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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에서부터 시작해 길게 활 모양을 이루며 지중해 연안까지 뻗어 있는 알프스 산맥의 허리 부분에 위치한 발래(Valais) 알프스는 스위스의 론(Rhone) 계곡과 이탈리아의 아오스타(Aosta) 계곡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알프스에서 가장 많은 4,000m급 봉우리들을 거느린 산군이다. 주요 4,000m급 봉우리들 중 28개나 속해 있다.
이 산군의 많은 영역이 스위스 땅에 속해 있지만 여러 봉우리들이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선을 이루고 있으며, 몇몇 주요 능선과 계곡들은 산군 남쪽인 이탈리아 영토로 뻗어내려 있다. 이 산군 동쪽 저 멀리 알프스 제2위 고봉 몬테로자(Monte Rosa·4,634m)에서 시작한 4,000m대 능선이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을 이루며 서쪽으로 이어져 브라이트호른까지 뻗어있다. 동서로 뻗은 그 긴 능선의 중간 즈음에 카스토르(Castor·4,226m)가 솟아 있다.
카스토르는 동쪽으로 리스캄(Liskamm·4,527m)과 칼날 설릉으로 연결되어 있고, 서쪽에는 폴룩스(Pollux·4,092m)가 위치해 있다. 알프스 주요 봉우리들 중 17번째 높은 봉우리로, 체르마트 계곡의 고르너그라트(Gornergrat)나 리펠호른(Riffelhorn) 전망대에서 보면 특히 빼어나 보인다.
- ▲ 카스토르 정상부인 북서릉을 통해 정상으로 향하는 산악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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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천상의 쌍둥이 중 하나의 이름을 딴 이 봉우리는 클라인 마터호른(Klein Matterhorn·3,884m) 케이블카역이나 이탈리아 측 산장에서 접근하기 쉽고, 상대적으로 낮은 등급의 다양한 등반 루트와 정상 조망이 빼어나 많은 알피니스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카스토르는 따로 떨어져 솟아 있는 바로 옆 봉우리 폴룩스와는 달리 브라이트호른(Breithorn·4,164m)에서부터 시작해 리스캄을 거쳐 몬테로자까지 이어지는 대횡단 등반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브라이트호른 고개 막영지에서 출발
지난 며칠간 브라이트호른의 4,000m급 4개 봉우리와 로치아네라(Roccia Nera·4,075m)를 오른 우리는 브라이트호른 고개(Breithornpass·3,824m)의 설원에서 하루를 쉬기로 했다. 고소 적응 없이 곧바로 4,000m급 봉우리들을 등반하며 브라이트호른 고개의 눈밭에서 이틀 밤을 묵은 남동건 선배는 컨디션 회복과 개인적인 볼일을 위해 쉬는 날을 이용해 체르마트로 내려갔다. 캠프에 남은 우리 셋(임덕용 선배, 후배 나현숙, 그리고 필자)은 설원 위 캠프에서 느긋하게 망중한을 즐겼다. 전날 눈이 내리긴 했지만 많이 내리진 않았다. 조금 내린 눈마저 서쪽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날려 고개 위 설원에는 거의 쌓이지 않았다.
날씨는 차츰 좋아지고 있었다. 뭉게구름이 여전히 4,000m급 봉우리들을 감싸고 있었지만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이 텐트에 닿으니 온기가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점심 후 임 선배와 후배는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며 옷을 고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한 30여m 떨어진, 전날 어느 한 팀이 이용하고서 철수한 캠프지에 쌓인 눈 블록을 피켈로 힘들게 떼어와 우리 텐트 주변에 쌓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려다 짐짓 모른 체하며 카메라를 들고 설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바람에 가루눈이 휘날리며 나를 휘감아 돌아 지나간다.
- ▲ 1 정상에 이르는 북서릉은 두 팀이 지나치기에는 너무 좁아 조심해야 한다. / 2 정상에서 북서릉을 통해 하산하고 있는 산악인들의 모습이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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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소리가 들린다. 그 어떤 자연과학자라도 여기서 저 소리를 듣는다면 기압차에 의해 생겨난 기류의 변화가 빙하 위로 스쳐가는 파열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진 않으리라. 그도 이곳에서는 시간이, 세월이 멈춘 듯하다고 느낄 것이다. 바람이 멈춘 순간의 정적 또한 좋다. 태고의 적막감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구름이 많아 그런지 클라인 마터호른 전망대를 오가는 산악인들은 많지 않았다. 설원을 돌아다니다 캠프로 돌아오니 두 사람은 텐트 둘레의 바람막이 작업을 이제 막 마무리하고 있었다. 앞으로 며칠 더 묵을 캠프라 두 사람의 노고에 미안함마저 든다.
모든 일에 열성을 다하는 임 선배다. 곧 해가 기울어 모두 텐트로 들어가 편하게 자리를 잡는다. 저녁을 먹고 어둠이 내리자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더욱 거셌다. 눈 블록으로 단단히 막았건만 텐트 플라이가 펄럭거려 잠을 설칠 정도였다. 매사에 게으르고 느긋한 필자로선 무신경하게 모른 체하고 누워 있건만 부지런함이 몸에 밴 임 선배는 옷을 단단히 고쳐 입고 밖으로 나가더니 눈삽을 들고 한참을 씨름한다. 그러길 아마 두세 번은 했을 것이다. 그렇게나 심한 바람 탓이었던지 새벽에 일어나 텐트 밖 하늘을 보니 그 많던 구름들은 모두 흩어지고 밤하늘에 별들만 촘촘히 박혀 있었다. 모두 일어나 눈을 녹여 아침을 지어 먹는다. 남동건 선배를 뺀 셋이서만 카스토르에 다녀오기 위해서다.
햇볕 늦게 드는 서북서 측면 설벽
장비를 챙겨 캠프를 떠날 때는 아침 6시가 조금 되기 전이었다.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바람이 찼다. 광활한 브라이트호른 설원의 동쪽 끄트머리인 브라이트호른 고개의 눈밭을 출발한 우리는 동쪽으로 난 설원으로 내리막을 내려간다. 설사면이 경사가 져 있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오가며 난 길이라 걷기 편하다.
- ▲ 1 이탈리아의 퀸티노셀라 산장에서 출발해 남동릉으로 정상에 오르는 산악인들. / 2 북서릉 아래의 설벽 구간을 조심해서 하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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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갈림길이 나왔다. 동쪽으로 아래 위 두 길이 나있는데, 위쪽 길은 이틀 전에 우리가 브라이트호른 트윈과 로치아네라를 등반하고서 들른 로치에볼랑 비박산장(Rossi e Volante Bivouac Hut·3,750m)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아래쪽 길은 일반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로서 베라(Verra) 빙하 상단을 가로지르며 또 다른 4,000m 봉인 폴룩스와 우리가 오를 카스토르 쪽으로 이어져 있다. 이제 우리는 이틀 전과는 달리 아래쪽 길을 따랐다.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았지만 하루를 쉬어 완경사의 빙하 위를 가로지르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여 브라이트호른 고개의 캠프에서 카스토르까지 그렇게 멀게만 보이던 거리를 1시간 만에 횡단했다. 폴룩스의 남측 사면 아래를 지나자 베라 빙하 하단부에 위치한 이탈리아의 발다야(Val d'Ayas) 산장에서 출발한 산악인들이 두셋씩 안자일렌을 하고 올라오고 있었다. 몇몇은 우리와 같은 방향이고, 나머지는 브라이트호른 쪽으로 향했다. 폴룩스와 카스토르 사이의 안부 설원을 지나자 카스토르의 서북서 측면 아래에 닿았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배낭을 벗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다. 그러면서 자일을 배낭에서 꺼내어 안자일렌을 하며 다시 복장을 고쳐 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