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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래(Valais) 알프스는 스위스의 론(Rhone) 계곡과 이탈리아의 아오스타(Aosta) 계곡 사이에 위치한, 알프스에서 가장 많은 4,000m급 봉우리들을 거느린 산군이다.
이 산군 대부분의 영역이 스위스 땅에 속해 있지만 많은 봉우리들이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선을 이루고 있으며, 몇몇 주요 능선과 계곡들은 산군의 남쪽인 이탈리아 영토로 뻗어내려 있다. 주요 4,000m급 봉우리들 중 28개가 이 산군에 속해 있다. 알프스 주요 봉들 중 27번째 높이의 브라이트호른(Breithorn·4,164m) 또한 이 발래 산군의 국경선에 위치해 있다.
- ▲ 체르마트쪽에서 본 브라이트호른. 가장 오른편 눈 덮인 봉우리가 주봉이며 중앙봉은 그 왼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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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트호른 즉, ‘브로드피크(Broad Peak)'란 뜻의 이 봉우리는 말 그대로 4,000m대 능선의 길이가 2.5km나 된다. 하여 이 긴 능선에는 국제산악연맹이 인정한 4,000m급 봉우리가 5개나 솟아 있다. 동서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두고 북쪽은 가파른 암벽과 빙설벽이 펼쳐져 있으며, 남쪽은 상대적으로 완만한 설사면과 빙하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4,164m의 주봉은 능선의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 중앙봉(Central Summit·4,159m)과 웨스트 트윈(West Twin·4,139m), 이스트 트윈(East Twin·4,106m), 그리고 로치아네라(Roccia Nera·4,075m)가 차례로 있다. 특히 체르마트(Zermatt)에서 클라인 마터호른(Klein Matterhorn·3,884m) 전망대행 케이블카를 이용해 남남서면으로 손쉽게 오를 수 있는 봉우리들이라 알파인 등반의 초심자들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4,000m급이다.
- ▲ 브라이트호른 고개에 도착한 일행이 텐트를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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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우리는 브라이트호른 주봉과 중앙봉을 오르기로 했다. 알프스 4,000m급 82개봉 중에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로 오르는 봉우리다. 이번 산행에는 지난번 베르너 알프스 등반에 함께 한 임덕용 선배와 후배 나현숙 외에 파리에 거주하는 남동건 선배도 동참했다. 알프스를 동경해 20대에 유럽에 건너온 남 선배는 젊었을 적의 못 다한 꿈을 위해 휴가시즌이면 종종 알프스를 찾는다. 마침 시간이 맞아 이번 등반에 동행했는데, 유럽 거주 한국 산악인이 거의 다 모인 셈이다. 하여 샤모니 계곡을 벗어나 스위스로 넘어가는 승용차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나누는 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체르마트~푸리~트로케너~클라인 마터호른까지 케이블카로
- ▲ 커니스가 심하게 진 브라이트호른 중앙봉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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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산악도시 마르티니로 내려온 승용차는 곧장 론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계곡 바닥은 샤모니에 비해 고도가 낮아 덥지만 곧 있을 브라이트호른 등반을 생각하면 얼마든 참을만하다. 2시간 후 우리가 탄 차는 체르마트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차츰 눈 덮인 봉우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이 처음인 후배는 표정만 봐도 들떠 있다. 물론 종종 이곳을 찾는 세 선배들도 마찬가지인 것은 사실이다. 모두 알프스에 반해 유럽에 넘어와 살고 있지 않은가.
샤모니를 출발한 지 3시간만에 우리는 태시(Tasch)에 도착했다. 새롭게 건설한 대형 주차장에 주차한 우리는 등반 짐을 꾸려 체르마트로 오르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10여 분만에 도착한 체르마트에는 여전히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공해방지를 위해 운행하는 전기차량은 관광 인파로 가득 찬 골목길을 잘도 오간다. 마을 중앙을 지나 한참 계곡을 따라 올라 20분만에 클라인 마터호른행 케이블카역에 닿는다.
- ▲ 중앙봉에서 주봉으로 가고 있는 일행. 저 멀리 마터호른이 구름에 휩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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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승 고속 곤돌라인 마터호른 익스프레스를 탄 우리는 중간역인 푸리(Furi)로 향한다. 창밖에는 알프스의 전형적인 마을풍경이 펼쳐져 있다. 풀밭 위에 오순도순 위치해 있는 통나무집들 위로 저 멀리 마터호른이 보인다. 하지만 짙은 구름에 가려 하단부만 살짝 드러나 있다. 곧이어 푸리에 도착한 우리는 트로케너 슈테크(Trockener Steg·2,939m)행 케이블카에 오른다. 점심때가 지나 그런지 우리 외에 함께 탄 관광객은 몇 되지 않는다. 고도가 3,000m 가까이 되는 케이블카역 주변에는 황량한 돌무더기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클라인 마터호른 전망대에 오른다.
- ▲ 브라이트호른 주봉 정상에 선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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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2,000m 이상 고도를 높인 탓에 한기가 들어 모두들 배낭에 넣어온 두툼한 옷을 꺼내 입는다. 긴 전망대 복도를 빠져나오다 길을 잘못 든 탓에 얼음동굴로 들어간다. 관광객들을 위해 얼음조각들이 전시된 동굴은 공사 중이었다. 이윽고 전망대를 빠져나온 우리는 서쪽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맞서 남쪽으로 이어진 스키 슬로프를 따라 걷는다.
약 400m 평탄한 눈밭을 걸은 후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우리는 드넓은 브라이트호른 설원(Breithorn Plateau)을 횡단한다. 한동안 동쪽으로 이어지다 동북쪽으로 약 30분 걸으니 브라이트호른 주봉의 남쪽 사면 아래의 브라이트호른 고개(Breithorn Pass·3,824m)에 닿는다. 편편한 설사면이 꽤나 넓다. 여기서 우선 텐트를 친다. 몇 십m 옆에는 이미 텐트 하나가 쳐져 있다. 등반하러 갔는지 텐트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