흙이라도 지역에 따라 반응이 달라져 원산지를 확인할 수 있다.
◆5000억원대 국내 첫 원전 수출 꿈
1995년 첫 가동에 들어간 하나로에는 지금까지 방사성의약품 제조시설, 중성자빔 연구시설 등을 포함해 2000억원 가까이 투자됐다. 최근 원자력연구원은 지금까지의 투자를 한 번에 상쇄할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바로 국산 원전 수출이다.
우리나라는 2007년 말 현재 발전량 기준으로 세계 5위 원자력 대국이지만 아직까지 한 기의 원전도 수출하지 못했다. 원천기술을 보유한 미국 기업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해외로 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는 설계부터 건설까지 모두 우리 기술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런 제약이 없다.
원자력연구원은 대우건설·두산중공업·한국전력기술과 함께 유럽 방사성물질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신형 연구용 원자로 수주전에 뛰어들었다. 하재주 하나로이용연구본부장은 "최소 5000억원 이상의 프로젝트를 두고 프랑스, 아르헨티나와 3파전을 벌이고 있다"며 "수출 경험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지만 두뇌가 필요한 원자로 설계 기술에선 독보적인 수준이어서 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원자로는 아니지만 각종 부품이나 설계, 운영과 관련된 기술들을 인도·베트남·태국 등 개발도상국에 수출한 경험도 큰 자산이다.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방사성물질과 반도체 생산 전용 원자로 건설도 추진 중이다. 네덜란드에 제안한 설계를 전용로 건설에 이용할 수 있어 건설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을 전망이다. 하 본부장은 "전용로가 건설되면 해외 연구용 원자로 시장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용로는 특히 하이브리드 자동차용 반도체 생산을 크게 늘려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 분야 시장은 연간 11%씩 늘고 있지만 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연구용 원자로
우라늄 핵분열에서 나오는 중성자를 이용해 의료·비파괴검사용 방사성동위원소를 생산하거나 물질 내부를 원자 단위까지 분석하는 시설.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중성자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와 달리 전기를 생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