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3명이 거쳐간 서울 가회동 집…
정도전 집터에선 구설 끊이지 않고…
특급호텔에 돌탑이 세워진 까닭은…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47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윤달이 들어있는 2009년 기축(己丑)년, 관가(官街) 인사철이 겹치면서 풍수론(風水論)이 고개를 들고 있다. “누구누구가 선친의 묘를 이장한다고 좋은 자리를 찾고 있더라”거나 “누구누구는 조상 묏자리를 잘 썼다더라”는 식의 이야기가 솔솔 새나오고 있는 것이다. 풍수가 사람을 미혹시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조선 왕궁의 자리를 놓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거나, 풍수의 대가인 신라의 도선국사가 ‘비기’를 남기며 나라의 앞날을 예견했다는 이야기는 익숙해진 지 오래다. 역대 대선주자의 선조들 무덤을 실사해 ‘권력과 풍수’란 책을 쓴 우석대 김두규 교수(풍수학)는 “직접 확인해 보니 김대중, 이회창, 김종필, 이인제, 한화갑, 고건 등 대권에 뜻을 뒀던 사람은 예외 없이 선친 또는 조상의 묘를 좋다는 터로 옮겼더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선거철이 되면 주자들의 마음이 약해지는지 뭐라도 하나 잡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는 것 같다”며 “무덤만 잘 쓰면 후손이 잘된다는 이론은 술사(術士)들이 하는 얘기”라고 말했다. “논리적으로 미신 아니냐”며 멀리하면서도 이야기가 나오면 은근히 귀를 기울이게 되는 풍수. 사람까지 복제가 가능하다는 과학의 21세기에도 풍수는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풍수의 흔적을 추적했다.
명품 골프장 안 위령비의 비밀
공사 중 잇단 사고… “백두대간 맥 끊어 신령이 노했다”
“명당터이니 땅 위로해야” 풍수가 말에 비석 세우자 순조
- ▲ '위지령비'가 세워진 춘천의 J골프장. 공사 중 사람이 다치자 산이 훼손돼 그렇다며 인부들이 동요했다. '위지령비'는 이같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세워졌다.
이 골프장은 ‘한북정맥(漢北正脈)’ 줄기에 자리잡고 있다. 한북정맥이란 강원도와 함경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추가령(楸哥嶺)~한강 강구(江口)에 이르는 산줄기를 가리키는 말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뻗쳐 이뤄진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다. 삼악산, 칼봉산, 불기산, 봉화산 등 600~900m급 산으로 둘러싸인 골프장 인근은 ‘고려 왕건에 패한 궁예가 은신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산세가 험준하고 수려한 곳이다. 공사가 시작된 때는 1997년. 준공은 2004년 9월로, 공사기간은 7년에 달했다. 적잖은 공기가 말해주듯 공사 과정은 험난했다. 인근 지형이 5억~25억년 전 퇴적된 규암(硅岩)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었다. 규암은 흔히 ‘차돌’이라 불리는 암석으로 옛 사람들은 “단단하기가 쇠와 같다”며 부싯돌로 사용해 왔다.
그러니 공사가 수월할 리 없었다. 이 골프장 코스 곳곳에 천연암석과 폭포, 절벽 등이 조성된 데엔 이 같은 자연환경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땅을) 파고 또 파도 계속해서 돌이 나왔답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단단해서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해요. 게다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지맥을 끊는다’는 비판이 거셌어요.” 공사 과정을 안다는 한 주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다른 관계자는 “공사 중 다친 사람이 생겨서 인부들이 불안해 했던 것으로 안다”며 “당시 공사 때문에 산이 훼손돼 신령이 노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말했다. 골프장 측은 이 같은 여론을 간과하지 않았다.
풍수지리가인 최창조(59) 전 서울대 교수를 찾아가 자문을 구한 것. 골프장 측은 이렇게 말했다. “2001년 최 선생을 모셔와 현장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일대가 금구입수형(金龜入水形) 명당이라는 겁니다. ‘자라(또는 거북이)가 물로 들어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만큼 훌륭한 터란 얘기죠.” 풍수지리가들은 자라(거북이)가 쇠(金)의 기운을 갖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자라(金)가 물(水)에 들어가는 형상’은 금생수(金生水), 즉 쇠(金)와 물(水)이 서로 돕는 ‘상생’의 형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골프장 측은 “그런데 최 전 교수가 ‘그런 좋은 터에 그냥 토목공사를 하면 자연 속에 있는 나무, 풀, 벌레 등이 노할 수 있으니 사정을 밝히고 자연을 위로하는 글을 하나 남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며 “그래서 그곳에 ‘위지령비’를 세우게 됐다”고 답했다. 비석 때문인지 몰라도 이후엔 사고가 나지 않았고 공사는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골프장 측은 “개장 이후 지속적으로 영업이 잘되고 있다”며 “최근의 경제한파로 다른 골프장들은 회원권 가격이 줄줄이 반토막 났지만 (이 골프장은) 오히려 값이 올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월 1일 국세청이 고시한 골프회원권 기준시가에 따르면 이 골프장 회원권 가격은 5억8900만원에서 7억6000만원으로 최근 6개월 사이 29%나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구입수형 명당’이란 곳에 위지령비를 세운 것이 과연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박흥식·정주영·정태수의 가회동 집
화신 창업주 박흥식, 명당 수소문 끝 매입… 몰락 후 경매
정주영 회장, 55억에 구입… 정태수는 전세로 입주
- ▲ 박흥식.정주영.정태수씨 등 재계 거인들이 거쳐간 가회동.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박흥식, 정주영, 정태수.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재계 대표선수’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겐 또 다른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서울 가회동 177-쫛번지’란 지번이다. 현대그룹 계동 사옥 뒤편, 1525㎡(461평)의 땅에 연건축면적 451㎡(137평) 규모의 2층 저택이 한 채 있다. 화신백화점 창업주이자 재계의 거물이었던 박흥식씨가 살았던 곳이다. 박씨는 서울에서 명당이라 소문난 곳을 두루 물색하다가 이곳을 찾아 거금을 주고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신산업’의 부도로 1973년 박씨가 몰락하고 15년 뒤인 1988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 집은 그 해 5월 경매를 통해 무역업을 하는 박모씨에게 넘어갔다.
무역업자 박씨는 2000년 2월 16일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에게 이 집을 넘겼다. 당시 ‘좋은 집터’를 구하고 있던 정 명예회장은 그때 돈으로 55억원을 지불하고 이 집을 샀다고 한다. 당시 정 명예회장에게 이 집을 권한 사람은 풍수지리가 유모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이 집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아들인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마찰을 빚으면서 일주일 만에 ‘가회동 177-쫛번지’를 포기, 원래 살던 청운동으로 돌아간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2001년 3월 21일 타계했다. 이 집의 명의는 부인 변중석 여사에게로 넘어갔다가 2001년 9월 부동산업을 하는 정모씨에게 다시 넘어가 현재까지 그의 소유로 돼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한보그룹 회장을 지낸 정태수(86)씨가 2003년부터 약 2년가량 이 집에 전세를 살았다는 점이다. 당시 전세금은 10억원이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정태수씨는 사업상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풍수지리나 사주팔자 등 초자연적 요소를 참고해 온 인물로 알려져 호기심은 더욱 커진다. 그는 당시 사업적 재기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박흥식~정주영으로 이어지는 재계 거목들의 거처를 ‘전세로라도’ 고집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실제로 정씨는 자신의 사업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이른바 ‘한보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1980~1990년대 초까지도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의 허름한 사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곳이 자신에게 재물운을 갖다 줬다고 믿었기 때문”이란 것이 주변의 시각이었다. 정씨는 강남 개발 붐이 일었던 1978년 자신이 지은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히트를 치면서 사업 기반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재기를 위해 이 집에 전세를 들어갔다”는 주변의 관측대로 정태수씨는 이 집에 입주한 지 1년 만인 2004년 5월 채권단에 한보철강 입찰 자격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재기의 포부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정씨는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 받은 뒤 해외에 체류하고 있다. ‘화신’의 부도, ‘현대’의 난, ‘한보’의 몰락을 차례로 지켜본 서울 가회동 177-쫛번지. 이 땅은 우리 재계의 거인들에게 재복(財福)을 갖다 준 길지(吉地)였을까 아닐까.
정도전의 집터
“천자만손할 길지” 궁궐 가까운 종로구청 앞에 터 잡아
국세청도 이 자리… 풍수 고려해 청장실 옮겼다가 구설
- ▲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집터에 자리한 국세청. 하지만 이곳에선 최근 20년간 10명의 청장 중 6명이 구속되거나 심각한 구설에 오르는 불미스런 일이 이어졌다.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지금의 서울 종로구청 앞 수송동~청진동~미국대사관 일대는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의 개인 집터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은 고려 말 형부상서를 지낸 권문세족이었지만 어머니 영천 우씨의 외할머니는 종이었다. 신분제의 모순을 갖고 태어난 그는 ‘세상은 뒤집어져야 한다’는 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었다. 그가 즐겨 읽었던 책은 “임금이 잘못하면 신하가 벌을 줄 수 있다”는 대목이 있는 ‘맹자’였다. 관료가 된 정도전은 1383년 함경도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도 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을 권한다. 정도전은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의 자리는 물론 조선의 종묘 사직과 경복궁 등 궁궐의 위치도 그가 정했으며 전각의 이름도 상당수 직접 지었다.
그는 궁궐 가까운 종로에 자신의 집터를 정하면서 “천자만손(千子萬孫)할 길지”라며 누대(累代)에 걸친 영화를 장담했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노비 해방을 역설하며 각종 개혁정치를 주도하던 그는 1398년 음력 8월 26일 밤 이방원의 습격을 받아 참수되면서 한(恨) 많은 생을 마쳤다. 정도전 집터의 중앙 어귀, 지금의 수송동 104번지에 자리한 관공서가 국세청이다. 이곳은 최근 20년간 10명의 국세청장 중 무려 6명이 구속되거나 구설에 오르는 불명예를 얻었다. ‘터’가 영향을 미쳤을까.
국세청과 관련된 풍수지리설은 그래서 눈길을 끈다. 원래 국세청장 집무실은 본청 14층에 있었다. 그런데 2008년 5월, 한상률 당시 청장이 12층으로 집무실을 옮기면서 구설이 불거졌다. 공사 이유는 “집무실 화장실에 물이 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론은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건물은 2003년 1월 준공됐다. 따라서 △당시 기준으로 지은 지 5년밖에 안 된 새 건물이란 점 △7억1000만원이 들었다는 국세청 해명과 달리 실제 공사비는 12억원으로 책정됐다는 지적 △여기에 3억원가량의 추가 공사비가 더 편성돼 ‘호화 집무실을 꾸민 것 아니냐’는 의혹 △화장실만 고치면 되지 굳이 집무실을 옮길 필요가 있느냐는 추궁 등이 겹쳐 “국민의 혈세를 낭비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국세청은 왜 이런 무리수를 뒀을까. 의문의 시선이 모인 곳은 풍수지리였다. 서울 청담동에서 J역학원을 운영하는 풍수지리가 김모씨가 배경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거액을 받고 재.관계 인사들의 자문에 응해온 인물로 알려졌다.
국세청 안팎에선 “김씨가 국세청을 꼼꼼히 살펴본 뒤 ‘집무실 이전’을 권했고 한상률 당시 청장이 이를 받아들여 공사를 벌였다”는 말이 나왔다. 공사 이후 국세청 12층 청장 집무실의 내부 벽면 한쪽은 외부에서 들여다볼 수 있도록 투명 유리로 교체됐다. 당시 국세청은 “투명행정을 펼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후 이 벽엔 대형 블라인드가 설치됐다. 게다가 투명유리는 이 벽면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청와대가 있는 쪽을 향해 북향(北向)으로 대형 통유리창을 내고 그 앞에 집무용 책상을 놓아 의자를 뒤로 돌리면 국세청장이 정면으로 청와대를 바라볼 수 있게 내부 구조를 바꾼 것이다.
원래의 14층 집무실은 청와대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창밖을 바라보면 국세청장이 위에서 아래로 대통령을 내려다보게 돼 있었다. 풍수 논리에 따르면 이는 ‘신하가 임금을 하대(下待)하는 격’이 돼 순리에 어긋나는 역(逆)의 형상이 된다. “역대 청장이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된 것은 풍수가 역으로 흘렀기 때문”이란 말이 나온 것은 그래서였다. 국세청 안팎에선 “청와대와 눈높이가 맞는 12층으로 집무실을 이전한 뒤 수시로 청와대를 바라보며 그 기운을 받으면 국세청장으로서 장수(長壽)하리라는 풍수가의 조언이 있었다”는 말이 은밀히 퍼졌다.
소문이 확산되자 청와대는 내사에 착수했고 일부 언론은 취재에 나섰다. 당시 국세청은 사진촬영을 막기 위해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공사 8개월 만인 2009년 1월 한상률 청장은 ‘인사 청탁’ ‘그림 로비’ 등의 의혹이 불거지면서 퇴진해야 했다. 정도전의 한(恨)이 5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악영향을 끼친 것일까.
- ▲ 신라호텔 정문 어귀에 세워진 비보탑. 돌무덤 형태인 이 탑은 산신이 노했다는 흉흉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세워졌다.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남산 훼손, 산신이 노해 호텔 적자” 소문… 탑 쌓아 액땜
`리움미술관은 입구 바닥에 기원문 적은 동판 깔아
한국의 대표적 고급 호텔인 서울 신라호텔엔 ‘비보탑(裨補塔)’이라 불리는 돌탑이 하나 있다.
무심히 지나치면 발견하기 어렵겠지만 눈밝은 이용객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찰의 일주문(一柱門)을 연상시키는 호텔 정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구석에 어른 키만한 돌탑이 서 있다. 산길이나 옛 서낭당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돌무덤의 형태다. ‘나그네의 안녕’을 기원했던 전통적 돌무덤이 왜 5성급 고급 호텔 입구에 서있는 것일까. 발단은 남산 2호 터널이었다. 신라호텔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이 터널은 1971년 개통된 이후 1977년 재개통, 2001년 재재개통, 2005년 확대개통 등을 거치면서 덩치가 커졌다. 그런데 엉뚱한 소문이 생겼다. “터널이 확대될 때마다 호텔엔 적자가 생겼는데 그 이유가 남산 2호 터널에서 사기(邪氣)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소문은 엉뚱했지만 꼬리가 달려 있었다.
“서울을 보호하는 산인 남산을 훼손해 산신(山神)이 노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 얘기가 은밀하게 하지만 빠르게 확산됐다. 호텔 경영진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경영진에 묘수를 던진 것은 삼성그룹 고위층이라고 한다. 이 고위층은 “호텔에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비보탑’을 쌓아 민심을 진정시키라”는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한 돌탑이었지만 효과는 만점이었다. 동요하던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이젠 돌탑의 존재마저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서울 한남동에 있는 삼성 리움미술관이다. 이 미술관 정문 입구 바닥엔 동판이 하나 깔려있다. 이 동판 역시 무심결에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눈여겨보면 다음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는 대지모신(大地母神)의 혜려(惠慮)에 힘입어 문화창달(文化暢達)을 위해 미술관을 세웠습니다.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이 일에 참여하였고 앞으로 참여할 모든 이들에게 기쁨을 내려주시옵소서.’ 현대적 양식의 리움미술관에 ‘대지모신’을 향한 기원문이 왜 있는 것일까. 남산 자락에 자리한 이 미술관은 2004년 10월 문을 열었다. 약 4년6개월 전의 일이다. 하지만 공사에 걸린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인 12년이 소요됐다. 전시 면적만 4297㎡(1300평)으로 사설 미술관으로는 국내 최대규모다. 공사는 쉽지 않았다.
공기(工期)가 오래 걸리면서 “남산을 너무 심하게 훼손한 것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인부들 사이에서 “신령(神靈)을 노하게 해선 안 된다”는 우려가 나왔다. 삼성그룹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이 동판을 설치한 데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다”고 말했다. “공사를 담당했던 인부들과 일반인들의 걱정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여론 무마용”이란 것이다. “아무튼 동판을 설치한 뒤로 우려의 목소리는 줄어들었다”고 한다. 동판에 적힌 기원문으로 인해 산신(山神)의 노여움이 풀린 것일까.
- ▲ 공사기간 12년, 전시면적만 429.7 제곱미터(130평)인 '리움미술관'. 입구엔 대지모신을 향한 기원이 담긴 동판이 놓여 있다.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풍수는 모든 게 자연 그대로일 때 만든 옛 이론일 뿐
제 맘에 드는 장소 골라 만족하며 살면 그곳이 명당”
우리는 인공위성을 쏘고 우주 여행을 얘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주변엔 아직도 풍수지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홍콩에선 풍수가의 말 한마디에 집값이 요동치고 주가가 몸부림치기도 한다. 풍수는 과연 설득력이 있는 이론일까. 첫째 사례로 든 춘천의 J골프장은 정말 ‘금구입수형(金龜入水形)’이란 명당일까. 이 골프장에 대해 풍수지리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항공 사진을 보면 부근의 지형이 ‘거북이가 물을 먹으러 가는’ 형태를 띠고 있다”며 “풍수 이론에 따르면 이런 땅에 집을 지으면 재물이 늘고 자손이 번창한다고 한다”고 말했다.
최 전 교수는 “하지만 그것은 자연이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만들어진 옛 이론”이라고 덧붙였다. “오늘날처럼 개발과 보수가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현실에서 1000년 전의 이론을 무작정 신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최 전 교수는 “(J골프장 건설) 당시 불안해 했던 인부들이 있었고 그들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위지령비’를 세운 것일 뿐”이라며 “마음에 드는 장소를 골라 집이나 사무실을 짓고 스스로 만족하며 살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명당”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예로 든 ‘서울 가회동 177-쫛번지’는 명당일까 흉당일까. 풍수가 김성수(75)씨는 이 터에 대해 “기운이 모이지 않고 흩어지는 곳”이라며 “아파트와 달리 개인 주택엔 일반적으로 대문을 하나만 내는 것이 좋은데 대문을 두 개로 냈기 때문에 기운이 더 흩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김두규 우석대 교수(풍수학)는 정도전의 집터에 대해 “지기(地氣)가 뭉치는 곳이 아니라 흘러가는 곳”이라고 평했다. 풍수 이론상 “기운이 흘러가는 곳은 빨리 흥하고 빨리 망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성수씨는 국세청 본청에 대해 “옆에 부속건물(국세박물관)이 달려 있어 ‘나 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형국”이라며 “자하문 터널을 지나온 바람을 여과없이 맞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수년 주기로 구설이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풍수지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인데 일부 풍수가들이 신비주의적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며 “그런 것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weekly chosun 바로가기